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은 나의 실제적 시선과 상관없이 항상 타인의 반응을 스캔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은 ‘타인의 마음에 있는 나의 이미지’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유혹의 상호작용 안에서 산다.
[HEALING MESSAGE] 유혹, 하실래요? 존재감을 느끼는 인간의 기본 반응
한 여배우가 나에게 이야기했던 ‘여배우의 정의’가 자극적이다. “여배우는 세상 모든 남자가 자신과 자고 싶어 해야 한다. 그 눈빛을 싫어한다면 여배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눈빛이 희미해져도 여배우의 존재감은 사라지게 된다.”

유혹은 여배우만의 일은 아닌가 보다. 최근 병원으로부터 ‘고객을 사로잡는 유혹의 기술’이란 주제로 강의 요청을 받았다. ‘유혹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라 거절하고 싶었으나 월급 받고 있는 곳의 요청이라 그 유혹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 덕분에 고객과 유혹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고객을 사로잡는 유혹’이라니 ‘유혹받는 대상’을 고객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혹은 일방적인 흐름이 아닌 쌍방의 상호작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고객은 유혹의 대상이 아닌 주체는 아닌지.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고객 민원이라는 것이 상대방을 유혹하지 못한 좌절감의 표현은 아닐까.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주변을 유혹한다

글로벌 컨설팅회사에 다니는 30대 후반의 여성, 스트레스 설문지 점수가 높아 우선 전화 상담을 했다. 그런데 필자의 실수로 30분 늦게 전화를 했다. 업무 특성상 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리라 생각했다. “통화 가능하세요? 제 실수로 전화를 늦게 드렸네요”라고 하니 “아, 괜찮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얼마 못 하겠네요”라고 반응한다. 세련된 반응이긴 하나 화가 난 것이다. 미안해서 만회하고자 열심히 연속해서 질문을 했다. “수면의 질이 나빠지지 않았나요. 기억력이 떨어지지 않았나요. 그리고 표현은 안 해도 속에서 욱하고 짜증나는 것이 많아지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에 “네, 네, 네, 선생님 무슨 점쟁이 같으세요. 어떻게 다 아세요. 잠이 들어도 자꾸 깨고 기억력은 정말 엉망이에요. 그리고 짜증은 가정에서는 안 내지만 제가 고객인 상황에서 콜센터 직원이나 백화점 직원들한테 정말 미친 여자처럼 화낼 때가 있어요. 제가 제 모습에 깜짝 놀라요. 그렇게 화낼 이유도 사실 없었거든요”라고 답한다.

이럴 때는 ‘고객은 왕’이라는 서비스 구호의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왕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기의 자존감을 있는 힘껏 낮추어야 하는 신하들도 감성 노동으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황이고, 왕들도 ‘진짜 마음은 주지 않는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라며 기계적 친절은 싫다고 불평한다. 인간이 기계로 낮추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진심이 없어 싫다니, 진심의 서비스를 원하는 왕도 기계로 스스로를 낮춘 신하도 다 마음이 망가져 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주변을 유혹하며 살아간다. 생존의 목적이 유혹이 아닌가 싶다. 유혹을 심리적으로 정의하면 사회적 참조, 즉 소셜 리퍼런싱(social referencing)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 마음에 비추어진 나’를 통해 내 모습을 느끼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감성적 통증이 정체성이 흔들릴 때 느끼는 불안감이다. 그 불안감이 극단적으로 갈 때 자해, 자살 같은 문제 행동을 야기한다. 스스로 상해를 하는 그 느낌에서나마 자신의 가치를 느끼려는 것이다.

유혹은 내 존재를 느끼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사실은 고객도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원과 고객 이탈은 고객이 우리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앞에서 사례로 든 여성은 업무 스트레스로 소진된 자신의 감성을 위로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서비스 직원들에게 화를 낸 것은 사실 ‘나 매력 없어? 제발 나 좀 사랑해 줘’라는 감성의 절규다.

‘열심히 일하고 인내하면서 성취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우리 머릿속 프레임 안의 단단한 알고리즘은 반쪽자리 진실이다. 성취의 콘텐트와 그 성취를 즐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조금 가졌어도 더 그것을 향유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대표적 성과물인 돈과 사회적 지위가 오히려 행복을 방해하기 일쑤다. 유혹을 자꾸 돈과 힘으로만 하려 하기 때문이다. 파워를 이용한 유혹은 상대방을 기계로 만들 수밖에 없다. ‘돈으로 여자의 웃음을 사는 것도 이젠 싫다’라고 말한 잘나가는 40대 중반 기업가의 상담 내용이 서글프다. 돈을 위해 웃음을 지어주는 그녀들도 안타깝고 더 이상 그 웃음에 반응하지 못하는 그 남자의 감성도 안타깝다. 열심히 일하고 성취했는데 그 돈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유혹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60세 넘어서의 삶을 덤으로 사는 삶이라 생각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언제 죽는지를 모른다. 그러다 보니 젊었을 때는 죽지 않는 것처럼 겁 없이 살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삶의 본질에 더 집중하게 된다. ‘내가 정말 근사하고 사랑받고 있는 존재이며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휩싸이게 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엄청난 불안감에 싸이게 된다.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건강 염려에 빠지게 된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면 더 돈에 집착하게 된다. 내 마음의 부족이 내가 힘이 없어서인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스스로를 욕심쟁이 늙은이로 만들게 된다. 사기꾼은 주변에 늘어나지만 정말 마음 주는 이는 주변에 없다. 구두쇠는 상대방을 유혹할 수 없다.

필자에게 자본주의를 정의하라면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표현할 수는 있다’이다. 열심히 일해서 성취하는 것, 자본주의에선 ‘절대 선’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행복은 내가 타인의 마음에 아름답게 비추어질 때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글·사진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