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디자인 오디세이

SAVOY VASE, 핀란드의 자연을 담은 디자인
‘사보이 베이스(Savoy Vase)’의 고향 핀란드. 알바 알토(Alvar Aalto·1898~1976)는 1936년 자식 같은 사보이 베이스를 탄생시켰다. 유리로 만든 이 화병은 핀란드 자연을 쏙 빼닮은 디자인으로 누가 봐도, 어디에 둬도, 무엇을 꽂아도 아름답다. 화병 하나로 세상을 환하게 만든 알토의 재주가 나는 부럽다.

핀란드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노키아 휴대전화,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고향…. 모두 다 핀란드다. 하지만 정작 핀란드 사람들은 사보이 베이스 덕분에 알토를 국민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는 핀란드 우표에도 등장하고 1990년 유로화로 통일하기 전 핀란드 화폐 50마르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Alvar Aalto
Alvar Aalto
알토는 1898년 핀란드 쿠오르타네에서 출생해 1916년부터 1921년까지 헬싱키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22년 유바스킬라에 건축사무소를 설립한 뒤 1933년 헬싱키로 옮겨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알토는 건축 외에 전람회 디자이너로서 중앙 유럽과 이탈리아, 북유럽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면서 쌓은 견문으로 1930년대에 획기적인 ‘휨목(曲木)’ 의자를 디자인했다. 그는 의자뿐 아니라 가구, 조명, 화병도 디자인했다. 모든 핀란드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보이 베이스는 그 가운데 하나로 1936년 헬싱키에 있는 사보이호텔 인테리어 디자인의 일환으로 ‘에스키모 여자들의 가죽바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재질은 유리로 색을 넣어 다양하게 만들었으며, 형태는 핀란드의 호수와 바다의 자연스러운 곡선에서 영향을 받았다.

다양하고 오묘한 색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사보이 베이스는 꽃 장식을 했을 때 그 퍼지는 모양이 가장 아름답도록 한 영리함이 곁들여져 있어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팔리는 알토 디자인 가운데 하나다. 알토는 평소 ‘디자인은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국 핀란드의 자연을 사랑했고 그것을 유감없이 건축과 디자인에 반영했다. 알토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선두로 핀란드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함과 동시에 무한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알바 알토 접시, 유리, 1936ⓒchoisunho
알바 알토 접시, 유리, 1936ⓒchoisunho
햇빛이 그리운 나라

알토의 고향 헬싱키의 인상은 시벨리우스의 웅장하면서 차분한, 빙하 위를 스치는 바람 같은 기분이다. 나는 요즘처럼 머리끝까지 찬바람이 불어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칠 때면 헬싱키 암석교회에서 사온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듣는다. ‘카렐리아 조곡’에서 울리는 호수와 아픈 역사와 그리운 조국의 향수를. ‘핀란디아’를 들으면서 조국이라는 것이 무언지, 왜 사람들은 제 나라, 제 땅, 제 가족을 찾는지 조금은 이해할 듯하다. 그 장엄함 속에 그해 1월 헬싱키의 하늘과 이탈라(Iittala) 유리공장과 시청사와 시벨리우스 공원과 노키아 본사가 영화의 한 장면이 돼 추억한다.

아, 다시 가고 싶다. 사보이 베이스 화병 하나로 나는 젊었을 때 추억의 한 페이지를 온전하게 담고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한 장면처럼 알토 디자인 의자와 식탁으로 정갈하게 다가온 헬싱키의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따듯하게 전해진다. 햇빛이 그리운 나라 핀란드 헬싱키 정월의 하늘은 눈이 부시다. 천길 빙하 속 같은 그 파란색. 아, 지구의 척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연봉에서 보았던 시리고 푸른 하늘색, 그 색이었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에 흐르는 그 깊은 침잠의 고요가 대지에 깔려 있다.
핀란드의 겨울 호수
핀란드의 겨울 호수
오로라, 핀란드
오로라, 핀란드
2005년 1월, 런던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헬싱키는 자정이 가까웠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하늘은 짙고 푸르렀다. 눈의 고향답게 공항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온통 설국이었다. 코끝이 상쾌했다. 헬싱키 도심 호텔로 가는 길은 여행의 피로보다 이국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광경은 택시에 달린 커다란 선루프였다. 거의 차량의 천장 전체를 유리 덮개로 마감한 선루프 덕택에 뒷좌석에 않아서도 밤하늘이 훤히 보였다. 낮에는 얼마나 햇빛이 눈부실까. 나는 순간 햇빛이 그리운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햇빛이 그리울 만큼 겨울이 길고 지루한 곳, 눈과 침엽수와 호수로 둘러싸인 자연…. 핀란드 대사관에서 받은 핀란드 방문 안내책자를 넘기다 보니 시원스럽게 펼쳐진 대지의 사진 위에 ‘핀란드에는 뱀도 사자도 코뿔소도 심지어 독개구리조차 없다. 대부분 멋쟁이 새와 약간의 여우만 있을 뿐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드넓게 펼쳐진 호수, 사람들의 환한 웃음, 침엽수 사이를 걷는 사람들, 자작나무와 모던한 유리 건물, 알토의 사보이 베이스, 그리고 오로라로 물든 파스텔 톤 밤하늘…. 모두 핀란드가 얼마나 청정 자연인가를 보여주는 과장 아닌 자부로 가득한 광고다. 북극의 오로라와 호수의 빙하가 만들어내는 천연의 이미지, 그리고 유리가 가지는 빛의 투명성이 사보이 베이스를 만든 원동력이다. 노키아 본사 건물 전체가 거대한 유리로 덮여 있다. 내부 깊숙이 빛이 들어온다. 마치 사보이 베이스 안을 통과해 밖으로 다시 발산하는 빛처럼….
헬싱키에 있는 노키아 본사
헬싱키에 있는 노키아 본사
SAVOY VASE, 핀란드의 자연을 담은 디자인
노키아 본사 실내
노키아 본사 실내
사보이 베이스
사보이 베이스와 나무 주형, 1930년대
사보이 베이스와 나무 주형, 1930년대
사보이 베이스는 통나무에 가운데를 파서 화병의 외형을 만든 다음 여기에 불에 녹은 유리를 넣고 일일이 사람의 입으로 불어 완성한다. 완전한 장인정신의 결과물이다. 사보이 베이스는 섭씨 1100도에서 녹인 유리물을 재료로 30시간의 긴 공정을 거쳐 완성한다. 오늘날에는 헬싱키에 있는 이탈라 유리공장에서 과거 방식 그대로 기계식 대량 생산이 아닌 철저한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다.

공장 안은 거대한 벽돌 건물로 천장이 높고 굴뚝이 하늘을 찌른다. 이탈라의 빨간색 ‘i’영문 소문자가 선명한 로고를 단 유리제품이 가득하다. 유리창으로 새어드는 북구의 찬 햇살에 비친 사보이 베이스가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둥근 곡선이 화병을 잡아드는 손맛을 느끼게 한다. 유리는 나에게는 무언가 서먹하다. 아마 나 말고도 한국인이라면 너나없이 대개 유리라는 재료에 덜 친밀감을 느낄 것이다. 곰곰 생각해봐도 우리 조상의 아름다운 전통유물에서 유리제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서역에서부터 수만리 머나먼 신라에까지 흘러들어온 유리제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보이 베이스, 유리, 1936년
사보이 베이스, 유리, 1936년
조선시대 색경이라고 해 화장거울을 제외하고, 근대화로 유리가 일상의 건축자재로 쓰이기 시작한 개화기 이후를 제외하면 변변한 유리제품을 찾을 길이 없다. 한반도의 자연은 사계가 뚜렷하고 비옥한 대지에 불교를 받아들여 도상과 색을 숭상한 민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게다가 일찍부터 발달해온 도자기 문화가 우리의 정서로 편입돼 완전한 세계를 이루었다.

유리는 사막의 전유물이다. 석영과 장석이 녹아내린 이 신비로운 물질은 기독교의 성당과 교회 건축의 창문을 꾸미는 데 더없이 훌륭한 재료다. 즉, 하늘의 영광을 구현하는 데 빛은 기독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그 빛을 색색의 유리에 올려 만든 성물이 스테인드글라스다. 사보이 베이스는 이러한 빛과 종교, 자연과 보이지 않는 끈을 형성하고 있다. 단순히 화병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핀란드의 자연과 북구의 삶이 녹아든 새로운 피조물인 셈이다.
SAVOY VASE, 핀란드의 자연을 담은 디자인
나는 헬싱키 이탈라 본사에서 파란색 사보이 베이스(높이 160mm)와 흰색(너비 380mm) 접시를 샀다. 여행에서 사오기는 부담스러운 크기였지만 내겐 기쁨이었다. 소중히 가슴에 품고 이역만리를 거쳐 가져온 보람은 실크로드를 건너온 서역의 보물과도 같았다. 이 보물들을 어디에 두고 볼까. 거실에, 식탁에, 책장에…. 여기저기 자리를 물색하다가 충북 괴산 청천에 있는 시골 흙집의 오래된 전라도 반다지 위에 두기로 했다. 흙집 안방 창가 곁에 놓인 반다지에 북구의 미인이 호젓하게 자리를 잡으니 방 안이 확 달라진다.‘유리 화병 하나가 저렇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니….’ 디자인이 뭔지, 디자인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좋은 디자인 제품 하나가 밥보다 더 배불리 눈을 호사시키는구나 싶다. 나는 철따라 봄에는 뒷동산 소나무 아래서 꺾어 온 연분홍 진달래나 노란색 산동백을 꽂고, 여름에는 마당에 핀 함박꽃과 가지목련을 잎과 함께 꽂아 놓기도 한다.
SAVOY VASE, 핀란드의 자연을 담은 디자인
가을에는 노랑 산국화 다발과 자주색 오이풀을, 겨울에는 빨강 산수유와 주황 화살나무 가지가 방 안을 화사하게 한다. 가끔은 전라도 소반에서 빈 채로 해바라기를 하지만 여전히 반다지 위가 제자리다. 나는 조선 청화백자의 푸른색이 좋다. 김환기가 사랑했던 그 색을 나는 사보이 베이스에서 본다. 색과 빛이 어우러진 디자인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눈에 번쩍 뜨이는 디자인이 아니라 오래 두고 봐도 물리지 않는 디자인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디자인, 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 그래서 좋은 디자인은 대를 이어 사랑받고 오래가나 보다.




문화인의 지름길
알토 베이스, 유리, 이탈라
알토 베이스, 유리, 이탈라
알토는 1930~40년대에 유기적 디자인(organic design)의 모태로서 유럽과 미국에서 폭넓게 수용되는 한편, 그의 디자인 철학은 찰스 & 레이 임스 같은 전후 디자이너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모더니즘 운동의 기계미학과 엄격한 합리주의 방식의 디자인에 반대한 알토는 “세계를 가장 바람직하게 규격화시킨 구조는 자연 그 자체일 것이다. 자연의 경우 규격화는 주로 최소 단위인 세포에서 일어나며, 그 결과 수백만의 유연한 결과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스테레오타입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알토 디자인은 사용자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핀란드에 풍부한 천연나무 소재를 이용한 의자와 가구, 그리고 유리를 이용한 ‘인상적이고, 인간적인’ 사보이 베이스를 만들었다. 알토의 선구적인 디자인은 형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안겨 주었고 일반인에게 모더니즘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풍부하게 표현됐다. 좋은 디자인은 눈을 즐겁게 한다. “너 참 이쁘구나! 멋있는데….” 사람들은 좋은 디자인 제품을 칭찬한다.
SAVOY VASE, 핀란드의 자연을 담은 디자인
현대의 삶은 온전히 디자인에 노출돼 있다. 도시는 디자인되고 구획된다. 일상이 디자인이다 보니 그 속에서 무감각해진다. 어쩌면 모두가 디자이너고 모든 게 디자인 된 제품인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자라는 꽃, 풀, 나무, 물, 바위, 산, 구름을 제외하고는 모두 디자인 제품이다. 도시의 가로등, 광고, 사인물, 자동차, 건물 심지어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조차 모두 디자인 돼 있다. 성형도 디자인이다.

남다른 무엇을 만드는 일이 곧 디자인이다. 개성은 디자인의 다른 말이다. 나는 개성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래야 세상은 더 재미있어진다. 획일화되고 일상적이라면 사는 맛이 얼마나 반감될까.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여행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여행을 가면 순식간에 새로운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한다. 마치 중세나 미래의 어느 도시 속으로 편입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새로워진다. 호기심과 긴장은 몸과 마음을 흥분시킨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생활하고 지나가는 일상과는 정반대의 세상이기에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그래서 디자인은 더 나은 문화인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의미 있는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의식적이고 직관적인 노력이다. 나는 알토의 사보이 베이스가 좋다.
SAVOY VASE, 핀란드의 자연을 담은 디자인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