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블루마운틴의 암벽과 골짜기.
장엄한 블루마운틴의 암벽과 골짜기.
big story [한경 머니 = 글·사진 장석주 시인] 내가 겪은 파리, 런던, 로마, 뉴욕, 멕시코시티, 아바나, 아테네, 이스탄불, 텔아비브, 프랑크푸르트, 시드니, 오클랜드, 방콕, 싱가포르, 마카오, 인천 같은 국제공항들은 하루에도 수천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드나든다.

공항은 출발과 도착의 장소, 이별과 환대의 자리다. 공항에는 휴가 여행과 출장, 이민이나 친척 방문 등을 하려는 자들로 북적인다. 단체 여행객들이 모여 있는 바로 옆에는 이별의 아쉬움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연인도 있다. 휴가철의 국제공항들은 수많은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부쩍 붐빈다. 공항 터미널은 복잡하지만 보이지 않는 통제 속에서 엄격한 질서가 냉정한 힘으로 작동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국제공항들을 거치는데, 공항 터미널로 들어서서 항공사 사무실들, 환전소, 안내소, 체크인 구역, 검색구역, 보안구역 등을 거칠 때 낯선 공기와 마주친다. 이국의 냄새를 희미하게 품은 낯선 공기로 인해 우리의 상상은 저 먼 낯선 고장들로 달려간다.

우리는 공항 터미널의 스크린에서 비행편의 도착과 출발 시각을 알아보고, 어느 게이트에서 탑승할지를 확인한다. 입출국 심사대를 거쳐 보안구역을 나오면 여행객들은 면세점이나 커피숍을 들르거나, 군데군데 있는 휴식공간에서 쉬거나, 자기가 타야 할 비행기 탑승 게이트를 찾아 이동한다.

예정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터미널 통유리 저 너머로 활주로와 곧 이륙할 비행기 기체에 정비사들이 달라붙어 점검하는 모습을 다소 느긋하게 내다볼 수도 있다. 북반구의 한국과 남반구의 시드니는 계절이 반대다. 우리는 여름철로 접어든 한국을 떠나 겨울의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밤하늘에는 북두칠성이 없고 대신 남십자성이 뜬다. 부엌 개수구의 물도 한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간다.

우리는 7월의 첫날 시드니에 도착해서 교외 주택에서 40여 일 동안 머물렀다. 우리는 끼니마다 재스민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양고기를 구워 와인을 마셨으며, 햇볕 환한 날엔 베란다에서 시집이나 철학책을 읽고, 자주 공원에 나가 걸었다.

우리가 시드니에서 여름 나기를 한 것은 심령(心靈)이 낡아빠진 천 조각같이 오래 닳아서 지쳤던 탓이다. 고갈된 내면을 위해 이국의 혼돈과 풍요를 수혈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떠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에 공감한다. 낯선 장소는 새로운 생각을 낳는다. 우리는 여행 트렁크에 겨울옷과 책들을 챙겨 시드니로 왔고, 시드니에서 한 달 동안 빈둥거리며 살았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지중해의 산토리니섬과 시드니의 블루마운틴을 본 사람과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 돈과 야망을 좇느라 산토리니섬과 블루마운틴을 일별할 기회조차 없이 살았다면, 무엇을 이루었건 간에 그 삶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작은 유흥이나 기쁨조차 미룬 채 날마다 출근해서 8시간 이상씩 직장에 매여 살면서 달마다 돌아오는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다가 어느 날 문득 말년의 의기소침과 마주치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월급 생활자건 자영업자건 임대업자건 간에 소규모의 인생 설계를 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삶을 꾸리는 건 숭고할 테다. 그 생활이 한 줌의 보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라면 아마 머리를 벽에 쿵쿵 찧고 싶어질 테다.

블루마운틴은 고요하고 장엄함하지만 실은 수백 미터가 넘는 암벽과 골짜기와 협곡들이 어우러진 유칼립투스 숲으로 된 험준한 산이다. 블루마운틴은 움푹 꺼진 지형으로 저지대에 형성된 산악 지대다. 유칼립투스 숲은 빽빽해서 길을 잃은 조난자들이 자주 발생한다.

저 거대한 울울창창한 수목 생태계 아래 양서류와 설치류들이 번성해서 상호 에너지를 교환하는 생명계를 이루었거니 짐작한다. 블루마운틴은 1813년에서야 겨우 탐험대가 이 숲속을 관통해서 나올 수 있었다. 탐험대는 18일 동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블루마운틴 세 자매봉을 바라보는 장석주·박연준(부부) 시인.
블루마운틴 세 자매봉을 바라보는 장석주·박연준(부부) 시인.
블루마운틴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

블루마운틴의 햇빛은 화창하고, 대기는 수정처럼 파랗다. 저 푸른 심연 어딘가에 신의 거처가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가 바로 신들의 불확실한 거처, 신들의 오두막, 바람으로 지은 신들의 누옥, 신들의 흰옷을 빨아 널 무쇠 처형대”라고 할 수 있다면 저 하늘을 내가 살고 있는 고장으로 옮겨놓고 싶다.

여기는 겨울이고,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저 깊은 숲에서 올라오는 바람 소리는 거대한 짐승의 신음 같다. 나는 어린 인류가 돼 불면으로 뒤척이며 아름드리 유칼립투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크고 음산한 소리 때문에 잠 한숨 붙이지 못했다.

우리는 자주 길을 따라 걷지는 않았지만 블루마운틴의 오솔길로 접어들어 뷰포인트를 찾았다. 전망이 환하게 트인 풀핏 암벽 전망대(Pulpit Rock Lookout)에서 블루마운틴의 장대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본다.

저 벼랑 아래 광활한 숲과 수직으로 솟은 거대한 암석들이 병풍처럼 늘어 선 블루마운틴은 놀라운 위용을 뽐낸다. 해질 무렵이라 수 킬로미터 수평으로 이어지는 암석들은 거대한 핀 조명을 때린 듯 따뜻한 주황빛에 젖었다. 이 풍경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모든 풍경은 형태를 이루는데, 그것의 내부에 세(勢)와 기(氣)를 품는다. 암석과 벼랑과 가없이 펼쳐진 수해(樹海)와 골짜기들과 겹쳐지고 어긋나는 봉우리들과 하늘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등고극목(登高極目)’이란 말을 실감했다.

발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이고, 먼 곳까지 공간을 밀고 나간 산들은 저 끝에서는 한낱 눈썹같이 보일 따름이다. 먼 곳의 풍경은 멀어지는 가운데 그 물질성이 희박해지는 것이다. 먼 풍경들이란 실은 환몽(幻夢)이 아니고 무엇일까.

블루마운틴의 일몰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저 장엄한 짧은 황혼의 빛 속에 조종(弔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연의 웅장함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하는 날카로운 인식과 함께 우리를 겸손하게 이끈다. 이 세속의 감옥에 와서 살면서 그런 깨달음 한 점조차 없다면 그는 마소나 다를 바가 없을 테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주 감응하고, 경이 속에서 깨달으며 보다 나은 사람으로 향상돼야 한다. 서쪽 하늘에 잔광(殘光)마저 사라져 사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마치 태고의 것인 듯 음산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가지들이 휘어져 꺾일 듯 바람의 기세는 거셌다. 우리는 이른 별들이 하나둘씩 돋아나는 밤의 어둠 속에서 생의 비밀을 탕진한 자들로 서 있었다.

비밀이 없는 자란 도박판에서 마지막 판돈까지 탈탈 털어 넣고 빈털터리로 일어서는 자나 다를 바 없다. 이 시간의 단면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외롭다. 이 초밤, 탕약 같은 외로움을 들이키며 그것을 제 존재의 양식으로 삼은 자들 두엇을 기억한다.

시드니에 머물며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 시드니에서 많이 먹은 것은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인데, 밀가루 반죽을 얇게 입힌 생선과 채썰기를 한 감자를 고열의 기름에 튀겨낸 음식이다. 이곳 사람들의 주식이다.

두껍게 썰어 익힌 쇠고기 스테이크,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는 생선 요리도 먹었다. 라자냐와 리소토, 타이 음식들, 굴과 킹피시, 어린 양의 허벅지 살이나 수조에서 방금 꺼낸 바닷가재 살을 회로 먹었다. 날것과 익힌 것, 그 밖에 캥거루 고기와 같이 이국적인 음식도 먹었다.

낯선 길을 헤매면서 직관을 깨우다

미셸 푸에쉬는 “먹는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생태적인 행위다”라고 말한다. 입으로 뭔가를 가져와 먹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 일종의 의례, 사회적 삶의 한 형식, 관능적 즐거움의 실현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심신 통합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적 의미들이 녹아 있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누군가와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를 받아들이고, 그와 우정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푸에쉬에 따르면 누군가와 더불어 음식을 먹는 것은 개인과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우리는 싫은 사람과 굳이 함께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시드니 체류 일정이 끝날 무렵 이별의 의식으로 여러 사람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 “곧 돌아가신다고요? 가시기 전에 식사 한 번 하시죠.” 이렇게 식사 초대를 받아 시드니에서 셰익스피어만큼이나 명성이 높은 옛 시인의 바닷가 집필실을 개조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또 바닷가재 요리를 하는 레스토랑에서 붉은 와인과 함께 한 가족과 식사를 했다. 그렇게 식사를 함께 나누는 사이 이별의 섭섭함은 얇아지고 우리의 우정과 어린 양 같은 무구(無垢)함은 보다 더 깊어진다.

여름은 끝나고 시드니에서의 여행도 끝난다.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여행에 대한 백일몽이 내 안에 둥지를 튼 건 오래전이다. 저 천공 아득한 곳을 떠가는 비행기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저 백여 년 전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처럼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 다오. 이곳의 진흙은 우리 눈물로 만들어졌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여행자는 고독을 애써 겪으려는 자다. 우리는 먼 곳으로 떠나는데 가장 먼 도착지는 바로 자신이다. 여행이란 자기를 떠나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긴 여정(旅程)이다. 여행은 낯선 길을 헤매면서 이성을 잠재우고 전두엽의 직관을 깨워 본디의 자기와 만나는 행위이고, 그것이 여행의 참다운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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