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러 붙지 않는 프라이팬’ 하면 떠오르는 테팔. 테팔은 연매출 27억 유로(약 5조6000억 원), 초당 6개 제품 판매 등 주방용품업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권좌를 지키고 있는 프랑스 기업 그룹세브(Group SEB)의 대표적 효자 브랜드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 ‘테팔’이란 브랜드를 현재의 위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따로 있다. 한국인 최초로 지사장에 오른 그룹세브의 국내 법인 (유)그룹세브코리아 팽경인 대표가 바로 그다.
“테팔에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디자인과 기능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제품을 정직하게 알리기만 해도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합니다.”
“테팔에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디자인과 기능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제품을 정직하게 알리기만 해도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합니다.”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룹세브는 주방용품의 명가다. 크룹스(KRUPS), 라고스티나(LAGOSTINA), 로벤타(ROWENTA), 테팔(TEFAL) 등 파워풀한 브랜드를 생산, 전 세계 150여개 국에서 판매하고 있다. ‘테팔’로 대표되는 (유)그룹세브코리아의 팽경인 대표는 1997년 주방용품 마케팅 매니저(차장)로 입사, 지난 14년간 17배 이상의 매출 성장을 기록, 승승장구하며 2009년 1월에 대표이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팽 대표는 그룹세브 내 한국인 최초의 지사장이기도 하다.

리서치 전문회사의 조사연구원에서 출발해 주방·가전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기까지, 남다른 경쟁력과 강단이 숨어있을 것이란 짐작은 두어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 사실로 충분히 입증됐다.



보스보다 ‘딱’ 한 발만 앞섰던 것이 경쟁력

온화한 얼굴로 기자를 맞이하는 팽 대표는 강하기보다는 부드러웠다. 조근조근하면서도 침착한 말투였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입 주방용품의 한판 진검승부 속에서 팽 대표만의 서바이벌 전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CEO interview]“최고의 마케팅은 제품을 정직하게 알리는 것 ”
그룹세브코리아에 재직하는 동안 매출 17배 성장이라는 진기록을 세우셨습니다. 비결이 뭔가요.

“제가 후배들한테 자주 조언하는 말이 ‘사장보다 많이도 말고 딱 한 발만 앞서서 생각하라’입니다. 주도적으로 한 발만 앞서 생각하면 회사로부터 신뢰를 얻고, 신뢰를 얻으면 업무에 대한 권한이 생겨 운신의 폭이 커질 수밖에 없거든요. 테팔은 다차원적인 광고와 홍보, 머천다이징, 프로모션 등이 이룬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핵심은 제품 그 자체예요. 소비자들이 종전 제품을 쓰면서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정확히 파악해서 그 불편한 점이 테팔을 통해 어떻게 편리하게 변하는가를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는 거죠.”

주방용품·가전제품 회사 대표로서는 전공이 색다르신 것 같습니다. 사회학 전공이시죠.

“(웃음) 사회학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학문이잖아요. 비즈니스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사회 속에서 하는 것이죠.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직원과의 관계 정립에도 사회학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사회학에서는 어떤 현상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해 복합적인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런 과정이 결국 마케팅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애초에 출발은 주방용품업계는 아니셨던데요.

“네, A. C. 닐슨 코리아(A. C. Nielsen Korea) 조사연구원이었어요. 그때 제 클라이언트 중에 한 곳이 ‘코닝’이라는 회사였어요. 신참일 때 ‘갈색 냄비’로 불리는 ‘비전’이라는 브랜드 유통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당시 비전은 방문판매(방판)로만 유통되고 있었죠. 유통구조와 고객을 조사 분석한 결과 리테일(소매)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할 듯 보여 방판과 더불어 백화점으로 유통망을 확대하자고 제안했죠. 클라이언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비전의 백화점 출시가 굉장히 성공적이었어요.”

클라이언트가 마케팅 제안과 함께 사람까지 받아들인 것 같은데요. A. C.닐슨 코리아에서 코닝으로 옮기셨죠.

“네. 닐슨도 좋은 회사이긴 했지만 프로젝트를 열심히 진행해서 클라이언트한테 넘기는 것이 마치 아이만 낳아서 안겨주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웃음) 제가 도출한 결론과 액션 플랜을 직접 실행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코닝’이 주방용품이잖아요. 매장에 가서 직접 제품을 보고 고객도 자주 만나고 이런저런 업무를 시쳇말로 일당백 식으로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비전’ 냄비를 인연으로 옮긴 코닝에서 또 한 번 ‘사고’를 치신 것으로 압니다.

“비전의 백화점 진출이 성공적으로 되고 나니 회사가 너무 한 브랜드에만 의존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코렐’을 한국 시장에 진출시켰죠. 그때만 해도 수입 식기는 집 안 장식장 속 ‘전시’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제 목표가 전시용 그릇을 ‘생활용’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써보니 참 간편하고 잘 깨어지지 않아 관리도 쉽다는 콘셉트를 강조했죠. 한국 소비자들은 세척이 편리한 식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거든요. 일상생활형 식기로 시장을 창출하면 사업이 되겠다 싶은 확신이 있었어요.”

요즘도 코렐 식기세트는 혼수용품 1위 브랜드 아닌가요.

“그렇죠.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이 코렐이 미국 브랜드라 밥그릇, 국그릇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아이스 볼을 밥그릇으로, 시리얼 볼을 국그릇으로 바꿔 구성했죠.(웃음) 접시도 미국은 납작(flat)한 것을 주로 쓰는데 한식은 국물이 있는 반찬이 많아 본사에 접시를 오목하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어요. 한국 소비자들의 니즈를 반영해서 크게 성공을 거뒀죠.”

코닝에 재직하는 8년 반 동안 매출을 무려 10배 이상 키운 주역이라 들었습니다. 시쳇말로 ‘잘나가실’ 때 그룹세브코리아로 적을 옮기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도전을 즐기는 타입인데, 매출이 어느 정도 안정세로 접어들자 제가 너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삶의 변화가 필요하겠다 싶었죠. 그때 마침 그룹세브코리아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어요. 그룹세브의 기업철학이 혁신(innovative)인데, 제게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고, 또 그런 과정이 회사에도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방용품 마케팅 매니저로 오게 됐죠.”



‘한국 주부’를 위한 ‘한국적’ 주방용품으로
“테팔의 슬로건이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디어’ 인데 어떨 때는 소비자들이 제품을 쓰면서도 뭐가 불편한 건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바로 그 부분을 포착하는 거죠.”
“테팔의 슬로건이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디어’ 인데 어떨 때는 소비자들이 제품을 쓰면서도 뭐가 불편한 건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바로 그 부분을 포착하는 거죠.”
그룹세브코리아로 적을 옮길 때 마음속에 떠올랐던 가장 중요한 숙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당시에 테팔은 일부 백화점에서만 판매되고 있었어요. 테팔을 ‘나의 브랜드’로, 내 생활 속에 없어서는 안 될 브랜드로 포지셔닝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하지만 ‘나의 브랜드’로 알리려면 소비자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어떤 전략과 실행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잡으셨나요.

“솔직히 그룹세브코리아에 입사하기 이전에는 프라이팬 하나에 그렇게 심오한 기술력이 들어 있는지 몰랐었어요.(웃음) 우선은 광고 문구부터 바꿨어요. 철저하게 한국 주부의 언어로 바꿨는데, 예를 들어 ‘서모-스폿(thermo-spot)’이란 어려운 용어 대신 ‘열 센서 프라이팬’을, ‘인지니오’라는 용어 대신 ‘매직 핸즈’를 사용하는 식이죠.

‘Tefal’이란 브랜드명 표기도 ‘테팔’이란 한글로 쓰고요.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철저하게 소비자의 언어로 바꿔가면서 제품을 사용하기 전과 후의 달라진 생활을 강조했어요. 테팔에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디자인과 기능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제품을 정직하게 알리기만 해도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합니다.”

새 프라이팬을 많이 잘라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본사에서 신제품이 오면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적인 부분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실제로 팬을 잘라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코팅이 정말 2중인지, 3중인지 잘라보면 알 수 있거든요. 요즘은 직원들이 제가 자르기 전에 잘라보더라고요.(웃음)”

평평한 접시를 오목하게 변형시킨 주인공이신데, 프라이팬이라고 가만히 둘 리 없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본사 프라이팬이 납작한 모양이었는데, 한국은 볶음요리가 많다 보니 좀 더 깊고 둥근 형태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한국 시장에서 유통되는 프라이팬 모양을 본사에서는 ‘코리안 셰이프(Korean Shape)’라고 불러요. 그릴도 한국에선 생고기 구울 때도 쓰지만 양념고기 구울 때도 쓰니까 국물이 생기는 요리라 형태를 변화시켰어요. 원래 모양은 편평하지만 한국형은 약간 더 깊게 디자인해 전골용으로 사용이 가능해요. 미니 블렌더의 경우엔 한국에서 최초로 아이디어를 제안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죠.”

테팔의 현주소,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난해 한 리서치 조사 결과(해리스 인터렉티브 조사 자료) 테팔이 주방용품을 넘어 소형 가전에서도 인지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어요. 브랜드명에 대한 보기를 주지 않고 실시하는 조사(최초 상기 브랜드)에서 테팔이라고 답한 사람이 40%를 넘었는데, 1위 브랜드는 10% 미만이었어요. 한국 시장에서 테팔은 전기그릴과 다리미, 프라이팬, 찜기 품목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어요. 아직은 많은 분들이 테팔을 주방용품 브랜드로 알고 계시지만, 소형 가전 브랜드로서도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 욕심은 주방·가전용품을 망라해서 테팔이 최고의 브랜드가 됐으면 하는 거고요.(웃음)”

그 결과가 지난 14년간 팽 대표께서 일군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팽 대표님의 최대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 다른 건 몰라도 책임감 하나는 강한 편이에요.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생기면 꼭 실현을 해내고야 마는 성격도 있고요. 마케팅 경력이 20여 년 정도 되는데 저의 강점이라면 유통고객, 즉 바이어들을 많이 만나 그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던 것도 도움이 됐어요. 일반적으로 마케팅은 주로 소비자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저는 유통고객과의 관계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많이 느꼈어요.”

‘책임감’을 강조하시는 것을 보니 그 책임감 때문에 ‘워커홀릭’이 아닐까 짐작이 되는데요.

“늘 가족들 원성이 있어왔죠.(웃음) 다행히도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상대적으로 이해를 많이 받으며 살고 있어요. 바쁜 엄마 밑에서 자라 그런지 아이들도 혼자 해결하는 부분도 많았고요. 요즘은 그래도 나은 편이에요. 직원들과 함께 ‘9 to 9(아침 9시에 출근해 적어도 저녁 9시까지는 퇴근 완료)’ 프로젝트를 실행 중이에요. 제가 막내며느리인데, 회사에서는 사장이지만 시댁에 가면 항상 어시스턴트예요. 그래서 세상이 공평하다고 하나 봐요. 명절 때 모여도 어시스턴트만 하니 저도 만회할 기회가 필요한데 가끔씩 조카들 데리고 해외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력서 쓰는 법이나 면접에 대한 조언도 해주고 그러면 열외가 될 때도 있어요. 회사 일도 그렇지만 가정 일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선택과 집중의 각별한 노하우 하나 전수받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솔직히 전업주부 엄마들처럼 해줄 수는 없어요. 처음엔 욕심도 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가 24시간밖에 안 된다는 한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아이들한테 요리를 해줄 때도 다른 엄마가 해주는 일반적인 메뉴보다는 독특한 메뉴를 선택하기도 하고 학교에 한 번씩 갈 때 학급 친구 이름을 외워뒀다가 아이와의 대화에서 활용하기도 해요. 그러면 아이들이 놀라죠. 우리 엄마가 친구 이름을 어떻게 알까 하고요. 평소에 남편 회사 사보를 유심히 봐뒀다가 남편 회사의 전략에 대해서 아는 척 하기도 하고요. 하하.”



가장 경청해야 할 사람, ‘고객’

여성 CEO로서 겪었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외국계 기업이라 별달리 없었는데, 고객 불만신고를 처리하다 보면 본사까지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있어요. 한참 설명을 해드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리는 분들은 대부분 ‘사장 바꿔’ 하시는데, ‘제가 사장입니다’라고 해도 안 믿으실 때가 있어요.(웃음)”

여성 CEO로서 섬세함이 강점이 됐을 것도 같습니다.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케팅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일단,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면서 불편해하는 부분을 만족하는 방향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테팔의 슬로건이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디어’인데 어떨 때는 소비자들이 제품을 쓰면서도 뭐가 불편한 건지도 모를 때가 있어요. 바로 그 부분을 포착하는 거죠. 전후를 확실하게 비교해줌으로써 ‘이젠 이 제품 없이는 못 살겠다’ 할 정도로 만드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제품군이 탄생하기도 하는데, 전기 주전자와 전기 그릴 등이 그 좋은 예죠. 가장 중요한 건 소비자의 시각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기업과 브랜드의 철학이기도 하고요.”

직업병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딜 가도 주방에 어떤 제품이 있는지 살펴보는 버릇이 있죠. 매장에 나가면 제품들이 자식 같아서 디스플레이가 마음에 안 들거나 하면 손을 대는데, 한번은 백화점에 들렀다 나오는데 어머니께서 ‘이제부터는 백화점 매장에선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판매사원이 보안요원에게 눈짓을 해 백화점 보안요원이 저를 계속 따라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테팔’ 다음으로 스타로 등극시킬 브랜드는 어떤 것인가요.

“로벤타예요. 현재는 드라이어가 헤어케어 가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요. 리서치 조사를 보니 유닉스, 필립스에 이어 로벤타가 3위를 기록했더라고요. 헤어케어에 이어 12월에 무선 진공청소기를 출시합니다. 헤드가 마름모로 돼 있어 모서리 청소의 불편함을 해소시켜준 모델이죠. 2011년에 테팔이 ‘집밥’을 콘셉트로 캠페인을 벌였는데, 가족의 행복을 지향하는 브랜드 가치를 알리는 데 효과가 있었어요. 내년에는 로벤타 무선 청소기도 그러한 콘셉트로 캠페인을 펼칠까 고려 중입니다.”

앞으로도 전대미문의 제품들은 계속 등장할까요.

“아직도 손대지 않은 시장이 분명히 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바 없는 제품도 무궁무진하죠.”

2012년 임진년의 문턱.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한 해를 보낼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로벤타 청소기의 전원을 켜고 곧바로 시연에 돌입했다. 주부들을 지금보다 한결 편하게 만들어 줄 청소기라며 열심히 사무실을 오가는 그가 여러 의미에서 대한민국 ‘대표 주부’로도 보이는 순간이었다.



팽경인
현 (유)그룹세브코리아 대표이사
이화여대·대학원 사회학과
1988년 A. C. 닐슨 코리아 조사연구원
1989~97년 코닝한국지사
1997년~ (유)그룹세브코리아





팽경인 (유)그룹세브코리아 대표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