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시화담

서울 이태원 필리핀대사관 건너편에 자리한 한식당 ‘시화담’은 음식 맛에 버금가는 ‘맛’이 있는 공간이다. 파인 다이닝 한식을 즐기는 동안 이름처럼 시와 그림, 이야기에 빠지는 맛 또한 쏠쏠하기 때문. ‘신선설농탕’으로 유명한 ㈜쿠드가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지난 10년간 준비했다는 시화담을 찾았다.
가을부터 인기를 모은 메뉴 ‘오늘 새참은 뭘까?’. 마치 논 한 마지기를 옮겨 놓은 듯한 그림이다.
가을부터 인기를 모은 메뉴 ‘오늘 새참은 뭘까?’. 마치 논 한 마지기를 옮겨 놓은 듯한 그림이다.
모던한 외관의 시화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공간과 조우했다. 1층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야·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나파밸리 포도나무 조형물, 도자기를 주제로 한 비디오 아트, 도예가 이선정의 작품이 손님을 먼저 반겼기 때문. 차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대기실에 놓인 소파 역시 덴마크 디자이너 한스 베그너의 작품이라고 하니 한식당인지 갤러리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의 아우라다.
갤러리 느낌의 1층 공간
갤러리 느낌의 1층 공간
갤러리 작품에서 국악공연 감상까지

시화담은 층별 콘셉트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마티스, 모딜리아니, 피카소 등 화가의 이름을 딴 룸이 있는 공간인 2층은 ‘화(畵)’요, 우리 시 한 구절을 감상할 수 있는 3층은 ‘시(詩)’요, 그림과 시가 묘하게 접목된 음식은 끊임없는 화두를 끌어내주니 이는 ‘담(談)’이다.

박경원 시화담 대표는 “10년의 세월 동안 열정과 자금을 쏟아 부었다”고 말했다. 외국에 나가 한식당을 찾을 때마다 받았던 실망감이 시화담을 착안하게 된 배경이라고. 콘셉트를 잡은 지는 10년, 본격적으로 메뉴 개발에 착수한 것은 4년 전.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각각의 메뉴에는 건강식이라는 기저 위에 ‘예술’적 감각이 채색됐다. 그러다 보니 메뉴 하나하나가 서브될 때마다 손님들은 다른 화제를 꺼낼 짬이 없다. 가히 ‘작품’이라고 할 만한 접시 위 예술적인 프레젠테이션에 감탄하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과 분위기는 절로 무르익을 수밖에.

장장 10여 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8월 오픈했다지만 시화담은 떠들썩한 광고 한 번 한 적 없다.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손님들을 모셨지만 손님은 또 다른 손님을 모시게 했고, 지금은 재계 인사, 정치인, 외국인, 국빈 등이 최고로 모셔야 할 손님을 대접하는 장소로 입소문이 났다. 특히 중2층에 마련된 룸에는 국악공연 무대를 마련해 요청 시에는 공연과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어 한국의 전통예술까지도 경험할 수 있다.
VIP 회원을 위한 개인 수저함
VIP 회원을 위한 개인 수저함
국악 공연 무대를 갖춘 중2층 룸
국악 공연 무대를 갖춘 중2층 룸
‘작품’으로 구현된 파인 다이닝 한식

시화담의 모든 메뉴는 코스 요리다. 점심 메뉴인 ‘한국의 시’를 비롯해 ‘그림 한 폭’, ‘즐거운 이야기’, ‘미식가들의 만찬’ 등을 선택할 수 있는데, 12단계에서 22단계 코스로 최장 코스인 ‘미식가들의 만찬’은 시작부터 끝나기까지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시화담의 모든 식기는 이연정, 김희종, 임의석 등 유명 도예가들의 작품으로 ‘미식가들의 만찬’ 시 한 사람에게 서브되는 도기만 해도 1500만 원 상당이다.
주전자 속에 담긴 청국장 수프를 성게알과 금가루, 재나물을 올린 두부가 흥건히 잠기도록 부어서 먹는 뉴 청국장 수프
주전자 속에 담긴 청국장 수프를 성게알과 금가루, 재나물을 올린 두부가 흥건히 잠기도록 부어서 먹는 뉴 청국장 수프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음식을 탐험할 차례. 22가지 모두 감상하기는 무리수가 따를 듯해 1월의 메뉴 몇 가지를 요청했다. 먼저 텁텁한 입 안을 정제할 겸 백연꽃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하고 우아한 백연꽃 향이 입 안 가득 퍼지며 심신을 달랜다. 전채 중 하나인 ‘건강식 주전부리’가 테이블에 오르는 순간, 사람의 눈도 카메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두고 어느 누가 ‘말린 견과류’라고 치부할 수 있으랴.
시 ‘청산리 벽계수야’와 함께 이강주를 담아 내는 ‘황진이’
시 ‘청산리 벽계수야’와 함께 이강주를 담아 내는 ‘황진이’
슈거 파우더로 접시 한쪽에 새긴 시 한 수까지 읊으니 술 한 잔이 절로 생각난다. 필자의 흥분을 눈치 챈 주인장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야심작’을 내놓는다. 녹차가루로 ‘청산리 벽계수야’ 시를 새긴 백옥처럼 흰 도기 접시 위에 이강주가 함께 나오는 ‘황진이’는 실제로 황진이가 올리는 주안상 같아 미소가 절로 난다.

손톱같이 작은 조약돌 위에 싱싱한 전복과 해삼, 멍게를 얹어낸 ‘겨울 바닷가’는 먹는 내내 조약돌 아래 숨겨진 mp3를 통해 흘러나오는 갈매기와 파도 소리에 취할 지경이다. 이어 내어온 조선시대 임금의 초조반상(初朝飯床). 몸에 좋기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백봉령죽과 어찌나 가늘게 찢었는지 보푸라기같이 부드러운 북어 찬에 입이 쩍 벌어진다. ‘음식이 예술’이라 함은, 바로 이 만드는 사람의 ‘치성(致誠)’ 때문이리라. 1월 중 서울 인사동에 가격을 조금 낮춘 시화담이 문을 연다고 하니 미식가들이 반길 소식이다
임금의 초조반상에 올렸던 백봉령죽과 삼색 북어 보푸라기, 다시마부각, 수삼대추 백김치 3찬을 내는 ‘조선시대 임금님의 죽상차림’
임금의 초조반상에 올렸던 백봉령죽과 삼색 북어 보푸라기, 다시마부각, 수삼대추 백김치 3찬을 내는 ‘조선시대 임금님의 죽상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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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닷가. 조약돌 아래 숨겨진 mp3에서 흘러나오는 갈매기와 파도소리가 전복, 해삼, 멍게의 맛을 한층 끌어올린다. 작은 유리병 속에는 손님 각각을 위한 편지가 들어 있다.
겨울 바닷가. 조약돌 아래 숨겨진 mp3에서 흘러나오는 갈매기와 파도소리가 전복, 해삼, 멍게의 맛을 한층 끌어올린다. 작은 유리병 속에는 손님 각각을 위한 편지가 들어 있다.
Information

위치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5-5(필리핀대사관 건너편)

영업시간 점심 정오~오후 3시, 저녁 오후 6~10시

(예약에 따라 시간 조절 가능)

가격대 10만~35만 원(1인 기준 코스 요리·VAT 별도)

주차 발레파킹 가능

기타 3일 전 예약, 케이터링 서비스 제공

문의 02-798-3311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