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골퍼 겸 요리사 여민선

나이 마흔까지 써온 드라마가 파란만장해도 너무 파란만장하다. 열아홉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최연소 회원이 되며 한국 골프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여민선. 골프 꿈나무는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고 LPGA 투어 플레이어로 활동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런 그가 2년 전 20여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그의 현주소는 티칭 프로 겸 일식요리사 겸 대학 강사 겸 골프 칼럼니스트. 팍팍한 서울에서 ‘생활의 달인’이 된 여민선 씨의 칠전팔기 인생 개척 소사(小事)다.
[Wonderful Life] “나는야 삶을 리사이클링하는 생활의 달인”
쨍쨍한 햇살이 만만찮았던 오후. 근 7년 만의 재회에 분위기 좀 잡자 싶어 서울 강남 도산대로 인근 카페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5분여 늦었을까. 가쁜 숨을 내쉬며 카페 입구에 들어서자 손을 번쩍 드는 이가 있었다. 어떻게 변했을까 내심 기대했던 필자는 “참, 여전도 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요, 사람이 변하면 쓰나요.(웃음) 그나저나 저 잠실에서 여기까지 자전거 타고 온 바람에 땀 냄새 장난 아닌데, 괜찮으실까요?”

그러고 살펴보니 이 여자 벌건 대낮에 차림새가 조금은 민망하다. 근육질의 팔이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 티셔츠와 타이트한 팬츠, 쉽게 말해 사이클링 복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남들은 피하기 바쁜 여름 태양을 온몸으로 즐기며 자전거를 타고 왔으니 말해 무엇하랴. 사진 촬영은 그가 요리사로 일하는 와인 바에서 하기로 미루고 본격적인 폭풍 수다(?)가 시작됐다.



KLPGA 최연소 멤버로 각광받던 ‘골프 신동’

여민선 골퍼. 기자와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2005년 당시만 해도 그는 LPGA 투어 골퍼로 활동하고 있었다. ‘미니 여(Minny Yeo)’란 미국명으로 활동했던 그는(스윙이 기계처럼 정확하고 동일하다고 해서 ‘스윙머신’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5년간의 투어 동안 우승은 한 차례도 하지 못했다. 시작은 늘 선두그룹이었으나 뒷심이 따라주지 않았던 불운의(?) 골퍼라고나 할까.

최고 성적이 랭킹 20위였지만 그는 늘 전 세계에 백몇십 명 남짓 되는 LPGA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합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던 골퍼였다. 또 하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주종목인 골프 이외에도 걸출한 입담과 넘치는 에너지, 다양한 손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사실. 그랬던 그가 20년이나 산 미국과 그곳에서의 골프 라이프를 돌연 정리한 이유는 뭘까.

“2005년까지 LPGA 투어 멤버로 경기에 나간 게 5년, 그 이전에 주(州)마다 하는 미니 투어에서 2년간 뛰었으니 도합 7년 정도 시합을 하며 보냈어요. 골프가 좋았고 또 여행을 좋아했으니 힘들었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매 경기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고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예민해졌죠.

남편에게도 금전적인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었어요. 미국말로 하자면 정신적으로 번(burn)한 상태가 돼버린 거죠. 그래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뭘까 하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셨는데 2층밖에 안 되는 저희 집 계단을 너무 힘겹게 올라오시더라고요. 엄마가 어느새 노인이 돼 버리신 거죠. 생각해 보니 가족들과의 추억도 없고요. 순간 내가 무슨 부귀영달을 바라고 미국 땅에 이러고 있나 싶었죠.”
오하이오주에서 개최된 웬디스 챔피언십(Wendy’s Championship)에서 캐디와 코스 공략 중인 여민선 프로.
오하이오주에서 개최된 웬디스 챔피언십(Wendy’s Championship)에서 캐디와 코스 공략 중인 여민선 프로.
골프채를 처음 잡은 것이 아홉 살 때다. 영화사를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외국의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하셨고 4남매 모두에게 골프를 가르쳤다. 넷 중에 지금까지 골프를 ‘업(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그와 큰오빠인 여승도 프로. 그래도 끝까지 선수 생활을 고집했던 것은 여민선 프로 하나였다.

애초에 시작할 땐 너무 작고 마른 아이라 골프는 안 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안 된다’는 말은 도리어 오기를 불어넣었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하루에 1톤 컨테이너 하나 분량의 공을 치며 스윙을 익히고 또 익혔다. 그 결과 크고 작은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며 1989년 한국여자오픈 국제 골프주니어 대회에서 우승하며 선수로서의 화려한 방점을 찍었다. 열아홉의 나이에 최연소 KLPGA 투어 선수가 됐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골프 신동’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그가 미국 골프명문대인 PGCC(Professional Golfer Career College)로 유학을 떠났던 것 역시 수순. PGCC에서 남녀를 통틀어 최고의 선수(MVP)로 졸업한 후 그의 본격적인 무대는 미국이 됐다. 미니 여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는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티칭 프로로 일했다.

한 번 출전에 10만 달러가량의 비용이 드는 LPGA 경기는 시쳇말로 ‘보통 일’은 아니었다. 같은 PGCC 출신의 골퍼였던 남편은 아내의 외조를 위해 골프를 접고 생업을 위해 일했고, 그 역시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비행기 대신 야간에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서 이동하며 투어 일정을 소화했다. 미국은 그에게 애증(愛憎)의 땅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20년의 삶은 어느 날 문득 바람에 실려 온 감성 따위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주 시티 오브 호프 챔피언십(City of Hope Championship)에서 티샷 하는 장면.
캘리포니아주 시티 오브 호프 챔피언십(City of Hope Championship)에서 티샷 하는 장면.
“마흔 넘은 여자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여자 골퍼로서는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어요. 귀국 전엔 남편도 저랑 같이 로스앤젤레스(LA)에서 티칭 프로로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가자고 했더니 싫다고 했죠.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생활했고 한국엔 지인도 없으니 당연히 싫었겠죠. 그때까지도 한 번 살아보고 안 맞으면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먼저 갈 테니 여기서 생각을 해보라고 하곤 이삿짐 정리에 들어갔어요. 타던 차에 웬만한 짐은 꾹꾹 쑤셔 넣어 배편으로 한국으로 보내고 나머지 살림살이는 모두 그라지 세일(garage sale)을 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자기도 짐 싸는 박스 사들고 와서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2010년 5월, 20여 년 만에 돌아온 서울. 함께 온 가족은 남편과 강아지 한 마리. 일단은 프리랜서 티칭 프로로 강남에서 골프를 가르쳤다. 한국 문화를 거의 모르는 남편과의 갑작스러운 서울 살이에 크고 작은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적응해야 하는 건 비단 이민 1.5세인 남편뿐만은 아니었다. 20여 년의 공백을 메우는 일은 아내에게도 힘든 일.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한국 사회가 가진 필터(?)가 그것이다.

“딱 두 가지예요.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대단한 백(background)이 있거나 젊고 예뻐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한국나이로 마흔 하나인데 골프 방송을 진행해보고 싶어 진행자 오디션을 요청한 적이 몇 차례 있어요. 그런데 반응은 두 가지였어요. 여자 골퍼치고 나이가 너무 많아서 어렵다는 것과 제 진행 스타일이 너무 튀어서 한국 시청자 정서에 안 맞는다는 것이었죠. 후자는 그래도 발전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어딜 가나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나이를 공개하면 금세 ‘나이든 여자’라는 꼬리표가 달리기 일쑤였고, 티칭 프로로, 한국체대 대학원 강사로, 요리사로, 잡지 골프 칼럼니스트로 사는 그는 ‘일 욕심이 너무 많은 여자’로 치부되곤 했다. 오기가 발동했다. 마흔 넘은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든지 아름다운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일을 저질렀다.

“귀국한 지 1년도 안됐을 때니 국내에서는 인지도도 미약한 제가 책(스윙머신 여민선 골퍼의 몸만들기)을 왜 냈겠어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40대 여자의 몸은 이렇게 생겼어’ 하고 보여주고 싶었다고나 할까요.(웃음) 제가 골퍼로 활동하면서 골프라는 운동에 꼭 필요한 스트레칭과 운동법을 담은 책인데 책 속에 게재된 제 사진들은 포토숍 보정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랍니다. 정말이에요.”
뉴욕주 빅애플 클래식(New York Big Apple Classic)에서 첫날 선두를 달리며 연습 중인 여 프로. 그는 2000년부터 5년간 LPGA 투어 플레이어로 경기에 출전했다.
뉴욕주 빅애플 클래식(New York Big Apple Classic)에서 첫날 선두를 달리며 연습 중인 여 프로. 그는 2000년부터 5년간 LPGA 투어 플레이어로 경기에 출전했다.
골프 스트레칭과 운동법에 관한 교습서 발간 때 그는 포토숍 보정 없는 근육질 몸매를 과시했다. 경이로운 몸매 관리 비법은 꾸준한 골프와 권투, 사이클링 등 운동이다.
골프 스트레칭과 운동법에 관한 교습서 발간 때 그는 포토숍 보정 없는 근육질 몸매를 과시했다. 경이로운 몸매 관리 비법은 꾸준한 골프와 권투, 사이클링 등 운동이다.
‘젊음’이란 것이 본시 마음의 젊음과 육체의 젊음을 함께 담고 있을진대 한국에서 말하는 젊음은 그저 ‘숫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쉬웠다. 인맥도 없는 상태에서 이틀 만에 집필을 끝내고 대형 서점으로 무작정 나가봤다. 골프와 관련된 책을 발간했던 출판사의 편집자 e메일을 메모해 온 뒤 일단 e메일부터 보냈다. 그 가운데 연락이 온 곳과 책을 내기로 결정하고 필요한 사진을 찍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몸’일지 확인에 들어갔다.

“이건 제 스스로 가장 만족감이 큰 것이라 남편에게 선물한 사진이에요. 책을 냈더니 반응이 두 가지던데요. 하나는 ‘우와, 여민선 씨 죽여요’ 하는 것, 또 하나는 ‘골프만 하지…’ 하는 것이요. 하하하.”



팍팍한 서울 살이, ‘생활의 달인’으로

사진과 실물을 열심히 비교하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부럽다는 것, 둘째는 단순한 근육이 아닌 너무나 열심히 산 삶의 흔적일 것이란 것. 문득 카페 밖에 주차해둔 자전거의 하루 일과가 궁금해졌다. 그의 다양한 직업을 보면 ‘투잡족’은 울고 가라 할 정도 아닌가.

“새벽 6시에 일어나면 가락시장에 타고 가서 채소를 사요. 채소 사다 놓고 준비해서 한남동 스포츠센터에 11시까지 출근합니다. 오후 5시까지 골프 레슨을 하고 권투장으로 향해요. 45분 정도 집중적으로 운동을 하고 잠실 집에 가서 간단히 샤워를 한 후에 6시 반까지 남편이랑 운영하는 와인 바로 출근해요.”

이 모든 동선에는 그의 ‘애마’ 자전거가 동반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는 것은 12시 반에서 새벽 2시 사이. 그리고 다음 날에도 동일한 동선의 반복. 운동과 내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비명 지를 수준의 활동량이다. ‘나의 현주소’를 묻는 질문에 “생활의 달인”이라고 답하는 합당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달인’의 삶에 요리가 끼어든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2005년 LPGA 투어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원래부터 요리를 좋아했던 터라 스시학교에 입학했죠. 그런데 제가 칼질을 얼마나 잘했는지 졸업할 때 최우수 졸업생으로 뽑혔어요.(웃음) 레스토랑은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남편이 와인을 잘 알아서 손님들께 와인을 추천하면 그와 함께 나가는 샘플러 일식 안주를 제가 만들고 있어요.”
낮에는 골프 티칭 프로로 일하는 여 프로는 저녁이 되면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와인 바에서 셰프가 된다.
낮에는 골프 티칭 프로로 일하는 여 프로는 저녁이 되면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와인 바에서 셰프가 된다.
오너 셰프인 그는 와인 바 직원들도 운동선수들로 고용했다. 운동을 그만두고 나면 살 길이 막막한 선수들에게 요리 기술을 가르치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또 하나 그를 포함해 전원이 운동선수이다 보니 멀티플레이는 기본이요, 팀워크 하나는 최상이라는 장점도 있다. 이래저래 부비고 살다 보니 서울 살이도 어느새 2년. 잘나가다 나이에 ‘턱턱’ 걸리는 것도 이제 웬만큼 초탈했다. 하지만 그것이 포기라는 말과 동격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아직도 언젠가는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권투 경기에 출전하려고 했더니 그것도 34세 이상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내년에 심판시험을 보기로 방향을 바꿨어요. 가끔 저더러 욕심이 많다, 일에 미친 여자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돈이 많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거든요.(웃음) 미국에서보다 레슨비도 훨씬 낮춘 걸요. 열심히 사는 이유는 제가 즐겁기 때문이에요. 운동으로, 요리로 사람들 가까이 가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스스로 찾아올 거라 믿고 있어요.”

최근에는 자연과 사람의 리사이클링에 ‘꽂혀’ 있다는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는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길이 멀어 에너지를 보충해야 한다며 베이글 하나를 주문했다. 반쪽을 뚝 떼어주며 활짝 웃는 그는 심각한 운동 부족 상태인 기자에게 스포츠센터에 꼭 들르라 했다. 지친 사람들에게 이래저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능력, 여민선 프로는 그 방면에서도 ‘프로’임에 틀림없다.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