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나만의 재단’ 디자인…‘공익신탁’을 아시나요?
기부도 은행에서 예·적금에 가입하듯이 손쉽게 할 수는 없을까. 더구나 기부자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나만의 재단’을 디자인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거다. 이것이 사람들이 ‘공익신탁’을 찾는 이유다.

학교 앞 길거리 리어카에서 떡볶이를 파는 할머니.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어느덧 많은 돈을 모았는데 이제는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자선사업이나 거창한 장학재단을 만들자는 게 아닌데 괜히 일만 크게 벌이는 것은 아닌지 마음만 복잡할 뿐이다.

결국 할머니가 선택한 방법은 은행에 찾아가 원하는 기부 형태를 골라서 ‘나만의 재단’을 만들 수 있는 공익신탁이었다. 이를 통해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급식비를 지원해주며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는 법무부 공익신탁 공시 홈페이지(www.trust.go.kr)에 올라 있는 웹툰의 내용이다. 그만큼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기부를 실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1초에 약 150달러를 번다는 세계 최대 부호 빌 게이츠,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중국 최대 부호인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 같은 슈퍼리치들만이 기부를 통해 행복 나눔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공익신탁은 금전 등의 재산을 은행 등 금융기관이나 공익단체에 신탁해 장학, 사회복지, 체육, 학술, 문화, 환경 등 공익 목적에 사용하도록 하는 기부 방법으로, 위탁자(기부자)와 수탁자(은행 등) 간의 신탁계약만으로 손쉽게 다양한 기부를 실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익신탁은 선진국형 기부 시스템
한국의 기부 문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 영국의 자선구호재단(CAF)이 발표한 한국의 2015년 기부지수(WGI)는 35점으로 조사 대상 145개국 중 64위를 차지했다. 2013년 45위, 2014년 60위에서 또다시 4계단 하락한 것이다.

기부지수 1위를 차지한 국가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500달러 수준의 미얀마인데,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로 1인당 GDP가 2만5990달러 수준인 한국으로서는 다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후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2월 14일 발표한 <나눔의 경제학-영미와 비교한 한국 나눔 문화의 특징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기부금 신고액은 2006년 8조1400억 원에서 2010년 10조340억 원, 2013년 12조4859억 원 등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GDP 대비 기부액의 비중은 2006년 0.84%, 2013년 0.87%로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이는 미국(2.0%)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뉴질랜드(1.35%)에 비해서도 낮다. 국민의 기부 참여율은 2013년 34.5%를 기록했는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25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인들에게 기부를 불편하게 한 것일까. 상당수 한국인들에게 기부는 여전히 연말연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사랑의 온도’나 구세군의 ‘자선냄비’라는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까다로운 재단 설립 절차를 말하기도 하고, 기부를 요청하는 단체들에 대한 불신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 기부를 단순히 부자들의 돈 자랑 정도로 여기는 그릇된 색안경이나 기부금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15%에 불과하고 2000만 원 이상 고액 기부금의 세액공제율도 30% 수준에 머물러 있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세제 유인책이 약하다는 볼멘소리도 내놓는다.

이처럼 답답한 횡보를 거듭하던 공익기부의 활로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카드가 바로 ‘공익신탁’이다. 그동안 신탁법 내 몇 개 조문에 머물러 유명무실하게 운영됐던 공익신탁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 2014년 3월 18일 공익신탁법을 제정하게 된 것.

기존 대상 사업에 따라 주무관청이 달라졌던 문제는 법무부로 일원화해 관리, 감독을 강화하도록 했으며,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식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다만 세제 혜택 확대 등 정부 부처 간 조율이 필요한 부분은 장기적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Zoom in]‘나만의 재단’ 디자인…‘공익신탁’을 아시나요?
소규모 자금으로도 설정 가능
공익신탁의 가장 큰 특징은 기부자가 자신이 원하는 기부를 손쉽게 설정해 적은 비용으로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기부자가 기부 의사를 갖고 은행 등 금융기관(수탁기관)에 돈을 맡기면 수탁기관이 이 돈을 운용해 수익금을 만들어 기부자가 지정한 공익사업에 투자하는 형태다.

강성유 KEB하나은행 신탁부 변호사는 “기존 기부금을 모집, 집행하는 단체는 재단 형태가 대부분인데, 기본적으로 목적 사업들이 있는 재단에 기부자가 돈을 집어넣는 시스템인 데 반해 공익신탁은 기부자의 의사를 반영해 독립적으로 설정된 공익신탁을 운영하게 된다”며 “위탁자(기부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기부를 머릿속에 생각해서 은행을 찾으면 되며, 이후 목적 사업에 맞는 인가 신청 등은 모두 은행에서 진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공익신탁의 강점은 일반적인 공익법인 설립에 비해 현격히 줄어드는 관리 비용이다. 재단법인 등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사무실 임대료나 인건비 등 통상 전체 기금의 5~30% 정도의 운영 경비가 필요한데 이 같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거다.

또 공익신탁은 계약, 유언, 위탁자의 선언에 의해 설정이 가능하며, 신탁 설정에 관해 특별한 방식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기본적으로 공익법인의 설립보다 간편하고 수월하다. 출연 재산의 규모 및 활용 등도 위탁자가 결정하게 되며, 소규모 자금으로도 공익신탁 설립이 가능한데, 모금형 공익신탁의 경우 불특정 다수인의 소규모 출자를 모아서 자산가의 거액 출연과 맞먹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실제 2016년 6월 16일을 기준으로 청년 일자리 창출 지원을 위해 설립된 ‘청년희망펀드’는 9만3124명의 위탁자가 401억여 원의 신탁재산을 모았으며, 법무부 전 직원들의 급여 중 1000원 미만의 금액을 신탁하는 ‘법무부 천사 공익신탁’은 2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참여해 1억8545만 원의 신탁재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난민, 수용자 가족들을 돕는 데 사용되고 있다. 또 아동학대 피해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데 쓰일 ‘법무가족 파랑새 공익신탁’은 9013명이 동참해 1억2000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았고,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비 및 교육비 등을 지원하는 ‘광복 70주년 나라사랑 공익신탁’에는 배우 유동근 씨 등 68명의 위탁자가 189억 원의 원금을 설정해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으로 지원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공익신탁은 가까운 은행 영업점에서 계약할 수 있고, 이후 은행의 자금 운용 스케줄에 따라 안전하고 투명한 자산 운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공익신탁을 집행하는 은행을 법무부가 직접 감독하고, 공익신탁 공시 시스템을 통해 자금의 운용 및 집행 내역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현재 공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공익신탁은 총 18개로 청년희망펀드(수탁자 금융기관 12개)를 제외하고는 17개 모두 KEB하나은행이 수탁자로 돼 있다. 이는 KEB하나은행이 2002년 합병한 서울은행의 전신이 서울신탁은행이었고, 1971년부터 공익신탁사업을 해 왔던 역사가 배경에 깔려 있다.

기부형태 다양하게 디자인 가능
공익신탁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다양하게 디자인돼 운영되고 있다. 국제구호 전문가이자 오지 체험을 다룬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책으로 ‘바람의 딸’로 불리는 한비야는 ‘한비야의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2007년 50명으로 시작해 현재 50만 명으로 학생 수가 훌쩍 늘어난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를 지원하는 공익신탁인데 한 씨는 현재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다.

가수 이승철은 아프리카 어린이의 교육과 치료를 돕는 리앤차드(Lee&Chad)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지난해 12월 팬들도 쉽게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승철의 희망 리앤차드 공익신탁’을 설립했다.

월드비전의 아동보건 캠페인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연기자 홍은희도 소아질환을 앓는 어린이들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분당서울대병원과 월드비전의 ‘난치성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야구인 허구연(한국야구위원회 야구발전위원장)이 KEB하나은행과 ‘허구연의 야구사랑 공익신탁’ 협약을 맺었다. 이 공익신탁은 야구를 매개체로 국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돕고 해외 저개발국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야구인 지원을 위한 제반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것으로 위탁된 자금은 베트남 하노이 소재 고등학교 야구대회를 지원하기 위해 사용되며, 향후 기부되는 자금으로는 국내 저소득층 유소년 야구 활동 지원이나 저개발 국가의 야구시설 건립 등에 활용될 예정이다.

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나 지점을 통해 공익신탁을 설립한 일반 고객들도 있다. 기업 컨설팅 회사를 경영하는 이 모 씨는 국내에도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혁신적인 기업과 이를 이끌 인재들이 나와야 한다는 소신으로 지난해 12월 ‘혁신기업가 기금 공익신탁’을 설립했다. 평소 글로벌 인재,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KEB하나은행과의 상담 과정에서 구체화된 거다.

올해 5월에 설립된 ‘학교생활 지원 공익신탁’도 개인적인 바람이 공익적인 사업으로 확장된 경우다. KEB하나은행 고객이 고등학생 자녀에게 인생 공부를 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에 공익신탁을 고민하다가 주변에 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동이나 청소년들을 건전하게 육성하는 사업으로 확장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 그대로 ‘나만의 재단’을 만든 사례다.

위탁자들의 소중한 꿈을 담아낸 공익신탁도 있다.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아이스하키 후원회’가 평창 동계올림픽 본선에 자동 출전권을 부여 받은 남녀 국가대표 아이스하키선수단을 후원하기 위해 모집하고 있는 ‘코리아 아이스하키 사랑 공익신탁’이 바로 그것이다.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스하키는 개최국에 자동출전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한국의 출전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이 워낙 국제 수준과 격차를 보이고 있어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조차 한국의 출전에 시큰둥해했다. 후원회 창립을 주도한 게리 로렌스 엑셀시아캐피탈 아시아 회장 등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국의 출전은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 한국 국가대표팀의 꿈은 올림픽 1승이다. 2014년 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 1그룹 A대회에서 5전 전패로 고개를 숙였지만, 한국 땅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만큼은 반드시 1승을 거둬 희망을 키워 나겠다는 것이 ‘코리아 아이스하키 사랑 공익신탁’을 후원하는 아이스하키 팬 248명과 선수단의 염원이다.

박상빈 KEB하나은행 신탁부 팀장은 “은행의 입장에서도 공익신탁은 공공에 대한 기여를 추구하면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금융 본연의 역할을 되새길 수 있는 상품이다”라며 “아이스하키 공익신탁 협약식에 참석했었는데 올림픽 1승을 염원하는 팬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가슴 뭉클했었다”고 전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