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격변을 치르고 있다. 지난 3월 네덜란드 총선, 4〜5월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당초 우려와 달리 극우 세력이 약화됐다.
이 때문에 9월에 치러질 독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네 번 연임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변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영국 조기 총선(6월) 이후 본격화될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에서도 난항이 예상된다.
일본은 추진 5년 차를 맞는 아베노믹스가 최대 고비를 맞고 있다. 1단계 ‘발권력을 동원한 엔저 유도’, 2단계 ‘미국식 양적완화’, 3단계 ‘마이너스 금리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일본은행(BOJ)이 추가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금융 완화 수단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올 하반기에 들어서는 재정정책으로 우선순위가 옮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도 ‘2년 차 증후군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과 대내외 위상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제13차 5개년 계획(2016〜2020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출범(2016년 1월), 위안화 국제통화기금 특별인출권(IMF SDR) 편입(2016년 10월) 모두 2년 차를 맞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서방 세력 확장,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등에 따른 지정학적 위험도 주목해야 할 변수다. 인도의 화폐개혁 성과는 모디노믹스(모디 정부의 경제정책)의 운명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경제의 회복 여부도 우파로 돌아선 이 지역의 이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예측기관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 지정학적 위험이 세계와 한국 경제에 복병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에서는 군사적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유럽 등 서방 국가에서도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문제에 따른 한국 경제의 지정학적 위험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에 따르면 현재 세계 지정학적 위험지수(Geopolitical Risk Index, GPR)는 역사상 최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GPR 지수는 1900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 주요 언론에 전쟁, 테러, 정치적 갈등 등이 언급된 비중을 종합해 2000〜2009년을 기준으로 세계 지정학적 위험이 심화 혹은 완화됐는지를 알 수 있는 객관적 지표다.
지정학적 위험 등 복병 곳곳에
그 어느 국가보다 격변을 치를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가 한국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우리 경제가 수출을 중심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앞날과 관련해 비관론이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단기적으로 연착륙과 경착륙 간의 논쟁 속에 후자에 무게를 두는 시각이 가시지 않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지속 성장 여부와 관련해서는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에 걸릴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나온다.
‘중진국 함정’이란 신흥국이 경제 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에 성장이 장기간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1인당 국민소득으로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으로 분류할 때 한국은 아직까지 중진국으로 분류된다.
우리 경제는 개발 시작 이후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생산 여건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 특히 청년층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인력 수요와 공급 간의 불일치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만성적인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노동력에 이어 생산에 필요한 자본도 저축률 하락 등으로 갈수록 성장률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축률이 하락하는 요인으로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사회보장 지출 확대, 가계는 사회안전망 강화에 따른 예비적 동기의 저축 필요성 감소와 소비 여건 개선 등이 지적되고 있다. 기업의 현금 보유는 사상 최대 규모다.
부패와 뇌물 사건도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뇌물과 부패 정도는 정치적 영향력과 행정 규제에 비례한다. 독점적 이윤인 경제적 지대(rent)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은 치열한 로비 활동을 전개하고 이 과정에서 뇌물과 부패가 만연하는 소위 ‘지대추구형 사회(rent oriented society)’가 된다.
정책당국이나 정책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도 종전만 못하다. 특히 정치권에 대해 그렇다. 당리당략에 국민과 우리 경제 앞날은 뒷전이다. 신뢰 회복의 ‘골든타임’까지 놓쳐 이제는 우리도 일본처럼 아무리 좋은 정책 신호를 준다 하더라도 정책수용층은 정작 반응하지 않는 ‘좀비 국면’에 빠져 들고 있다.
통화승수, 통화유통속도, 예금회전율 등 각종 경제활력지표가 눈에 띄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한번 해보자(can do)’ 하는 심리가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경기 부양 대책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경기 회복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사례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대외적으로는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높아진 국제 위상에 맞게 내수시장이 발전하지 않음에 따라 통상마찰도 잦아지고 있다. 특히 기업 간 불균형이 심화된 상황에서 특정 기업의 경우 세계 최고의 반열 위에 올라간 것에 따른 착시현상까지 겹치면서 주요 교역국으로부터 통상마찰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점도 우리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는 때와 맞춰 나라 안팎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 우리 경제에 대해 비교적 밝은 전망을 내놓는 해외 기관일수록 19대 대선 이후 한국 경제가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평가가 고개를 들면서 재차 불거지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론’을 과연 새로운 정부가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 경제 위기론 불식시킬까?
한국처럼 위기 경험국의 위기 극복 정도를 평가하는 데에는 ‘위기 3단계론’이 적용된다. 특정국 위기는 외화 등에 금이 가면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다.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 담보 관행이 보편화된 국가일수록 경제 시스템 위기로 비화되고,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이 수순을 거쳐야 한다.
위기 경험국은 유동성 위기를 해결한 후 시스템 위기를 극복하는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하지 못했다. 한국도 외화 유동성을 확보한 이후 잦은 정책 변경, 정부 혹은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 등으로 시스템 위기 극복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실물경기 회복이 완전하지 못한 채 20년이 지났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시스템 위기와 실물경기 위기 극복이 지연되면 될수록 각종 착시현상에 따른 투기 요인이 커지는 대신 위기 불감증에 따라 대처 능력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이때 투기 요인이 차익 실현으로 연결될 경우 극복했다고 봤던 유동성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는 것이 ‘위기 재귀론’이다.
외환위기 이후 들어선 어떤 정부든 모두가 경제 안정성이 계속 흔들리고 위기론이 가시지 않는 것은 ‘통계 수치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 입법과 정책 운용 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 시스템의 위기’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제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경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부터 선행돼야 한다. 정확한 현실 진단을 토대로 경제 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특히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수출이 세계 경제 환경이나 환율이 조금만 불리하게 되면 크게 감소돼 곧바로 위기감이 닥치는 소위 ‘천수답 구조’를 ‘수리안전답 구조’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땜질식 단기 처방은 금물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도 경제 우선 정책을 예산 조기 집행과 같은 단기 처방에 의존할 경우 고질병인 ‘고비용-저효율’ 문제를 개선하는 일은 요원해진다. 오히려 구조조정 노력을 지연시킴으로써 후손이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업에도 우리 경제 내에서 안정된 경영 활동을 보장하고, 해외에 진출한 기업도 국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개혁 정치이든 산업 정책이든 간에 정책의 일관성과 명확한 기준이 전제돼 시행해야 한다.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서 기득권 때문에 핵심 규제 사항을 풀지 못하거나 특정 기업에 막대한 이권이 보장되는 신규 사업을 허가해주면서 뒷거래가 오가는 식의 뒷맛이 가시지 않는 정책이 계속될 경우 위기감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우리 기업의 ‘무국적화’를 촉진하고 산업 공동화와 실업 증대 등의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기업도 경기가 좋을 때에는 한탕하고 경기가 나쁠 때에는 정부의 지원을 바라는 ‘화전인식 경영’은 지양해야 한다. 정치권과 정책당국이 실망스럽다고 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는 의무다.
국민에게도 경제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것이 시급하다. 법규이든 사회규범이든 간에 정책당국이 마련하는 대로 쫓아가더라도 고위층에서 뇌물이다, 떡값이다 해 부정부패가 발생할 경우 국민은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감에 휩싸여 위기감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
정부가 실시하는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발상의 대전환도 필요하다. 갈수록 국민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책당국(정치권의 책임이 크다)이 국민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올바르게 국정을 운영하지 못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책당국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이 부응하지 않을 경우 또다시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정책의 악순환’만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나 자신이 다소 희생한다는 인식을 전제로 정책 결정 과정에 있어서는 여론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일단 정책이 추진되면 소기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해줘야 한다.
모두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그런 만큼 문재인 정부는 많은 정책을 내놓기보다 정치권과 정책당국의 ‘마라도나 효과(마라도나에 대한 믿음이 강해 수비수가 미리 행동하면 다른 쪽에 공간이 생겨 골 넣기가 쉽다는 의미)’가 절실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책수용층이 ‘프로보노 퍼블릭코(pro bono publico)’ 정신을 발휘한다면 ‘경착륙’과 ‘중진국 함정’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다.
지금은 우리 경제가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과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권과 정책당국은 진심으로 정책수용층의 협조를 구해 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조금만 뜻대로 안 되면 ‘과거 정부와 언론, 국민 탓’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싹이 돋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론’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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