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퍼 김종건

필묵은 손글씨 디자인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전문회사다. 1999년 필묵을 만들고 지금까지 이끌어온 김종건 대표는 1세대 캘리그래퍼다. 캘리그래피는 영화 포스터에서 제호, TV 프로그램 타이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김 대표는 캘리그래피의 영역을 확장해 순수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Artist]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서울 합정동 필묵 사무실에서 만난 김종건 대표는 캘리그래피를 소개할 때 아직도 ‘손글씨’라는 해설을 꼭 붙인다고 했다. 그만큼 캘리그래피라는 단어는 여전히 생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리그래피는 영화 포스터, 책 표지, 의상 등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한 서예가답게 김 대표는 캘리그래피를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방식의 서예’라고 정의한다. 상업적인 디자인에서 순수예술까지 영역을 확장한 캘리그래피. 한국 캘리그래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가 캘리그래퍼 김종건이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작한 서예

시작은 서예였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학원을 찾은 게 글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어린 김종건에게 서예는 맞춤이었다. 고등학교 서예반을 거쳐 원광대 서예학과에 들어간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서예를 하며 그는 글자가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목적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미 전달의 목적 이외에 글자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면서 서예는 예술로서 존재하기 시작했고, 그 예술로서의 가치는 글자의 의미를 훌쩍 벗어난다.

즉, 서예가 글자의 의미를 간략화하고 순수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글자에만 묶이지 않고 해체로까지 그 경계를 허물며 넓혀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대학에서 서예의 깊이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대학과 군대를 오가는 사이 서예는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적잖은 서예학원이 있었지만, 그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애써 찾으려 해도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서예는 잊혀 갔다.
[Artist]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폰트회사와 서예 잡지사에 잠시 몸을 담았다. 캘리그래피라고 부르는 손글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의 상업 서도를 접한 후였다. 이후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서예로 캘리그래피를 받아들였다.

“캘리그래피라는 단어는 국회도서관에서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런데 아는 분이 ‘왜 영어를 쓰냐’면서 ‘영어 쓰면 유식해 보이냐’고 하시더군요.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말을 놓고 고민하다 ‘손글씨’를 선택하게 된 겁니다.

필묵이라는 회사를 만든 것도 그 뒤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손글씨는 고사하고 캘리그래피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던 때였어요. 디자인회사를 직접 찾아다니며 홍보를 했어요. 2년 정도 홍보를 했더니 애써 찾지 않아도 일이 들어오더군요.”
[Artist]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그 사이 그는 다양한 작업을 했다. 가장 많이 한 게 영화 포스터. <복수의 나의 것>, <챔피언>, <연인> 등 많은 영화의 포스터 작업에 참여했다.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린 글판에 글씨를 쓰기도 했고, 2002년 월드컵 때 유명했던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를 쓰며 월드컵의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제품 광고에도 참여했다. <딤채>, <태양초 고추장>, <가쓰오 우동> 등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손글씨를 넣은 옷과 시계, 쿠션 등도 만들었다.

“캘리그래피를 하면서 홍대 대학원에서 광고디자인을 공부했어요. 대학원에 다니면서 디자인에 대해 좀 더 고민을 하게 됐어요. 그즈음에 캘리그래피가 관심을 받기도 했거든요. 컴퓨터로 찍어내는 폰트는 표정이 없잖아요.

폰트가 모더니즘에 가깝다면 캘리그래피는 표정을 가진,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멋을 살렸다고 할까요. 시류에 맞았다고 볼 수 있죠.”

9년간 가르친 디자이너만 5000여 명

문제는 그 다음이다. 캘리그래피가 인기를 끌자 너도나도 손글씨 전문가를 자청하고 나섰다. 인기에 영합해 디자이너들이 너도나도 붓을 잡았다. 캘리그래퍼가 늘면서 ‘좋지 않은’ 캘리그래피가 양산됐다.

그는 나쁜 글씨의 전형을 몇 가지로 소개했다. 첫째, 쓰는 사람은 읽지만, 보는 사람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휘갈겨 쓴 글씨다. 한글의 글씨를 모르고 휘갈겨 쓴 경우가 대표적인데, ‘ㄷ’과 ㄹ’을 잘못 쓸 때가 많다.

둘째로 전달하려는 의미와 어울리지 않는 글씨다. 차를 마시면 날씬해진다는 뜻을 전달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가는 붓으로 글씨를 써야지 굵은 붓으로 글씨를 쓰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셋째, 유행 서체를 무조건 따라하는 경우다. 서체는 글 쓰는 사람의 개성이 묻어나야 한다. 글 쓰는 이의 개성을 무시한 채 유행하는 서체를 무조건 따라하는 건 한계가 있다.
1.[기다림의 꽃] 2.[손글씨는 s], 2009년 3.[손으로 마음을 써라 01s], 2009년
1.[기다림의 꽃] 2.[손글씨는 s], 2009년 3.[손으로 마음을 써라 01s], 2009년
“가격도 초기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졌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를 써주고 1000만 원을 받았거든요. 독일 월드컵 때는 가격이 10분의 1로 떨어졌어요. 나중에 일본을 대표하는 캘리그래퍼 히라노 소켄을 만났는데 일본의 상황도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캘리그래피가 양산되면서 시장이 혼탁해진 거죠.”

아카데미를 운영한 것은 상업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좋지 않은’ 손글씨를 바로잡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난 9년간 필묵아카데미를 거쳐 간 디자이너만 5000여 명을 헤아린다. 기업체 강의도 나가는데 처음 붓을 쥐어주면 “또 서예야” 하다가도 다들 재밌어 한다고.

한글 전용 노트 개발해 한글의 아름다움 되찾을 것

김 대표는 디자인적인 글쓰기가 성공을 거두자 한발 더 나갔다. 손글씨를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서예로 돌아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먹이 가진 70~80가지의 깊이감도 좋지만, 컬러의 시대에는 표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색도 쓰고, 필기구도 모필을 포함해 다양한 것을 시험했다.

다양한 시험을 통해 탄생한 작품을 모아 그는 지난 2009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글씨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의 손을 거친 글자들은 점차 문자로서는 흔적만 남고 작가의 감정을 담은 회화로 거듭났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문자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와 그 대상에 대한 체험의 미학을 통해 다소 표현주의적 양식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서예를 고수하는 이들 가운데서는 그의 작업을 보고 “그게 뭐냐”고 따질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서예가 지금처럼 고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게 얼마나 되냐”고 반문한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서예는 하급관리의 몫이었다. 윗사람이 글을 지으면 그걸 받아 적은 게 서예의 시작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와서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서예의 대접이 달라진 것처럼 현대의 서예도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필기구의 영향으로 한글이 본모습을 많이 잃었어요. 우리가 붓 대신 볼펜을 잡은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볼펜도 처음 0.7mm에서 0.5mm로, 다시 0.2mm로 점점 가늘어지고 있거든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노트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트에 새겨진 가로줄이 점점 촘촘해지거든요. 거기에 맞추다 보니 펜이 가늘어진 거죠. 그런데 줄이 쳐진 노트는 실상 알파벳에 맞게 개발된 겁니다.

따라서 필기구만 바꿔도 훨씬 다양하고 아름다운 손글씨가 탄생할 거예요. 현재는 작업을 하면서 한글에 맞는 노트를 개발하는 중이에요. 앞으로 10년을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걸 보급하는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