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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ionary Pagoda, 2012년, Archival Pigment Print, 240×300cm
Illusionary Pagoda, 2012년, Archival Pigment Print, 240×300cm
우리가 사진을 통해 보는 세상은 실제일까, 가상일까. 사진은 그 어떤 매개체보다 현실적이지만 누군가의 의도하에 프레임 안에 담겨진 실체는 100% 현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가상이 개입된 현실이라고나 할까. 현실도 가상이 되고, 가상도 가상이 되는 이 흥미로운 작업이 한성필 작가의 손끝에선 더 다채롭게 펼쳐진다.

사진이 하나의 프레임이라면 ‘파사드’는 프레임 안의 또 다른 프레임이다. ‘파사드(facade)’란 건물의 외측 전경 특히 정면, 구조체의 표면, 건물의 외벽 처리 혹은 정면도를 이르는 말로 한성필 작가의 최근 몇 년간 작업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다. 파사드 프로젝트의 기본적 매체는 사진이지만, 때론 영상이 되기도 하고 때론 설치 작업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 ‘폭넓은 확장’은 지난 2011년 개인전 이후 한 작가가 발전시켜온 부분. 올 4월 7일 아라리오갤러리 청담에서 막을 내린 개인전에서는 국내 문화재의 설치 작업으로 폭을 넓힌 파사드 프로젝트는 물론, 재개발 현장에서 개인과 가정의 기억과 시간을 포착해 내가는 기억과 흔적, 그리고 세계 최초의 4K 초고해상도(UHD) 영상을 구현한 신작 영상 작업 등 내용은 물론 기술적 부분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를 선보였다.
Fly High into the Blue Sky, 2012년, Chromogenic Print, 179×220cm
Fly High into the Blue Sky, 2012년, Chromogenic Print, 179×220cm
지난 전시는 ‘환영, 그리고 기억과 흔적을 담은 공간의 의미’라는 주제만으로 명확하게 설명이 되는데, 이는 한 작가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실제와 가상’, ‘원본과 복제’, ‘지구 온난화에 따른 환경 문제’, ‘역사의 지식과 도상의 오류’, ‘집단 무의식과 아이러니’ 등과 같은 의식의 연장선에 다름 아니다. 프레임 안에 담기는 피사체를 끊임없이 다른 시선과 섬세한 감성, 독특한 해석으로 풀어내는 한 작가의 감각은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이 왜 그를 주목해야 할 작가로 손꼽는지도 자연 설명된다.

현실에 개입된 가상, 그 안에 녹아 있는 기억

한 작가와의 첫 대면. 생각보다, 물리적 나이보다 ‘심하게’ 어려보이는 외모에 놀랐다. 그게 정체되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지속하는 힘일 수도 있을 터. 한편으론 파사드 프로젝트에서 등장하는 ‘가림막’의 개념이 떠올랐다. 보수공사 현장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하는 또 다른 이미지인 ‘가림막’은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매개체인 동시에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보고 있는 한 작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실제이고 현실이지만, 외모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한편으로 허구이고 가상일 수 있으니까. 깨닫는 순간 미묘한 희열이 느껴진다.



전시의 주제였던 ‘환영, 그리고 기억과 흔적을 담은 공간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가림막은 가상의 이미지잖아요. 우리가 보는 현실은 3차원적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고, 가림막은 공사장이라는 현실 자체에 하나의 환영이 들어오는 거죠. 결국 제가 다루는 건 현실이지만 현실에 개입된 가림막이나 일루전(illusion·가상)을 실제 사진으로 담았을 때는 가상도 가상이 되고 현실도 가상이 되는 겁니다. 그 가상에 녹아있는 기억이라는 의미도 있고요. 많은 분들이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현실적이다’라고 하지만 사실 제가 생각하는 사진은 가장 현실과 유사하면서 조각과도 비슷하고 다양성이 있어요.”

2년 만의 전시였는데요. 지난번 전시의 연장선이라곤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 작품 하면 가림막을 먼저 떠올리는데요, 지난 전시에는 주로 유럽 쪽에서 작업을 했다면 이번엔 한국에서 몇 년간 작업하며 한국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려고 했어요. 일례로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면서 우연히 감은사지석탑을 봤는데 절터만 있고 탑이 두 개 있는데 그 형태가 독특하더라고요. 직접 안 가본 분들은 탑이 하나라고 짐작해서 제 작품을 보고도 합성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누군가 문화유산을 찾아갔을 때 흰 천으로 싸여 있으면 아쉽잖아요. 물론 모든 게 영원할 수 없듯 보수도 복원도 필요하고 가림막으로 꼭 싸야 하지만 거기다 재미까지 줄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겁니다.”
이중 배열, 남한산성(Tandem Sequence, Namhansan Fortress), 2011년, Archival Pigment Print on Korean Paper, 180×241cm
이중 배열, 남한산성(Tandem Sequence, Namhansan Fortress), 2011년, Archival Pigment Print on Korean Paper, 180×241cm
국내 작업은 먼저 직접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생소한데 반응이 어땠나요.

“제가 처음 한국에 와서 작업한 게 건축 전문지 스페이스(SPACE) 통권 500호를 기념한 공간 사옥 래핑 작업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공간 사옥 하면 벽돌과 담쟁이만 떠올리는데, 저는 한국의 현대 건축물 중 역사적이고 의미 있는 공간이라 내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디어를 전달했더니 공간 쪽에서 좋아했고, 한 달간 내부 사진을 담은 가림막 설치 작업을 했죠. 새로운 시도였고 반응도 좋았어요. 어떤 분들은 전화로 ‘왜 벽을 부쉈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해요.(웃음) 그렇게 공간 사옥 작업을 하고 나니 많은 분들이 믿어줬어요. 남한산성 복원 작업을 할 때도 제가 경기도 쪽에 제안했는데 흥미로워해 진행이 가능했죠.”

설치 작업까지 직접 하다 보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공간을 생각하고 이미지를 만들고 가림막 래핑까지 하는 과정이 더 재밌어요. 요즘 또 관심 있는 건 실제 환경에 가상의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인데 작년에 랜드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몽골 고비사막에 제가 직접 체험했던 인도네시아의 이미지를 설치 작업하거나, 유럽 최대의 석탄광산이 있는 북극에서 설치 작업을 하는 것 등이죠. 고비사막 작업 결과물은 올 6월 5일 환경의 날 네이버 로고 아트 프로젝트로 공개될 겁니다.”
No more plastic Surgery, 2012년, Archival Pigment Print, 84×130cm
No more plastic Surgery, 2012년, Archival Pigment Print, 84×130cm
물리적으로 힘들진 않나요.

“다행히 지난해 몽고에서는 현지인들이 땅을 파고 하는 작업 등에 도움을 줬지만 어쩔 땐 혼자 설치 작업을 하다 보면 솔직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제가 실험을 즐기는 것 같아요. 제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한 방법들 말이죠. 저를 비롯해 주변의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말라가면서까지 작업을 하는 건 그걸 즐기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에 대한 보람 때문이죠.”
낙석주의!(Danger! Falling Rocks), 2012년, Chromogenic Print, 100×131cm
낙석주의!(Danger! Falling Rocks), 2012년, Chromogenic Print, 100×131cm
지난 전시의 한 파트였던 재개발 현장을 담은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이슈 차원에서 다룬 건 아니었지만 전시를 보러 왔던 분들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기는 했어요. 그런데 제 개인적 입장에서는 관심 분야인 ‘공간’의 하나로 재개발 현장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가림막이 미래의 투사(投射)라면, 재개발 현장은 기억이고 흔적이죠. 재개발 프로젝트를 하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어요. 보통 집은 따뜻한 ‘홈(home)’의 개념인데 사람들이 떠나가고 형체만 남은 집은 ‘하우스(house)’에 불과하죠. 정신적인 것에서 물리적인 것으로,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으로 바뀌는 겁니다.”


매체의 경계 없이 ‘존재함의 증명’ 보여줄 것

한 작가의 초기 작품은 바다에 관한 작업이 많다. 그리고 그 배경엔 열다섯 살에 처음 봤던 대천 바다에 대한 기억이 깔려 있다. 언덕을 넘어 소나무 숲을 지나 보이는 광활하고 미스터리한 바다. 그 바다의 느낌을 사진으로 담아낸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개념이 아닌 매체, 즉 사진인지 회화인지에 대해 더 궁금해했다고 한다. 한 작가는 그 일로 인해 현대미술에 있어 미디어가 갖는 의미와 그 다양한 속성이 더욱 흥미로웠다. 가림막을 통해 실제와 가상이 혼재된 이미지를 사진이란 매체에 담아내게 된 것도 미디어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파사드, 그중에서도 가림막 등을 통한 실제와 가상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요.

“영국 런던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우연히 늘 앉던 2층 버스 맨 앞자리에서 복원에 들어간 세인트폴 대성당을 보게 됐어요. 당시 1700년대의 성당을 그린 가림막으로 래핑을 해놨는데 그 가상적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와 너무 어울리는 겁니다. 또 사람들도 가림막 자체를 재밌어 하며 사진을 찍고 하는 걸 보고 앞으로의 제 작업 방향에 대해 어렴풋이 떠올리게 된 거죠.”
La Grand Palace, 2012년, Chromogenic Print, 178×243cm
La Grand Palace, 2012년, Chromogenic Print, 178×243cm
촬영하는 시간대가 늘 일정하다고 들었어요.

“사실 그게 일 년간의 테스트를 거친 결과물이에요. 가림막으로 래핑된 건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해 여러 가지를 테스트했고 그중 하나가 시간대였죠. 그 결과 영어로는 매직 아워, 프랑스어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해 뜰 녘 혹은 해 질 녘의 낮과 밤이 혼재하는 시간대가 가장 효과적이었던 거예요. 진짜 빛과 가짜 빛인 인공조명이 경계 없이 뒤섞임으로써 실제 공간도 가상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이 가능해지는 거죠. 어떤 분들은 제 작품 속 하늘을 보고 포토숍인 줄 아는데 같은 시간대에 촬영하다 보니 그런 거예요.”

사진이라는 매체가 상당히 많이 보편화됐어요. 그게 사진이라는 미디어로 순수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에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3차원을 2차원으로 해석하는 과정이 사진인데, 많은 이들이 사진에 대해 알고 또 직접 다루기도 한다는 건 작가에게 장점이 더 많다고 봅니다. 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니까요. 반면 힘든 건 그만큼 작가 입장에서는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개념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죠.”

아직 사진이 순수예술로서 회화나 다른 예술에 비해 덜 인정받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솔직히 그 점은 많이 아쉽죠. 사실 작가 입장에서는 사진이냐 회화냐 영상이냐의 문제는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해줄 매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요. 다만 개인적으로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답답함은 너무 평면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체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어요. 지난 전시에 영상 작업을 선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시간을 다시 풀어 재해석하는 의미로서 영상, 혹은 설치, 아니면 경계 없이 다양한 매체가 섞이는 등 앞으로는 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게 될 것 같아요. 머릿속엔 있지만 아직은 실험해봐야 할 부분들도 많고요.”

주목해야 할 작가로 손꼽힙니다. 앞으로 지향점은 어디인가요.

“작업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고 전시는 대중과의 소통이에요. 앞으로 20~30년 동안 나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극복하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 그게 제겐 중요해요. 그걸 대중이 좋아하느냐 아니냐는 대중의 몫인 거고요. ‘사진이란 그저 존재했던 어떤 것의 흔적(index)일 뿐’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 그게 제 기준입니다.”


한성필 작가는…
1972년생.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 영국 킹스턴대 및 런던 디자인 뮤지엄 ‘큐레이팅 컨템퍼러리 디자인’ 석사 졸업. 1999년 첫 개인전 후 개인전 및 그룹전 다수. 최근 건물을 가림막으로 감싸고 기록하는 대규모 공공 미술로 새로이 주목받고 있으며, 2011년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 2013년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그의 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박진영 기자 bluepjy@kbizweek.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