처음 브뤼셀을 찾았던 것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때문이었다. 오직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 하나 보자고 덤벼든 여행이었다. 1898년 브뤼셀에서 서쪽으로 약 55km 떨어진 레신(Lessines)에서 양복쟁이 아버지와 모자 상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마그리트의 삶 대부분은 브뤼셀이었다. 18세부터 브뤼셀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그림 공부를 했고, 24세에 브뤼셀에서 결혼했으며, 29세 때 브뤼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3년간 파리에 있었지만, 곧 브뤼셀에 돌아온 그는 심지어 독일군이 점령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브뤼셀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67년 브뤼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친구인 앙드레 브루통이나 살바도르 달리 등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초현실주의 미술 세계를 브뤼셀에서 만들어 갔다.
그런 마그리트를 찾아 처음 접한 브뤼셀이었는데, 그 뒤로 몇 차례 반복된 브뤼셀은 마그리트 이상의 다른 것들이 있었다. 마그리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만들어진, 그렇다고 해서 마그리트 미술에 어떤 영향도 주었을 것 같지 않은 철저히 현실에 근거한 모습들이다. 휘황찬란하고 고풍스러운 그랑 플라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마그리트를 연결할 수 없는 브뤼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21세기의 그랑 플라스는 고색창연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한 집단 젊음의 향연이다. 유럽의 그 어떤 공간보다 젊음이 날것 그대로 공간을 즐긴다. 하루 종일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에 비명을 지르지만, 밤이 된다고 해서 그 비명이 멈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밤이 되면 여행자뿐 아니라 브뤼셀의 젊음까지 더해져 몸부림을 친다. 그래서 그랑 플라스의 밤은 유럽에서도 가장 젊은 아우성이라고 불린다.
종탑의 높이가 91m에 달하는 시청사(Hôtel de Ville de Bruxelles)는 그랑 플라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브뤼셀은 과거 브라방공국의 수도였고, 막대한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브라방공은 작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자신의 건물을 짓고자 했다. 그렇게 1444년 완공된 시청사는 1695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의 공격을 받아 상당 부분 손실되는 아픔도 겪지만 다시 너끈히 그 아픔을 이겨내고 그랑 플라스의 랜드마크가 됐다.
시청사 맞은편의 또 다른 화려함은 ‘왕의 집(Maison du Roi)’이라고 불리는 브뤼셀 시립박물관(Musée de la ville de Bruxelles)이다. 실제로 왕이 산 적은 없다. 오히려 왕보다는 죄수가 살았다. 16세기 초 완성된 이 건물은 법원과 감옥으로 사용됐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 그것도 시내 한복판 가장 번화한 곳에 감옥을? 아무튼 지금은 시립박물관으로 사용한다. 흥미를 끄는 곳은 3층의 오줌싸개 소년의 방. 전 세계에서 보낸 각국의 의상을 입은 오줌싸개 소년을 볼 수 있다. 광장의 한쪽 끝에서 건너편 끝의 건물들을 보면 그 화려함에 또다시 탄성이 나온다. 길드 하우스(Maison des Corporations)다. 브뤼셀은 13세기부터 유럽 상공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현재를 기준으로 벨기에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영국과도 뱃길로 멀지 않다. 게다가 대서양과 북해를 통하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오가고, 스웨덴이나 러시아와도 쉽게 교역이 가능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그랑 플라스 자체가 길드의 중심이었다. 이 광장을 둘러싼 대부분의 건물들이 길드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도 하다. 길드하우스들은 외관마저 화려하게 장식했다. 길드하우스들은 건물 외벽을 황금으로 치장했다. 건물의 꼭대기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조각상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했다고 한다.
◆ 그랑 플라스를 사랑한 피카소와 위고
이 우아함의 극치를 이루는 고딕 건물 앞에는 늘 젊은 영혼들로 가득하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앉아 있는 ‘어색한’ 스타벅스 자리에 마그리트가 자주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같은 자리지만 마그리트는 스타벅스가 아닌, 지금은 사라진 다른 카페에 앉아서 그랑 플라스를 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청사와 시립박물관 사이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위치한 스타벅스. 1970년대까지 이 자리는 다른 카페가 있었다.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지는 않은데, 이곳 상인들의 말을 빌리면 그전에 있던 카페는 100년이 넘는 고풍스럽고 정갈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카페의 바깥 자리에 종종 앉아 있던 사람이 마그리트라고 한다.
일생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마그리트의 눈에 그랑 플라스는 그다지 ‘프롤레타리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거의 매일 그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눈에 비친 그랑 플라스의 화려함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런데 그 카페에서 그랑 플라스에 매료됐던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피카소다. 피카소는 프랑스의 한 언론인과의 대화에서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에 담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파리에 있을 때면 종종 브뤼셀을 찾았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 또한 마그리트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다.
마그리트와 피카소, 두 사람을 앞서서 누구보다도 그랑 플라스를 사랑했던 인물이 있다. 빅토르 위고다. 작가일 뿐 아니라 정치가로도 영향력이 높았던 위고는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한 직후 파리에서 ‘파리 코뮌’이 일어난 1871년 브뤼셀에 수개월 머물렀다. 브뤼셀에 처음 도착해 그랑 플라스를 지나가던 위고는 탄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다”라고 소리쳤다. 그 말은 그대로 그랑 플라스를 묘사하는 관용어가 됐다. 그랑 플라스 동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아고라 광장(Place de l’Agora).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도심의 작은 공원 같은 느낌을 주는 이곳 한 벤치에는 커다란 덩치의 한 남자가 사시사철, 1년 365일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마치 이 광장을 지키는 사람이기라도 하듯. 빅토르 위고다. 아마도 그가 브뤼셀에서 몇 개월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이 부근에서 머물렀던 모양이다.
빅토르 위고를 따라 브뤼셀 도심의 평안한 주말을 즐기고 있는데 깊고 은은한 오보에 소리가 들린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브리엘스 오보에(Gabriel’s Oboe)’. 앉아 있는 위고의 시선을 따라간 자리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한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연주를 하고 있다.
곧 이어지는 오보에로 듣는 마스카나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의 ‘간주곡(Intermezzo)’. 스탕달이 피렌체 산타 클로체 성당에서 레니의 그림 <베아트리체 첸치>를 보고 아찔한 어지러움을 느꼈던 것처럼 강한 햇살 아래에서 몸이 깊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 아득함을 느낀다. 그렇게 브뤼셀은 또 다른 스탕달 신드롬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예술의 언덕, 왕립미술관, 왕궁과 브뤼파크, 만화 박물관과 초콜릿 박물관, 그리고 맥주 박물관 등 브뤼셀을 꾸미고 있는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성 니콜라스 성당 앞에서 골목을 가득 메운 노점들을 구경하는 것이며, 호객 행위에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푸줏간 거리(부셰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브뤼셀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 도시를 느끼는 방법이다.
그런데 브뤼셀은 그 도시가 품었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 마그리트가 자신의 참혹한 기억을 잊게 하는 망각의 공간이기도 했다. 14세 때 강물에 뛰어든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시신이 인양되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본 참담함.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비통했던 마그리트의 그 모든 기억들을 조용히 덮어주던 공간. 8월 15일이 마그리트의 51주기다. 화려하고 찬란한 중세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마그리트의 살 에는 통증의 기억은 잊게 해줬던 브뤼셀과 그랑 플라스는 작지만 깊은 예술의 감성을 간직한 도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