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와 퇴직연금연구소를 맡고 있는 강창희 소장은 투자교육과 은퇴설계 전문가다. 1974년 증권거래소에 입사한 후 대우증권 리서치센터본부장, 현대투신운용 대표, 굿모닝투신운용 대표 등을 역임한 강 소장은 38년간 증권업계에서 뼈가 굵은 한국 증권계의 산증인이다. 증권가에 몸담으며 그가 체득한 인생 경영법을 소개한다.
[Dinner with Master]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
지난해 8월, 투자교육 강의 2000회를 돌파하셨습니다. 국내에 투자교육을 전파한 장본인인데, 투자교육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신 건가요.

“대우증권 도쿄사무소장으로 있을 때 외국 투자가들에게 한국 주식을 중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외국 투자가들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을까가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다 1998년부터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게 됐습니다. 자산운용사의 CEO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펀드비즈니스가 자산운용사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투자자가 원칙을 지키도록 설득하지 않으면 성공적인 투자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자산운용사가 아무리 장기투자를 부르짖어도 투자자가 몇 개월 만에 샀다 팔았다를 반복하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죠.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업무시간의 절반 정도를 투자교육에 할애했고, CEO에서 물러나면서는 본격적으로 투자교육을 하게 된 거죠. 다행히 투자교육이 제 적성에 맞았고, 비슷한 시기에 저와 같은 일을 하는 일본의 지인을 보면서 라이프워크로 투자교육을 선택하게 된 겁니다.”
[Dinner with Master]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
8년 넘게 투자교육을 해오셨는데, 최근 강의 중 인상적인 강의가 있었다면 소개를 부탁합니다.

“지난해 말에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부부를 대상으로 강연을 했어요. 그런 강연이 좋습니다. 부부가 함께 들으니까요. 은퇴설계는 부부가 함께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이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입니다. 그럴 때면 ‘당신들은 권한도 없으니까 내 동영상 강의를 아내들에게 보여주라’고 말합니다.(웃음)”

유독 강의 효과가 떨어지는 곳도 있을 텐데요.

“투자설명회 같은 데죠. 그런 데 오는 분들은 ‘뭘 사면 오르는지’가 주요 관심사거든요. 그런 데 가면 투자 원칙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딸 없는 사람들은 딸부터 낳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나이 들면 평수가 큰 아파트부터 처분하라는 식으로 강연을 하죠.”

딸을 낳으라니요.

“네. 지금은 100세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때입니다. 장수에 따르는 리스크를 줄일 필요가 있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딸을 낳으라고 하는 겁니다. 일본을 보면 독거노인이 사후 2~3일이 지나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부분이 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딸을 낳으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은퇴설계에 집중하시는 듯합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 관심사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보통의 직장인들이 어떻게 생애 설계를 하고, 자산운용 설계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 100세 시대의 생애 설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됐고, 최근 들어서는 베이비붐세대의 은퇴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들은 자산 중 부동산 편중이 심각하다고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강소장님은 어떻게 자산을 구성하고 있고, 언제부터 자산관리에 신경을 쓰셨습니까.

“저는 50대 후반에서 60대가 되면,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볼 때 부동산과 금융의 자산 비율이 50 대 50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부동산과 금융의 자산 비율이 평균 4 대 1인데, 제 경우는 이보다는 양호하지만 여전히 부동산 비중이 높습니다. 직업적인 영향도 있지만 저는 금융자산에 관심이 많습니다. 금융자산은 100에서 자신의 나이를 뺀 비율만큼을 공격적인 상품인 주식이나 주식형 펀드에 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50% 정도를 주식형 펀드에 넣고 나머지는 채권형,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예금 등에 분산하고 있습니다. 제 나이를 생각하면 주식형 펀드의 비중이 40%가 적당하겠지만, 아직은 현역에서 일하고 있고, 또 명색이 투자전문가라서 이 정도 비율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적으로 이런 원칙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자산운용사의 CEO를 맡고 있을 때부터였습니다.”

평소에 ‘평생 현역’을 강조하시는 걸로 압니다. 금융권에서는 강 소장님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듯싶습니다. 롱런의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제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커리어 관리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부서에 가고 싶다면 2~3년 전부터 준비를 해서 결국은 그 부서에 갔습니다. 이를 위해 관련 자료를 만들거나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기고를 해서 주위에 관심 분야와 희망을 알리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때 미리 사둔 책이나 신문 스크랩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신문 스크랩은 오랫동안 하셨죠.

“대우증권 대리 때부터 스크랩을 했으니까 오래됐죠. 주니어 시절에는 원고를 쓰고 싶어도 청탁이 안 들어오잖아요. 그때 먼저 손을 든 거죠. ‘지금 이런 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 내가 가진 자료 중에 이런 게 있다’는 식이죠. 손을 드는 것은 자유지만 일단 쓰기로 하면 그 다음에는 의무로 바뀝니다. 마감 직전까지 머리를 싸맬 때는 ‘내가 왜 이런 약속을 했을까’ 하고 후회한 적도 많습니다.”

스스로 채찍질을 한 셈이군요.

“천성이 게을러서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편이 못 됩니다. 재벌의 아들도, 천재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무언가를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때는 피할 수 없는 환경에 스스로를 속박해서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원고 청탁을 절대 거절하지 않으신다면서요.

“그럼요. 단, 원고를 쓸 때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전문 용어는 중졸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게 쓰고, 둘째 예화나 사례를 많이 드는 거죠. 그래야 이해가 쉬우니까요. 주말에 주로 그런 사례들을 많이 찾습니다.”

신문 스크랩 말고 다른 취미는 없습니까.

“CEO를 할 때는 골프도 쳤는데, 자산운용사를 나오면서 그만뒀습니다. 골프를 그만뒀더니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여러 모로 좋았어요. 그 외에 특별한 취미는 없고, 토요일 사무실에서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즐깁니다.

아침에 운동하고 10시쯤 사무실로 가서 책도 보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있기도 합니다. 집에 없으니까 집사람도 좋아하고요. 오후 7시쯤 귀가해서 저녁 먹으면서 집사람하고 막걸리 한 병을 나눠 마십니다. 제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점심도 혼자 드시나요.

“그럼요. 나이 들면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퇴직 후에는 혼자 점심 먹고 혼자 즐기는 데 익숙해야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오래된 얘기 같습니다만, 증권맨이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대학에서 농업경제를 전공했는데 그때는 대학교수가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취직을 해야 했습니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증권거래소 신입직원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취직이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기 때문에 안심이 됐죠. 당시 정부가 증권시장 육성정책을 발표한 직후여서 앞으로 유망한 분야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이후 대우증권에 들어가셨죠. 당시 증권사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1989년 초까지 대우증권 도쿄사무소장을 하다가 본사 국제영업부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귀국해 보니 국제본부에 근무하는 후배들이 학벌로 보나 업무수행 능력으로 보나 그야말로 초일류 인재들이었습니다.

부장인 제가 가장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대우국제포럼’이라는 이름으로 1년에 한 번씩 모이고 있습니다만, 당시 함께 근무한 많은 분들이 국내외 금융기관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국제부 출신으로 국내 업계에서 CEO를 맡고 있는 사람만 꼽아 봐도 황건호 금융투자협회장, 손복조 토러스증권 사장, 김석중 현대자산운용 사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최홍 ING자산운용 사장 등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너무 잘나도 부장 입장에서는 힘들지 않았나요.

“실력이 달리면 잘하는 직원한테 맡기면 됩니다. 직장생활 38년을 통해 얻은 교훈입니다. 상사가 실력이 달리면 직원들 일에 방해만 안 돼도 중간은 갑니다.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을 때 오히려 문제가 되죠.”

대우증권에서 나와서 현대투신운용, 굿모닝투신운용 대표를 역임하셨습니다. 실제 투자도 하셨을 텐데, 성공담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30대까지는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협의의 자산투자’보다는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인적자본투자’에 열중했습니다. 40대 들어서 ‘내 집 마련’에 돈을 썼기 때문에 실제로 금융에 투자를 한 것은 50대 들어서였습니다.

성격이 보수적인 데다가 금융자산 투자를 시작할 무렵에는 투자의 원칙을 제가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칙에서 어긋나는 투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성공이나 실패 경험은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성공담을 말씀 드린다면 1989년에서 1990년 무렵 우리사주로 대우증권주식을 제법 갖고 있었어요. 당시 5만 원쯤 했는데 10만 원까지 갈 거라는 장밋빛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택 마련에 돈이 필요해서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팔았습니다. 그게 결과적으로는 피크에 판 셈이 됐습니다. 그 후 외환위기 때는 주가가 2000원 정도까지 하락했으니까요.”

실패하신 적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개인적인 투자실패 경험은 없고 1996~97년 무렵 개인투자자들이 러시아국채 펀드에 투자했다가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원금의 대부분을 날리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자니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러시아 국채니까 부도날 위험도 없고 수익률은 당시의 정기예금 금리보다 2~3%포인트 높으니 얼마나 매력적인 투자상품이냐’는 논리로 펀드를 팔았는데 결과적으로 부도가 난 겁니다. 당시 많은 투자자들이 몰려와 기물을 부수고 난동을 부리면서 항의를 하곤 했습니다.

어떤 여성 투자자는 가사 도우미를 하며 모은 돈으로 신체장애우인 딸과 살고 있었는데 원금을 물어내지 않으면 자살을 하겠다고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투자교육 활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운용사 CEO를 하다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으로 부임하셨는데, 망설이지는 않으셨는지요.

“무슨 사명감 때문에 대단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제 나름대로 냉정한 계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CEO를 두 번 맡아보니까 재벌계나 대형 금융그룹 계열 금융회사의 CEO를 맡아 성공시킨다는 것은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투자교육연구소장의 일은 우선 제 적성에도 맞고, 또 제 힘으로 어느 정도 성공시킬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무슨 사명감을 갖고 투자교육 활동을 하는 것처럼 떠들다가 그럴듯한 자리가 생기니까 그 자리로 옮겨가 버린다면, 앞에서는 축하한다고 하지만 돌아서면 ‘웃기는 친구’라고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해타산으로 말씀 드린다면 ‘강창희’라는 브랜드 관리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의 직책을 맡게 된 경위는 어땠습니까.

“2002년 초에 제가 박현주 회장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펀드시장에서 투자교육이 왜 필요한가, 미래에셋이 투자교육연구소를 만들 경우 어떤 메리트가 있겠는가, 저 자신은 그동안 어떻게 투자교육 활동을 해왔는가를 정리해 박 회장님에게 서면으로 제안을 했는데 단 한마디 질문도 없이 ‘OK’를 해주셨습니다.”

박 회장과는 이전에 친분이 있으셨나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은 없었습니다. 1998년 박 회장님이 투자자문사 창업을 하고 저는 현대투신운용 대표로 있을 때 바이코리아펀드 펀드매니저로 저와 같이 일하고 있던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의 소개로 저녁식사를 한번 같이했던 인연 정도입니다.”

친분이 두터웠던 것도 아닌데, 선뜻 OK 사인을 주시던가요.

“만나기 전에 정리한 걸 e메일로 먼저 보냈죠. 만난 자리에서는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고선 경비, 조직 등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죠. 살면서 저는 편지를 잘 활용하는 편입니다. 얼마 전에는 딸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손자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낸다기에 A4 2장짜리 장문의 편지를 써서 설득 했습니다. 편지가 요긴할 때가 많아요.”

증권맨으로 40여 년을 돌아보면, 주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울러 투자자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주식투자는 한 기업의 꿈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현 가능한 훌륭한 꿈을 가진 한 기업의 주식이 그 기업 안팎의 사정 때문에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그 기업을 냉정하게 분석해 투자를 해놓고 제 값을 받을 때까지 적어도 5년 정도는 기다린다는 각오로 투자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아무리 냉정하게 분석을 해도 100%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몇 개 종목에 분산투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은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공적인 은퇴를 위해 선결 조건은 무엇인지도 함께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은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은퇴란 ‘일에서 손을 떼고 한가롭게 산다’는 뜻인데, 요즘 같은 인생 100세 시대에 하루 이틀도 아니고 30년 넘는 기간을 어떻게 한가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

퇴직이라면 모를까 은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퇴직 후 30~40년 넘는 기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건강, 노후자금과 더불어 자신의 형편에 맞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재취업으로 수입을 얻는 일일 수도 있고, 사회공헌 활동일 수도, 자기실현 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 번의 정년을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각 직장에서 정하고 있는 고용정년, 둘째는 고용정년 이후에도 자기 형편에 맞는 일을 하는 일의 정년,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이 불러가는 인생정년입니다. 이 세 번의 정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준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저는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와인&마리아주
[Dinner with Master]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
[Dinner with Master]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
[Dinner with Master]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
[Dinner with Master] "가장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
장소 와인나라 아카데미(02-598-9870)·와인 아영FBC, 대유와인, 루뱅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