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Gauguin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와의 갈등, 그리고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1874~1965)의 소설 <달과 6펜스>다.

고갱은 미술사의 변방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입지와 싸웠고, 결국 지상의 낙원이자 동시에 문명의 오지를 선택해 예술의 승부수를 띄웠다. 자신은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지만 원시자연의 삶을 그린 그의 작품은 아이러니하게 문명세계를 빛나게 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 아베마리아>, 1891년, 캔버스에 유화, 113.7×87.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아 오라나 마리아: 아베마리아>, 1891년, 캔버스에 유화, 113.7×87.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1891년, 캔버스에 유화, 113.7×87.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세잔의 영향

고갱의 그림은 열대의 강렬한 에너지가 넘친다. 뜨겁게 내리쬐는 열대의 태양빛이 만드는 짙은 그늘의 원색 대비, 타히티 원주민의 이국적 인물과 풍경, 야자수·꽃·밀림, 바나나와 망고 같은 열대과일, 그리고 이아 오라나 마리아(iA ORANA MARiA : 아베마리아)와 같은 폴리네시아어로 쓴 제목들.

모두 고갱이 만들어낸 격정의 창조물이다.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보이는 강렬한 붓질과 두꺼운 물감이 고흐만의 개성이라면, 고갱의 그림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분석적이고 구성적인 표현이다. 고흐의 그림 스승이 일본 목판화라면 고갱의 진정한 스승은 세잔이다. 고갱의 그림 속에는 세잔의 붓질과 색채, 그리고 분석적인 면 분할이 전 작품에 걸쳐 함께한다.
팔레트를 들고 있는 폴 고갱, 1888년경,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인 듯 온갖 멋을 다 부렸다.
팔레트를 들고 있는 폴 고갱, 1888년경,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인 듯 온갖 멋을 다 부렸다.
고갱은 젊어서 주식중개인으로 잘나가던 시절에 구입한 세잔의 <나이프가 있는 정물>을 각별하게 소중히 여겼다.

훗날 부인 메테 소피가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남편이 수집한 그림을 할 수 없이 팔아 치울 때도 세잔의 그림만은 아껴두고 싶어 했을 만큼 고갱은 세잔의 화풍을 사랑했다.

<세잔의 정물화 앞에 앉은 여인의 초상> 같은 초기 걸작은 세잔풍의 터치뿐만 아니라 세잔의 인물화 포즈까지 똑같이 배치했다.

고갱의 세잔 사랑은 평생 지속됐는데, 타히티에서 그린 <식사>에서도 정물의 배치와 인물 표현을 완연한 세잔풍으로 완성했다. 고갱은 아마추어로 시작한 화가가 아니라 천부적 태생의 예술가였다.

<달과 6펜스>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화, 73×91cm,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화, 73×91cm,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 1888년, 캔버스에 유화, 73×91cm,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달과 6펜스>는 고갱을 모델로 쓴 소설이다. 영국 런던의 증권회사를 다니며 잘나가던 중년남자가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프랑스 파리로 가서는 화가가 되더니, 또다시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 남은 생애를 원주민과 남태평양의 원시자연과 문둥병으로 마감하기까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은 고독한 예술가의 초상을 소설로 그리고 있다.
<세잔의 정물화 앞에 앉은 여인의 초상>, 1890년, 캔버스에 유화, 65×55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세잔의 정물화 앞에 앉은 여인의 초상>, 1890년, 캔버스에 유화, 65×55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 1890년, 캔버스에 유화, 65×55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여기에서의 ‘달’은 만져볼 수 없는 비범한 것, 즉 예술에 대한 주인공의 광적인 열의를 나타낸 것이고, ‘6펜스’는 주인공이 과감하게 던져버린 흔하고 값어치 없는 세속적인 욕망이다.

달빛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예술가의 길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모함이다.

달빛세계는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똥별의 찬란한 순간의 자유, 짧지만 그래서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나타낸다. 혜성 같은 자유는 예술가의 영원한 로망이다. 고갱의 타히티행은 달빛보다 백 배, 천 배, 아니 억만 배 강한 혜성의 빛이었다.
<식사>, 1891년, 캔버스에 유화, 73×9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식사>, 1891년, 캔버스에 유화, 73×9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1891년, 캔버스에 유화, 73×9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파리 시절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태어난 고갱은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페루로 이사했다. 페루는 일찍이 스페인 귀족으로 정복자를 따라 페루에 정착했던 외할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가진 아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루이 나폴레옹의 탄압을 염려해 부친의 고향으로 망명했다.

고갱의 아버지는 불행히도 마젤란해협을 통과하는 도중 심장병으로 배에서 내린 직후 사망한다. 어린 두 아이와 혼자 남은 어머니는 페루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부유한 인척의 배려로 서로 다른 혈통과 언어를 지닌 사람들에 둘러싸여 낯설고 사치스러운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1855년 가족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지만 유년기를 이국에서 누린 행복은 성장기의 동경으로 이어졌고, 어른이 돼서도 고갱은 마음속에 언제나 대양의 항해를 그리워했다.
<에 헤에레 라 오이?: 어디를 가니?>, 1893년, 캔버스에 유화, 91×7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주 미술관
<에 헤에레 라 오이?: 어디를 가니?>, 1893년, 캔버스에 유화, 91×7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주 미술관
, 1893년, 캔버스에 유화, 91×7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주 미술관">
1873년 11월 25일 고갱은 미모와 지성을 갖춘 덴마크 여인 메테 소피와 파리에서 결혼한다. 장차 항해사처럼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남자와 가정교사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평범한 여자의 결혼이었다.

주식 거래로 많은 돈을 벌어 파리 상류사회에 진입한 고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맞게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취미로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갱은 자신이 예술가임을 자각하는 순간 가장이자 아버지의 삶을 저버렸다. 비록 고갱과 소피가 이혼은 안 했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1822년 11월 파리 주식시장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고갱에게 주식중개인과 화가로서의 이중생활을 마감하게 한다. 고갱은 완전히 자유로운 일탈의 삶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가 항상 동경해온 자유분방한 생활은 돌봐야 할 가족과 다섯 아이라는 뜻밖의 장애물에 부딪힌다.

세상에서 낙오돼 도시를 떠도는 남자와 가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은 양립할 수 없는 법, 부인과 자녀는 덴마크로 보내고 자신은 ‘열대의 미개지’를 가슴에 품고 영원한 탈출을 마음먹는다. 고갱은 지체 없이 돈벌이를 위해 파나마로 갔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서둘러 귀국했다. 그때가 1887년, 고갱의 열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문명 도피였을지 모르나 남미에서 경험한 유년시절의 행복을 재발견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더 이상은: 오 타이티>, 1897년, 캔버스에 유화, 59.5×116cm,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미술관
<더 이상은: 오 타이티>, 1897년, 캔버스에 유화, 59.5×116cm,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미술관
, 1897년, 캔버스에 유화, 59.5×116cm,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미술관">1888년 10월, 프랑스 남부 아를(Arles)에서 고흐가 구상했던 고갱과의 화가공동체의 꿈은 애초에 그림의 경향이 서로 다른 유전인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고흐는 고갱을 높이 평가했다.

“(고갱은) 모든 것이 섬세하고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야.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는 그림을 못 팔아서 고통스러워해. 다른 진정한 창작가들처럼 말이야.” 하지만 고갱은 냉소적이었다.

“그 친구(고흐)는 정말 낭만적이야. 하지만 나는 원시미술이 좋아. 색칠할 때 그는 물감을 두껍게 칠해서 얻는 우연한 효과를 즐기지만, 나는 그런 어수선한 방식은 질색이야.”

두 사람은 태생과 사고, 성격이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결국 두 달 만에 맞은 두 사람의 파국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고갱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 아를을 떠나는 영원한 결별로 이어졌다. 고갱은 한걸음 더 나아가 머나먼 타히티로 떠나는 씨앗을 잉태했다.

“예술가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길이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리라. 정열은 생명의 원천이고, 더 이상 정열이 솟아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길로 떠나자 그 길은 야생의 시를 간직하고 있다.” 결국 고갱은 남태평양의 원초적인 야생을 꿈꾸며 자신의 처지를 다독였다. 1891년 4월 4일 고갱은 파리를 떠나는 밤기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타히티였다.

진정한 자유인
<망고꽃을 든 두 타이티 여인>, 1899년, 캔버스에 유화, 94×7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망고꽃을 든 두 타이티 여인>, 1899년, 캔버스에 유화, 94×7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1899년, 캔버스에 유화, 94×7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에 있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에서 가장 큰 섬이다. 1891년 6월 28일 타히티에 도착한 고갱은 화가이기 이전에 식민주의자로서, 프랑스 교육부의 훈령을 가지고 온 정부특사로서, 총독에게 전해줄 소개장도 가지고 항구에서 공식적인 환영행사를 받으며 입국했다.

고갱이 타히티를 간 까닭은 무엇일까. 공식적인 그의 임무는 ‘타히티의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고 그리기’였다. 하지만 본래의 목적은 이국적인 경험과 원시자연 그림으로 파리화단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그곳에서 그린 그림을 팔아 경제적 궁핍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처음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했을 때, 고갱은 수도 파페에테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밀림지대 마타이에아에 작은 대나무 오두막집을 짓고 거처를 잡았다. 폴리네시아의 미소녀 테후라가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 돼 그의 곁을 지켰다.

그가 바라던 예술적인 삶의 시작은 더디게 실현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파리 본국으로 귀국한 후, 우여곡절 끝에 1895년 다시 타히티에 입국해 많은 사건과 경험으로 날카롭던 성질이 무뎌지자 이제 그는 원시자연의 내면의 목소리와 진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고갱의 작품들. 1879년 파리에서 조각을 배우면서 제작한 아들 <에밀 고갱>의 대리석 흉상도 눈에 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고갱의 작품들. 1879년 파리에서 조각을 배우면서 제작한 아들 <에밀 고갱>의 대리석 흉상도 눈에 띈다.
의 대리석 흉상도 눈에 띈다.">
고갱은 그동안의 서양 중심주의 회화를 벗어던지고 타히티의 순수한 삶을 그리기 시작한다. 예술가들에게 단순한 삶과 본능적인 자유는 빵과 물이다. 타히티에서 마지막 8년간 고갱의 삶은 단순하고 자유로웠지만 문명에 대한 반항, 가난과 외로움, 마르세유 항구를 떠나면서 가지고온 제국의 유산 매독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자살을 생각하면서 그린 그의 그림은 생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렸지만 결국 1903년 5월 8일 55세의 길지 않은 생을 타히티에서 쓸쓸히 마감한다. 소설 속 주인공같이 고갱은 혜성같이 자신의 몸을 원시의 자연 속에서 불태우며 달빛처럼 살다간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고갱이 타히티로 간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