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문배주’ 맥 잇는 기능보유자 이기춘-전수자 이승용 부자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86호로 지정된 문배주는 북한의 평양을 본거지로 한 전통 증류주다. 150년, 5대를 거치는 동안 롤러코스터와 같은 역사의 파고를 타고 흐르며 진하고 향기로워진 술. 남한에서 문배주를 꽃피운 4대 이기춘(72) 명인과 문배주의 대중화와 세계화의 첨병이 될 5대 전수자 이승용(41) 씨를 만났다.
문배주는 문배의 꽃과 과실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조와 수수를 주 원료로 만들어진다. 이기춘·이승용 부자가 김포 양조장의 수수밭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배주는 문배의 꽃과 과실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조와 수수를 주 원료로 만들어진다. 이기춘·이승용 부자가 김포 양조장의 수수밭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1월 11일 경기도 김포시 서암리에 위치한 문배주 양조장. 술 익는 냄새가 공기에 실려와 코끝에 가득 퍼졌다. 밀로 빚은 누룩에 좁쌀과 수수를 이용해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쳐, 맑게 증류된 문배주가 6개월 이상 숙성돼 보드라운 향내를 내고 있었다.

문배주는 예로부터 향기롭기로 유명한 문배(토종 돌배종)의 꽃과 과실향이 난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술에 배는 눈곱만큼도 들어가지 않는다. 문배주는 오로지 조와 수수만으로 배합하고 적정 온도에서 발효해야 향긋한 문배 특유의 맛과 향이 난다. 과거, 문배주의 용수였던 평양 주암산 샘물은 지금 석회암 물인 김포 서암리 지하수로 대체돼 쓰이고 있다. 석회암층에서 솟아나는 지하 암반수는 강한 산성을 띠는데, 이러한 물의 성질이 문배술에서 우러나오는 톡 쏘는 듯 강한 느낌의 문배 향을 만들어낸다는 게 이기춘 명인의 설명이다.


평양 제일의 술에서 나락으로,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우뚝’
문배주는 고려 때 태조 왕건에게 진상되던 술이었다. 왕가에서 민간으로 알음알음 전해지던 문배술 제조법을 복원한 건 이 명인의 증조모인 박 씨 할머니였다. 손재주가 있었던 박 할머니는 술 빚는 솜씨가 뛰어났고, 문배주의 사업성을 엿본 증조부가 양조장을 차렸다. 그 뒤를 2대 이병일 선생, 3대 이경찬 선생이 이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4대 기능보유자인 이기춘 선생이 문배주의 저변을 확대했다.
새로워진 문배주. 이승용 씨는 패키지도 도자기에서 병으로 바꾸고 도수도 다양화했다.
새로워진 문배주. 이승용 씨는 패키지도 도자기에서 병으로 바꾸고 도수도 다양화했다.
1940년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평천 양조장에서 만들어지던 문배주의 명성은 엄청났다. 이북 전역은 물론 외국에도 판로를 개척해 문배주를 실은 트럭들이 중국과 러시아를 오갔다. 그 덕분에 양조장집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 명인은 어린 시절 평양의 재벌가에서 자랐다.

“문배주 사업이 무척이나 잘 됐어요. 평천 양조장이 내는 세금이 당시 평양시 1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으니까요. 지하실에는 늘 현금이 가득가득 차 있었고, 아버지께서 공장 내에 인민학교를 지어 저는 거기에 다녔지요. 늘 경호원 두어 사람이 제 곁에 붙어 꼼짝 못하게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 2세인 셈이지요.(웃음)”(이기춘)

영원할 것만 같았던 호시절은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산산조각 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1951년 1·4후퇴 때 식솔을 트럭 20대에 태우고 남쪽으로 왔다.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왔다. 서울 하월곡동에 정착해 1952년부터 문배주를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195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에 의해 곡식으로 술을 제조하는 것이 전면 금지됐다.

“정부에서는 곡식이 부족하니 더 이상 술의 원료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틸알코올을 물에 탄 희석식 소주를 만들라고 했지요. 하지만 할아버님과 아버님 자존심에 ‘세상 금덩이를 다 줘도 어떻게 사람 먹을 것에 에틸알코올을 타느냐’며 ‘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삿날이 되면 깨끗한 술을 상에 올리기 위해 부엌에서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만 문배주를 만들곤 했죠. 부러지되 굽히지 않았던 선조들의 그 정신을 그땐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이기춘)

술을 빚지 못하자 가계는 급속도로 기울었다. 평양에서 제일가던 평천 양조장 거부(巨富)는 온 데 간 데 없고 가족의 생계마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명인은 1972년에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17년간 기획조정실 등에서 일하며 대한항공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을 모셨다. 한번은 화물터미널에서 ‘칼(KAL)’ 유니폼을 입고 일하고 있는데, 예전 평천 양조장에 함께 있었던 공장장을 만났다.

“노인이 된 공장장이 ‘(형편이) 왜 이렇게 됐느냐’면서 날 붙잡고 목 놓아 우는데, 기분이 묘하더이다. 인생이라는 게 참으로 허망하고 부질없게 느껴졌죠. 그 많던 재산도 고래등같은 집도 없어졌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늘 문배주를 다시 만들겠다는 일념이 있었습니다.”(이기춘)

그렇게 직장인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중 양곡관리법이 풀렸다. 오랫동안 금지돼왔던 곡주 제조 및 판매가 전두환 정권 때 부활하면서 문배주는 오랜 역사를 인정받아 국가 관리 아래 우리 전통술로 지정됐다. 1986년 아버지 이경찬 명인이 중요무형문화재 문배주 제조기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이기춘 명인은 아들 이승용 씨와 후계자로 지정됐다.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퇴근한 뒤 밤을 새어가며 술을 빚곤 했다. 점심도 굶고 사무실에서 당시 연희동에 위치한 양조장으로 달려갈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다시 술을 빚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참으로 묘했습니다. 30년 만에 양조장을 열 수 있게 되니 그렇게 술 빚는 일이 신날 수가 없는 겁니다. 돈 버는 것을 떠나 온 마음을 다해 문배주를 담그기 시작했지요.”(이기춘)

1990년 7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총리회담은 문배주의 부활을 알린 신호탄이 됐다. 당시 강영훈 국무총리와 연형묵 북한 총리 간 회담에서 연 북한 총리가 다른 술을 제쳐두고 문배주를 마신 것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면서 자연스럽게 홍보 아닌 홍보가 됐다. 백화점, 호텔 등 유통업계에서는 연희동 양조장으로 찾아와 제품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문배주 기능보유자 이기춘 명인과 이승용 전수자가 조와 수수로 문배주를 빚는 모습.
문배주 기능보유자 이기춘 명인과 이승용 전수자가 조와 수수로 문배주를 빚는 모습.
연이어 1991년 한·소련 정상회담 만찬,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 방문 기념파티에서 문배주가 건배주와 만찬주로 오르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문배주를 나눠 마시면서 국주(國酒)로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며 가지고 간 문배주를 맛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원래 문배주는 평양 대동강 일대의 주암산 물로 만들어야 진짜배기”라고 말했다. 이 만찬장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문배주는 남북의 화합을 상징하는 술로도 자리매김했다. 이 명인은 “문배주를 다시 평양 샘물로 제대로 한 번 빚어보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며 “주암산 물로 빚는 문배주는 그 자체로 남북한 합작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젊어진 문배주…배곯을지언정 술에 물 타지 않는 정신 계승
문배주는 요즘 한층 트렌디해졌다는 평을 받는다. 5대 전수자인 아들 이승용 씨가 젊은 감각으로 150년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이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때까지 가문에서 문배주 제조법을 전수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문배주 전수자로서의 삶이 결정돼 있었으니 인생이 고루하게 여겨지진 않았을까.

그는 “사춘기 때는 평생 전통주를 빚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게도 느껴졌지만 아버지, 할아버지가 문배주를 대하는 열정과 자부심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했다.

“(법 때문에) 술을 담그지 못할 때 주변의 유혹이 많았습니다. ‘복분자를 담가라’, ‘물에 에틸알코올을 타서 팔아라’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림 없는 두 분의 모습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인상 깊었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돈에 가치관을 팔아서는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게 됐으니까요.”(이승용)

2003년 문배주 양조장에 입사한 이 씨는 전통주인 문배주를 더욱 현대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도자기 속에 들어 있던 ‘딱딱한’ 전통주를 유리병으로 바꾸고, 상품 라벨도 한자가 아닌 영문을 선택했다. 술 양도 200㎖로 줄였다. 전통주는 도수가 높아 한 병을 다 마시기가 힘들기 때문에 한 잔씩 맛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먹는 방법도 언더록, 칵테일 등으로 다양화했다. 문배주는 본래 알코올 도수를 40도에 맞춘 술이지만 20도, 30도 등으로 도수를 낮춰 젊은 층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개조하고 있다. 지난 12월 유리병 패키지로 바꾼 후 매출이 15%가량 올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난 9월에는 신라호텔에서 문배주 갈라 디너를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홍대, 강남 등의 바에서도 판매해 젊은 층에게 문배주를 알려나가겠다는 전략이다. 이 씨는 “우리 전통주 시장이 점차 확대되고 있고 일본, 중국, 홍콩 등 해외에서도 문배주의 반응이 좋아 향후 전망이 밝다”며 “현재 연간 60억 원의 매출을 향후 5년간 100억 원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문배주의 전통을 오래도록 이어가기 위해서는 질 좋은 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술을 접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문배주를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배주와 조화를 이루는 음식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이승용)

다부진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이승용 씨를 아버지 이기춘 명인이 옆에서 지긋한 눈길로 바라본다. “나는 평생 술만 만들 줄 알았지, 사업은 잘 몰라. 얘가 증조할아버지를 닮아 수완이 좋아요. 러시아 하면 보드카, 일본 하면 사케, 프랑스 하면 코냑 하는 것처럼 문배주가 언젠가 한국의 국주가 될 거예요. 두고 보세요.”(이기춘)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