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를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소재 중 하나가 <부작난>(不作蘭)이란 난화(蘭畵)이고, 다른 하나는 추사의 유일한 혈육인 서자 상우(商佑)에게 난초를 그리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 난초 그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답한 편지다.
[동양미학 산책] 추사 김정희와 서자 상우의 절망과 예술
부 작난이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난 같지 않은 난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추사가 화면 곳곳을 꽉 채우듯 남긴 글들에서 추사의 예술 세계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길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 <부작난>은 추사가 제주와 북청으로 이어진 10여 년이 넘는 귀양에서 풀려나 아버지 김노경이 묻힌 과천에 머물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머슴 달준을 위해 20년 만에 붓을 잡았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세상에 하나뿐인 난화의 탄생에 추사 스스로도 놀란 듯하다. 화제를 쓰기 위해 남겨둔 여백에 그림과 어울리는 글씨는 어떤 내용을, 어떤 서체로, 몇 자를 써야 할지 무척 설레였을 것이다.

추사가 <오난설가>(吳蘭雪家)를 위해 그린 <난맹첩>(蘭盟帖)에서 <초예기자>(草隸奇字)를 시도했었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겠지만, 글은 그림을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게 된 사연이다. 그래서 추사는 생각한 것들을 차례로 써나가기로 했던 것이다. 난화처럼 또 그렇게 우연에 맡겨져 탄생됐다.
[동양미학 산책] 추사 김정희와 서자 상우의 절망과 예술
추사가 머슴 달준에게 난화를 맡긴 이유

그렇다면 추사는 왜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을 정도의 글밖에 모르는,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와는 거리가 먼 달준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이 그림을 간직토록 했을까.

주인인 추사가 그려준 것에 그저 기뻐할 뿐인 달준이 이 그림의 가치를 알기나 했을까. 달준에게 줄 그림이란 것을 안 소산이 벌써 탐내자 추사는 이 그림은 달준의 것이라고 그림에 못을 박고 끝을 맺었다.

화가를 떠난 작품은 화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추사가 모를 리 없다. 그러면서도 문자향서권기와는 거리가 먼 달준만이 그림의 주인이라고 왜 못을 박았는지 범인으로서는 그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하나하나 그림을 완성해가던 추사는 서자 상우가 머릿속을 휙 지나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버지처럼 글씨를 쓰고 난을 그리고 싶어 하던 서자 상우였기에 말이다.

추사는 유배지인 제주에서 후처인 예안 이 씨에게 여러 장의 편지를 보냈다. 양자인 상무와 서자인 상우에게도 여러 번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당선생전집> 권2 서독(書牘)에 ‘아들 무에게(與懋兒)’ 세 편, ‘아들 우에게(與佑兒)’ 한 편, 그리고 잡편에 ‘아들 우보라 쓰다(書示佑兒)’란 글이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자와 서자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다르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를 크게 주의하지 않았다. 양자인 상무에게는 안부를 묻고, 병든 어머니 예안 이 씨를 잘 보살피라거나, 집안일은 둘째아버지를 따르라는 이야기며, 자신의 건강이나 지내는 일상을 알렸다. 그리고 함께 볼 터이니 상우에게 따로 편지를 쓰지 않겠다거나 상무에게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우에게는 어떻게 지내느냐, 집안일 등을 묻는 상투적인 한마디 말도 없이 난화며 글씨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추사의 유일한 혈육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상우와의 편지는 누군가 앞뒤를 잘라 버렸을까, 아니면 상투적인 말들이 부자 사이를 더 멀게 했을까.
[동양미학 산책] 추사 김정희와 서자 상우의 절망과 예술
서자의 비운을 한몸에 타고난 상우

상우(1817~1884)는 추사가 예안 이 씨와 재혼한 지 9년 되던 순조 17년(1817)에 태어났다. 추사에겐 32세에 얻은 첫아들이지만 서자이기에 내놓고 기뻐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무는 상우보다 두 살 아래로 추사가 제주에 유배된 다음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후사(後嗣)로 입양됐다. 상우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다.

그 나이에 추사는 생원시에 급제해 아버지를 모시고 중국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영조의 맏사위 월성위의 봉사손으로 온갖 부귀를 누리며 신진으로 부상했다. 아버지 추사가 부귀영화를 누린 그 나이에 상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후사에서도 밀려나 절망만 더 했을 것이고, 절망을 이겨낼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우는 당시의 제도와 관념을 벗어나 아버지가 도울 수 있는 서예가의 길을 선택하면 마다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상우에게 쓴 두 통의 편지는 바로 추사가 유배의 절망을 예술로서 승화시켰을 때 아들을 위해 쓴 것이다. 부자가 모두 절망에서 선택한 길이었다. 이 길은 삶의 몸부림이었고, 몸부림 속에서 얻은 희열이며 여유였지, 결코 문사(文士)의 여기(餘技)는 아니었다.

‘아들 우보라 쓰다’에서 상우가 “글자들이 따로 논다”며 귀일(歸一)의 어려움을 말하자 추사는 “나이 60에도 아직 귀일을 터득지 못했는데 하물며 너 같은 초학자가 터득하겠느냐! 다만 네 말을 듣고 매우 기쁘니 반드시 이 말에 소득이 있다고 여기거라. 절대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넘기지 말아야 오묘하게 될 것이다(吾則六十年, 尙不得歸一, 況汝之初學者乎! 第汝此語, 吾甚喜之, 以爲必有所得, 在此一語. 切勿泛看漫過, 爲妙爲妙)’라고 아들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아들 우에게’에서는 종이를 가득 보내자 추사는 서너 장이면 될 것을 많이 보냈다고, “넌 아직 난경취미를 터득지 못했다(汝尙不解蘭境趣味)”며 “문자향서권기를 가슴에 담아 그리면 많이 그릴 필요가 없으니 종이는 더 이상 보내지 말라”는 질책뿐이었다.

추사는 연이은 10여 년 유배생활과 유배에서 풀려난 뒤 임종까지의 10년, 이 20년의 절망을 예술로 자신을 다스리며 최고의 예술가가 됐다. 그러나 서자 상우는 절망을 승화시키지 못했다. 그 까닭을 문자향서권기에서 찾아야만 된다면 우리는 문자향서권기의 진실에 대해 더 깊이깊이 논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 김세호

김세호 선생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국립타이완대에서 예술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일본 교토대 동양사연구실에서 연수했다. 귀국 후 예술의 전당과 원광대 등의 강단에 섰다. 10여 년 전부터 한글의 변천사와 서예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