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 펜화 작가

펜은 강했다. 사라져 가는 건축물들을 부활시키는 김영택 작가의 펜은 더욱 강했다. 어림잡아도 최소한 50만 번의 섬세한 펜 놀림 끝에 재현되는 이 기록과도 같은 그림 앞에서,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군가는 역사를 되짚고, 또 누군가는 희미한 기억 혹은 추억을 불러낸다.
[Artist] 역사의 기록 그 이상, 기억을 소환하다
언뜻 보면 흑백 사진 같은, 사람 손에서 탄생했다고는 믿기 힘든 펜화 하나가 있다. 어느덧 눈앞에서는 상상이 시작된다. 하얀 백지 위에 손 하나가 스윽 나타나더니 섬세한 작업 끝에 건축물 하나가 들어선다. 빛바랜 기억 속 한 장면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생생한 광경 탓일까. 흑백의 건축물에 색을 입히고, 햇살과 바람, 소리와 냄새,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더해지며 완전한 생명체로 탄생한다. 숭례문에서 로마의 콜로세움까지 보이는 것 그대로가 아닌, 그 이면의 시간과 역사와 이야기까지 들려주고 있는 김영택 작가의 펜화는 그렇듯 무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했다.

펜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 20여 년. 사진이 없던 시절, 기록의 역할을 하기 위해 활용되던 펜화가 아닌, 어엿한 미술 장르로서 펜화를 리바이벌해 낸 김 작가는 서구에서도 맥이 끊긴 펜화의 전통을 한국적 미감으로 부활시킨 명인이다. 그의 작품들이 더욱 특별한 까닭은 사라져 버린 과거의 기억, 심하게는 정확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문화재와 건축물들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원해 낸다는 것. 그가 작품 하나를 완성해 내기까지의 과정에는 한 획 한 획 그어 나가는 펜 끝의 힘뿐만 아니라 역사 공부와 건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작가적 상상력까지 총동원되는 셈이다. 1년에 고작 몇 작품 남기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역사적 고증과 작가의 상상력, 건축물에 숨결을 불어넣다
김 작가를 만난 곳은 병원이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내 갤러리인 아트 스페이스에서 전시 중인 그의 ‘펜화 기행’은 병원이라는 공간과 만나 다른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치유니 힐링이니 하는 목적성을 띠고 부러 병원 전시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질병에 몸이 갇혀 버린 환자들에게 분명 숨통 트이는 그림일 터였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자 우리나라의 최초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 탄생 130주년을 맞아 그 시절 제중원을 펜화로 복원해 낸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번엔 제중원을 복원하셨더군요.
“전시 장소도 그렇고 탄생 130주년이라는 시기도 그렇고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특히나 사진으로조차 흐릿해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제중원이 여러 자료 조사 끝에 잘 복원돼 나와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복원된 그림은 죽어 나온 경우가 많은데 비교적 살아 있는 느낌이랄까요. 복원된 그림은 닥터 알렌이 유리문으로 바꾸기 전의 구조로 그렸는데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한 결과물입니다. 제중원 앞 백송은 지금도 헌법재판소 앞에 가면 실체가 있습니다만, 나무의 위치며 뒤로 보이는 북악산까지 상상을 통해 연출했습니다.”


복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감히 제 작품은 역사적 증거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광화문 그림이라고 해도 지금은 볼 수 없어진 광화문을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경복궁의 서쪽 망루인 서십자각 같은 경우는 사진도 흐릿한데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복원화를 그렸으니까요. 제가 서울의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자하문))을 다 복원했는데 그걸 가지고 문화재청에서 ‘옛 도성의 문류’라고 캘린더를 만들기도 했어요.”
‘금강산 보덕암’, Indian Ink on Paper, 43×60cm, 2007년
‘금강산 보덕암’, Indian Ink on Paper, 43×60cm, 2007년
펜화라는 게 낯선 장르입니다.
“기록 펜화가 세계적으로 많이 사라지고 있어요. 카메라가 나오면서 그렇게 됐죠. 그 덕분에 빠르고 값도 싸게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됐잖아요. 처음에는 사진을 찍은 뒤 그걸 보고 펜화를 그렸어요. 재판이 안 됐기 때문이죠. 당시 펜화는 정말 정확했어요. 이전까지는 말로 듣고 그리거나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었는데, 눈앞의 사진을 보고 그리니 정확할 수밖에요. 그러다 사진 재판이 가능해지면서 기록화 작업이 없어진 겁니다. 제가 펜화를 리바이벌한 드문 작가죠. 막상 해 보니 펜화와 사진은 아예 차원이 다른 작업이에요.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제 그림이 상설 전시돼 있는데, 만일 사진이라면 걸 수 있었을까요.”


사실적 묘사, 그것도 건축물을 묘사하는 작업은 여느 미술 작업과는 많이 다를 텐데요.
“제가 그쪽으론 감각이 타고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묘사를 참 잘했는데, 어느 정돈가 하면 중학교 1학년 입학해 펜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었을 정돕니다. 쓰려고 한 게 아니라 일종의 실험이었어요. 가만 살펴보니 펜으로 똑같이 그릴 수 있겠더라고요. 사이즈도 같게 해서 그린 뒤 동네 문방구에 가서 장난을 쳤죠. 물건을 사고 지폐를 냈더니 아저씨가 거스름돈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저씨, 잘 보세요’ 했더니 ‘똑같다’며 ‘잘 그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첫 묘사 작품이었는데, 아버지한테 들켜서 엄청 맞았어요.(웃음) 건축 설계도 중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배웠어요. 종이 위에다 우리 집을 지었다 헐었다 했죠. 공간 개념이 좋은지 복잡한 설계도를 봐도 한눈에 공간이 보여요. 그 덕분에 건축물을 그릴 때 공간 유추가 가능한 겁니다.”
‘프랑스 노르망디 몽생미셀’, Indian Ink on Paper, 41×58cm, 2012년
‘프랑스 노르망디 몽생미셀’, Indian Ink on Paper, 41×58cm, 2012년
대상이 건축이다 보니 작가적 색깔이 반영되기도 어렵지 않나요.
“저는 스스로 ‘무색무취하자’주의입니다. 오랜 건축물들은 자기 나름의 특성이 있어요. 저는 그걸 혼이라고 말하는데요.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함양에 농월정이라는 유명 정자가 있는데 불이 나 다 타 버린 겁니다. 복원도를 그리려고 전에 찍어둔 사진 슬라이드를 찾아보니 외관은 물론이고 현판이며 그 안에 적힌 시 구절까지 다 찍어 두었더군요. 저는 원래 건축물 안의 사진을 거의 안 찍는데,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농월정이 제게 그리 시킨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처럼 혼이 있는 건축물을 그리는데 제 손끝을 거쳐 ‘김영택화’된 건축물이 나오면 그 자체로 왜곡이 될 테니까요. 다만 ‘김영택 원근법’에 따라 ‘김영택류’로 재현된다는 게 제 색깔이라면 색깔일 겁니다.”


‘김영택 원근법’이 뭔가요.
“펜화를 그리면서 서양화의 원근법이나 사진이, 사람이 실제로 보는 시각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서양화의 원근법은 카메라와 같은데, 실제 우리 기억은 그것과 달라요. 다시 말해, 사람의 눈은 보고자 하는 것의 중심 부분만 상세하게 보이고 주변부는 흐릿하게 보입니다. 눈의 망막 중심 작은 부분에 고해상 망막세포가 있고, 주변엔 저해상 망막세포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이미지는 1장의 이미지가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보고 둘러보고 난 뒤에야 전체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시각적 특성에 맞춰 만든 원근법이 바로 김영택 원근법이고, 이 원근법에 따라 나름대로 포인트를 줘서 그린 그림은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 같은 감흥을 주는 겁니다.”


그래픽디자이너로 정상의 위치 버리고 택한 두 번째 삶
지금은 펜화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이지만, 펜화 작가로 ‘전향’한 후 10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견뎌야 했다.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가장으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없던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시행착오도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견디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명예를 향한 의지이자 욕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작가는 펜화 작가로 살기 이전 이미 디자인업계에서 정상의 위치를 다지며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추대를 받고 있었다. 홍익대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광고 회사에 취직, 그래픽디자이너로 출발한 그는 1993년 국제상표센터가 전 세계 그래픽지자이너 중 탁월한 업적을 쌓은 톱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한 ‘디자인 앰배서더’에 국내 최초로 뽑히는 등 그야말로 톱클래스의 길을 걸었다. 해표, 삼천리그룹의 심볼 등이 그의 대표작. 당시 어마어마한 돈을 벌며 부족함이 없던 그가, 그것도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둔 시점에 전혀 다른 길을 택했으니, 주변의 반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제중원 복원도’, Indian Ink on Paper, 41×58cm, 2015년
‘제중원 복원도’, Indian Ink on Paper, 41×58cm, 2015년
안정된 길을 버리고 펜화를 택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욕심이 좀 큽니다. 그래픽디자이너로 살면서 정상이 되고 싶었고 그 꿈을 이뤘지요. 디자인 앰배서더에 선정된 후 유럽에서 열린 행사에 초청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펜화를 보았습니다. 그전에도 펜화를 접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 당시 파리 시내나 루브르 박물관 지하 아트 숍에서 판매하는 펜화 복제품 등을 보면서 ‘이거다’ 싶었어요. 저는 출발이 상업 디자이너라 그런지 뭔가를 보면 마케팅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펜화를 본 후 마케팅적으로 될 것 같다고 꽂힌 거죠.”


그래도 망설임이 전혀 없진 않았을 텐데요.
“당시 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투자를 잘못 해 부도가 났었어요. 그러고 나니 대우가 달라지는 겁니다. 디자인 회사로 매출이 국내 3위 안에 들었을 정도인데, 사람들은 제 실력이 부도난 것처럼 대하더군요. 씁쓸한 기분이 들면서 유감없이 업계를 떠날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늘이 내린 기회였던 거죠. 낯선 길이었지만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처음엔 고생 좀 하셨다면서요.
“가족들 반대에 많이 부딪쳤죠. 한 달 수입이 100만 원 정도에 불과해 생활이 어려웠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처음에 사진을 보고 그리다 보니 평면이 돼서 8~9년을 배낭 하나 짊어지고 전국을 떠돌았어요. 돈이 없으니 숙식은 대개 절에서 해결했고요. 펜화가 전혀 알려지지 않던 시기라 마케팅도 셀프로 했어요. 펜화로 캘린더를 만들어 언론사에 보냈고, 2000년 즈음 한 언론사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되면서 조금씩 신세가 나아지기 시작했죠.”
‘숭례문(1900년대)’, Indian Ink on Paper, 36×47cm, 2007년
‘숭례문(1900년대)’, Indian Ink on Paper, 36×47cm, 2007년
2004년 첫 전시 때부터 솔드 아웃 됐다면서요.
“2004년 6월 학고재에서 첫 전시를 할 때 한 점도 팔기 힘들 거라고들 예측했었어요. 그런데 솔드 아웃이 됐고, 심지어 1권에 6000원이던 도록도 볼륨을 두껍게 해 1만 원에 팔았는데 줄을 설 정도였어요. 당시 제 작품을 처음 산 분이 배우 고두심 씨였어요. 4주간 전시를 하면서 사전 오픈을 했는데, 신문에서 기사를 보고 첫날 고두심 씨가 전시장에 온 거였죠. 지금도 기억하는 게 그날 장대 같은 비가 왔는데, 이상하게 전시장에 나가 보고 싶더라고요. 일주문을 그린 작품을 고두심 씨가 400만 원에 사 갔고 그렇게 제 작품의 첫 컬렉터가 됐죠. 2년 뒤 전시에서는 작사가 양인자 씨가 또 제 작품의 컬렉터가 됐고요.”


이름값이 달라지면서 작품 가격도 많이 올랐겠네요.
“지금은 호당 200만 원 정도에 팔리는데,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 작품 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1년에 고작 열 몇 작품밖에 못 하거든요. 아마 대기업 부장 연봉도 안 될 겁니다. 작업이 힘들지만 제가 건강도 체력도 그걸 감당할 정도가 되니 다행이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오래오래 작업해서 작품을 좀 많이 남기는 게 제 목표입니다. 처음 펜화를 시작할 때의 목표처럼 해외 진출의 기회도 꾸준히 보고 있고요.”


박진영 컨트리뷰팅 에디터 |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