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 칼럼니스트] 농부가 정성스럽게 기른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면 약식동원(藥食同源)이 따로 없다. 그렇다면 더 건강하게 먹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의 음식 문화를 통해 음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한국 식재료, 손맛으로 깊이를 더하다
우리 음식의 필수 양념은 파와 마늘이다. 불가에선 오신채라고 금기하는 음식이지만 민간에선 입안에서 산뜻하게 퍼지는 파, 마늘 맛을 즐겼다. 파, 마늘 없는 된장찌개와 파, 마늘 없는 김치와 파, 마늘 없는 나물무침은 상상하기 어렵다. 악센트가 빠진 옷차림처럼 심심하고 밋밋하다. 콩을 삶아 겨우내 발효해 물을 부어 천천히 익힌 슬로푸드가 된장인데 이 된장에 칼칼한 파, 마늘을 넣지 않으면 결정적인 맛을 빼낼 수가 없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동굴 안에서 백일을 먹는 것이 쑥과 마늘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쑥 대신 파를 넣어도 아무 상관없겠다고 생각한다. 웅녀가 우리 민족의 어머니라면 쑥과 마늘이든 파와 마늘이든 한국인의 체취는 바로 거기에서 결정됐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가사노동 중에서 마늘 까기와 다지기를 가장 싫어했다. 좀체 익숙해지지도 않았고 결과가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어떤 방식을 써봐도 늘 뭔가 부족했다.

손에 마늘을 묻히기가 싫어 칼로 잘게 다져도 보고 도깨비방망이란 전기기구로 드르륵 갈아도 보고 쇠로 만들어진 마늘 다지기 전용 기구란 걸 몇 개나 사서 짓눌러도 봤지만 그 어떤 방법도 도마 위에 나무칼자루를 거꾸로 잡고 쾅쾅 때려 으깨는 방법에 미치지 못했다. 뒤처리도 맛도 향도 양 조절도 그 원시적 방식이 단연 최고였다.

우리 엄마가 어둑어둑한 부엌에서 오른발로 아궁이에 나무를 밀어 넣으면서 도마 위에서 쾅쾅 리드미컬하게 마늘을 찧던 그 방식 이상의 것을 난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방식으로 귀의했다. 통마늘을 두어 통 꺼내 손톱 밑이 아리게 겉껍질을 까내고 나무 도마 위에 나무로 해박은 칼자루를 뒤집어 탕탕 다지면서 느끼는 안락과 희열, 그건 그간의 내 방황과 모색이 가져다준 보답이다.

내가 하고 있는 방식이 인류 조리사상 최선이고 최고라는 걸 확신하므로 이제 난 더 이상 마늘 다지기를 싫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금방 다진 마늘을 넣은 시금치무침과 미리 다져 냉장실에 보관하거나 냉동실에 얼렸다 녹인 마늘을 넣은 시금치무침은 임금의 음식과 천민의 음식만큼 격조가 다르다.

한국인은 손바닥과 손가락의 정교한 놀림을 관장하는 장장근(長掌筋)이 유난히 발달한 민족이라 한다. 자주 쓰는 근육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근육은 퇴화한다는 건 생리학의 상식이다. 서양식 합리주의는 손을 많이 쓰는 작업에 기계를 사용하면 효율적이라는 데 재빨리 착안했다. 산업화 이후 가사와 수공업 노동의 기계화가 빠르게 진행돼 인간이 손을 사용할 일이 부쩍 줄어들었다. 손 쓸 일이 줄었으니 장장근이 퇴화했을까. 아니다. 우리는 젓가락을 쓴다. 멸치볶음이나 콩조림 같은 맛있는 반찬을 집어 먹자면 손가락을 정교하게 놀릴 수밖에 없다. ‘썰기’의 챔피언을 뽑자면 한국인이 부동의 1위일 건 물으나마다.

오죽하면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가 캄캄한 데서 떡을 고르게 빨리 써는 기술을 아들의 글씨 수업을 질책하는 회초리로 삼았을까. <대지>를 쓴 펄 벅 여사가 경주에 왔을 때 가늘고 고르게 썰어서 무쳐 놓은 무채를 보고 사람 손으로 썰었는지 기계로 썰었는지를 못내 궁금해하고 경이로워했다 한다. 가래떡이든 무든 칼국수든 가늘고 고르게 써는 데엔 선수였던 우리가 정작 한식 조리에서 칼로 써는 공정은 되도록 피했다는 것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미각을 위해 어떻게 파쇄할 것인가
우리 민족은 음식 재료를 파쇄(破碎)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미각의 차이를 민감하게 알아챘다. 기본양념인 마늘과 파를 쇠칼로 썰었을 때와 나무칼등으로 으깼을 때와 손으로 무질렀을 때의 전혀 다른 맛을 감별할 줄 알았다.

영양학적으로는 무쇠칼의 철 성분이 비타민을 파괴한다고 설명하겠지만 옛 어른들의 설명은 달랐다. 쇠를 대면 채소 안에 든 생명력이 달아난다고 이해한 것 같다. 그랬기에 조리 과정에서 함부로 칼 대는 것을 금기했다. 되도록이면 손을 썼고 손이 안 되면 나무나 돌을 썼고 최후의 순간에만 생명체의 몸에 쇠붙이를 댔다.

LA갈비는 소 늑골의 형태를 파괴해서 가로로 자르는데 우리 갈비는 갈비의 형태를 자연 그대로 보존해서 세로로 자른다. 갈비뿐 아니라 모든 자연물의 가로 절단은 원형 파괴율이 높다. 세로로 절단해야 원형이 보존된다. 채소, 과일, 육류 등 모든 식품 재료의 결이 종적이기 때문이다. 오렌지나 네이블오렌지 같은 귤류도 서양의 식탁에는 가로로 썰어내는 데 한국에서는 낱낱이 뜯어 먹으며 결을 살렸다.

칼을 대는 것을 금기시하는 우리 풍습은 동서 문화를 비교해보는 좋은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서양 문화는 인공적일수록 가치를 발휘하고 한국 문화는 자연적일수록 가치를 발휘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일까.

우리는 뭐가 됐든 자연 상태를 파괴하는 것을 싫어했다. 큰 나무를 베는 것도 강물을 막는 것도 산을 부수는 것도 두루 금기였다. 목신과 강신과 산신이 노한다고 여겼다. 고목을 베어 몸을 다치거나 강물을 훼손해 입이 붙어 버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근대문명은 자연을 자연 상태로 그냥 두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최근 20, 30년 새 우리 부엌에서도 태연히 오렌지를 가로로 자르고 LA갈비를 선호하게 된 것 같다. 심지어 식재료가 계절을 잊었다. 딸기와 오이와 수박과 고추에 제철이 따로 없다.

붉은 고추는 몸을 덥게 하고 푸른 오이는 몸을 식힌다. 옛 어른들은 음식에도 오행이 있다고 여겼다. 목화토금수라는 우주의 구성 원리와 다섯 계절(사계+환절기)과 오색과 오장과 오감과 오관과 오미로 연동된다는 의식에 투철했다. 음식의 맛과 빛깔이 우리 몸속의 장기와 감정과 의식에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봄은 나무고 푸른빛이고 눈이고 간이고 신맛이다. 눈이 좋지 않으면 간도 나빠지고 푸른빛과 신맛이 당기도록 우주가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믿음은 이제 거의 미신이 돼 버렸다. 수만 년 동안 계속돼 온 질서를 현대의 우리가 교란하고 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인류는 수만 년 동안 차가운 음식으로 더위를 식히고 따뜻한 음식으로 추위를 덥히며 살아왔건만 계절 없이 아무 때나 아무 음식을 마구 먹어 버려도 정말 괜찮은 걸까.

제철밥상을 먹자는 것은 이제 호사가의 선언이 돼 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아침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어린 오가피 잎과 두릅 순을 뜯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된장으로 간하고 파, 마늘 양념으로 무쳤다. 비닐하우스도 온실도 아닌 자연의 볕과 바람 속에서 얻는 한사발의 나물, 나는 발달한 장장근으로 젓가락을 놀려 봄나물을 입안에 넣었다.

몸 안에 퍼지는 우주의 생명력, 인류와 민족의 본질도 결국은 이것이다. 제 몸을 만든 땅에서 같은 성분의 지수화풍을 빨아 마시며 광합성을 이룬 식물의 이파리, 그 이파리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우주를 흡입하랴. 어떤 문명도 어떤 과학도 어떤 예술도 어떤 진리도 이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 푸른 이파리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마음, 한국 음식과 문화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한국 식재료, 손맛으로 깊이를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