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teaching] 자동인형 대신 인간, ‘아! 바틀비’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에 자신의 청춘을 저당 잡힌 직장인들. 그들은 ‘필경사 바틀비, 월가이야기’에서 처럼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당당하게 ‘자동인형 대신 인간’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한 남자가 있었다. 이름은 바틀비. 그가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유명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적어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바틀비를 주목하지 않았다. 실제로 월가의 빽빽한 사무실과 치솟아 가는 건물 사이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신문에 오르내리는 명사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사회에 물의를 빚고 있는 범법자가 아닌 다음에야 월가에서 관심을 끄는 인물은 ‘큰손’ 고객 정도가 전부였다.

바틀비가 새롭게 입사한 곳은 부동산 권리증이나 양도증서를 작성하는 변호사 사무실로 그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각종 서류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원래 두 명의 필경사가 있었지만 일이 넘쳐나면서 바틀비가 새롭게 고용됐다.

바틀비 이전에 먼저 있었던 필경사는 두 명인데 그저 ‘터키’와 ‘니퍼즈’로만 불렸다. ‘터키(turkey)’는 원래 ‘붉은 칠면조’를 뜻하는 말이다. ‘터키’가 ‘터키’로 불린 사정은 점심시간 이후 그의 얼굴색 때문이다. 터키는 오전 시간에 ‘쉽게 넘볼 수 없는 방식으로 대단한 양’의 일을 완수하지만 에너지가 소진된 오후 시간이 되면 업무 역량이 현저히 저하됐다. 변호사 입장에서 보면 ‘해고의 사유’였지만, ‘헌신적인 오전 근무’를 감안해서 ‘그가 남아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터키 외에 또 다른 필경사 니퍼즈(nippers)는 ‘족집게’를 뜻하는 말인데 그의 거친 야망을 에둘러 이야기한 말이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니퍼즈는 스물다섯 살가량의 청년으로 매우 뛰어난 재능이 있기도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해서 늘 소화불량을 달고 다녔다. 그럼에도 깔끔하고 재빠르게 필사하는 능력이 있어 터키와 마찬가지로 변호사에게는 매우 유용한 사람이었다.

두 명의 필경사를 고용하고 있는 변호사는 이들에 비하면 평범했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줄곧 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확신’했으며 ‘수지맞는 일만 하는 야심 없는 변호사’인 동시에 ‘부당한 일에 분개하는 위험한 행동’을 절대로 하지 않는 ‘안전한 사람’이었다.

바틀비, 피로사회 흔든 최초의 저항
돈이 몰려드는 월가의 사무실이 대개 그러하지만, 터키가 서서히 지쳐 ‘붉은 칠면조’가 되든지 혹은 니퍼즈의 짜증과 불만이 ‘족집게’처럼 삐져나오든지 그런 변화와 무관했다. 이곳에 새롭게 들어온 자가 바로 ‘바틀비’였다.

변호사는 필경사 군단에 흔하지 않은 침착한 외모를 가진 바틀비가 내심 맘이 들었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과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독의 느낌이랄까. 하여튼 고용주 입장에서 침착한 외모와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가 반가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른 필경사와 달리 바틀비가 변호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더욱이 바틀비는 엄청난 양의 문서를 필사했다.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일했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이런 태도를 내심 반가워하면서 원본과 사본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돈이 지급되지는 않는)을 부탁할 참이었다. 그는 바틀비가 ‘즉각적으로’ 자동인형처럼 일어나 변호사의 요구에 응할 거라고 기대했다.

이 기대가 ‘사건’으로 점화될 줄은 정말 몰랐다. 변호사의 짐작과는 달리 바틀비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I prefer not to be)”라고 답한다. 이 말을 하는 데에 따르는 심리적 동요나 불안 혹은 불손의 빛도 전혀 없이 하얗게 야윈 얼굴로 태연하고 평온하게 ‘그렇게 안 하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변호사는 약간 당황했고 조금 많이 놀랐지만 사태를 ‘사건’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빨리 수습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종전과 같은 일을 요구했다. 또 혹시 모를 답변에 대비해 ‘일반적인 관례와 상식’이라는 점을 덧붙였고, 필사에 따르는 마땅한 일이라는 점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바틀비는 변호사의 요구에 대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사본 검토 작업이 아닌, 간단한 심부름을 요구해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그렇게 안 하고 싶다’는 대답만 반복한다.

평생 안전한 길만 택해 왔던 변호사에게 바틀비의 ‘수동적 저항’은 일상적인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더욱이 바로 자신이 그 저항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참아내기 어려웠다.

이 굴욕감을 양심에 어긋남 없이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어느 일요일 아침, 변호사는 잠깐 사무실에 들르게 된다. 그런데 사무실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안에서 잠근 것인데 바로 그때 바틀비가 문을 열며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으므로 당장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침착하게 말한다.

주객이 전도된 것도 놀랍지만 이곳에 지속적으로 바틀비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어쩌면 바틀비는 거주할 곳이 없는 비참한 삶에 처한 외로운 자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번뜩 들면서 변호사는 종전까지 느껴 오던 모멸감 대신 동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원래 주려던 임금에 20달러를 더 얹어주어서 내보내야겠다고 맘먹게 된다.

이렇게 결심한 후 변호사는 마지막으로 ‘합리적으로’ 돼줄 수는 없는지, 그리고 관례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바틀비의 대답은 “현재로선 합리적으로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바틀비의 ‘하고 싶지 않다’, ‘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이 애매한 말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변호사가 결국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사무실을 옮기는 것, 바틀비를 그 자리에 남기는 일이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변호사는 이사 간 후 드디어 바틀비에게서 해방됐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예전 사무실의 건물주가 나타나서 바틀비가 건물에 출몰하니 책임지라고 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틀비는 ‘부랑자’라는 이름으로 구치소에 가게 됐고, 결국 그곳에서 먹을 것을 거부한 채로 죽게 된다.

월가에서 바틀비는 한동안 인구에 회자됐다. 변호사를 비롯한 월가의 사람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해석할 수 없었다. 각종 경우의 수를 가정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는 해석될 수 없는 존재였기에 판단될 수도 없었다.

‘법’으로, ‘합리’로 불리는 관례적 세계 속에서 바틀비는 어떤 의지나 욕망을 가져서가 아니라 실은 ‘관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저 잠재돼 있는 지향뿐으로 말해지는 바틀비, 그가 제일 처음 일한 직장이었다고 전해진 ‘배달 불능의 편지(a dead letter)’ 집결소는 그의 존재론적 특성을 에둘러 드러내는 상징일 터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틀비가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 자주 불리고 있다. ‘터키’나 ‘니퍼즈’처럼 살아가는 무수한 이들에게 바틀비는 전달돼야 하는 최초의 문자일지도 모른다. 또는 바틀비가 반복해서 했던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라는 말은 피로사회 속에서 말해져야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짐작대로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