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 무엇이든 가능해 보였지만 정말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혼란과 무질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파리와 런던, 두 도시의 분위기를 리얼하게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 우리의 미래도 최고의 시대가 될지 아니면 최악의 시대가 될지 기로에 서 있다. 공중보건 및 의료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수명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마냥 인생 100세 시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유럽과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많이 다르다. 산업사회의 발전으로 농업사회에서는 없던 정년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다.

산업사회에 편입된 근로자들은 당연히 정년 이후의 노후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불안감을 없애주는 것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노후의 경제적 불안을 불식시켜 주는 것이 특히 그러하다.

이런 목적에서 19세기 말부터 연금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연금제도는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정년 이후의 노후 생활에 대한 경제적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도입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의 차이

노후의 경제적 불안을 덜어주는 연금제도에는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이 있다. 3개 연금제도 중 최근 들어 각광받고 있는 것이 퇴직연금이다. 연금수급자와 수령기간은 늘어나는 데 반해 연금보험료를 납부해야 할 젊은 층의 비중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고령화는 국민연금의 재정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결국 고령화가 진전되면 국민연금의 급여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같은 자조노력 수단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개인연금은 개인의 가처분소득에서 스스로 일정액을 납부해야 하는 만큼 개인연금으로 국민연금의 부족분을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다.

퇴직연금은 후불임금인 퇴직급여를 재원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도 노후 소득재원을 착실히 쌓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바로 이런 점이 최근 각국에서 고령화에 대한 방어망으로 퇴직연금을 강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Retirement Pension] 퇴직연금의 올바른 이해
퇴직연금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중에 받을 금액이 사전적으로 정해져 있는 확정급여형(DB형)이다. 다른 하나는 적립금의 운용 실적에 따라 나중에 받을 금액이 달라지는 대신 납부하는 금액이 정해져 있는 확정기여형(DC형)이다.

여기서 금액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는 금액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금액을 결정하는 공식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확정급여형은 적립금 운용에 따른 리스크를 기업이 책임지는 반면에 확정기여형에서는 그 리스크를 가입 근로자가 진다는 점에서도 상이하다.

이런 차이 때문에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은 장단점이 뚜렷이 구분된다. 확정급여형은 나중에 받을 금액을 예상하기 쉽고, 적립금 운용에 따른 리스크를 기업이 책임지기 때문에 근로자 입장에서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립금 운용의 과실을 모두 기업이 가져간다는 점에서는 근로자에게 불리한 요소라 하겠다.

반면 확정기여형은 납입하는 금액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성이 높고, 적립금 운용의 과실을 근로자가 가져간다는 점에서는 근로자에게 유리하다 하겠다.

하지만 운용 실적이 좋지 못할 경우 그 위험 또한 근로자가 떠안는다는 점에서는 근로자에게 불리한 요소라 하겠다. 따라서 어떤 유형의 퇴직연금을 도입할 것인가는 기업과 근로자가 처한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결정해야 한다.

확정기여형 비중이 늘어나는 이유

각국에서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고 상당 기간 동안은 확정급여형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확정기여형의 비중이 올라가고 있다. 그 이유 역시 고령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진국의 확정급여형은 퇴직 시점까지 발생한 퇴직금만 책임지면 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수급권을 획득한 퇴직 근로자가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구조다. 과거에는 근로자가 퇴직 후 10년 정도 연금 생활을 하다 사망했는데,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그 기간이 20년으로 늘어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 마디로 계산 착오가 생겨 연금플랜의 재정에 압박을 주게 된다. 연금플랜의 수지를 보전하기 위해 기업들은 추가 부담금을 납부해야 한다. 확정급여형을 운영하는 기업에 재정적으로 큰 부담을 준다는 의미다.

게다가 연금회계기준의 강화로 연금플랜의 재정 상황이 고스란히 기업의 재무제표에 반영되게 됐다. 기업경영에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됐다는 의미다. 치열한 국제 경쟁에 내몰려 있는 기업이 연금플랜 때문에 경영에 차질을 빚는다면 누가 반기겠는가. 확정기여형으로 바꾸는 수밖에. 이것이 확정급여형은 줄고 확정기여형이 늘어나는 본질적인 이유다.

확정급여형이든 확정기여형이든 퇴직연금은 어디까지나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특히 고령화의 심화로 더 이상 국가에서 노후를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퇴직연금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에서는 퇴직연금을 강화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퇴직연금의 강제화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 중 9개 나라가 퇴직연금을 강제적으로 도입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는 반강제화를 추진하는 국가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일명 자동가입제도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자동가입제도란 가입 대상자인 모든 근로자들은 일단 퇴직연금에 무조건 가입하게 하고, 이후 가입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가입을 희망하는 자에게만 가입을 허용하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지만,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이들 제도는 인간의 비합리적 태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화시대에 노후 준비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팍팍한 현실의 삶과 노후가 먼 미래라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인간은 일단 한번 시작하면 행동을 바꾸기를 꺼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동가입제도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이른바 ‘너지(nudge)’ 전략이다.

그 어느 나라보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고, 노후 준비 수준은 뒤처져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퇴직연금의 올바른 정착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근로자의 수급권과 노후소득 재원의 강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근퇴법 전면 개정안은 정치의 벽에 막혀 3년째 개점휴업 상태다.

우리보다 각종 연금제도가 잘 갖춰져 있고 노후준비도도 높은 선진국들은 퇴직연금을 강화하기 위해 (반)강제화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 퇴직연금 시장은 혼탁하기 그지없다. 집안 식구 밀어주기, 꺾기 행위 등이 만연하고 있다.

가입자에 대한 올바른 서비스는 실종된 느낌마저 든다. 이래서는 퇴직연금이 노후보장 보험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기 어렵다. 퇴직연금이 바로 서는 날 비로소 인생 100세 시대는 최고의 시대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Retirement Pension] 퇴직연금의 올바른 이해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