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라는 옛말이 있다. 여기,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부모들의 이야기가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보다가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인물들을 발견했던 그림들은 이야기를 알고 보면 그 슬픔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때로 그림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람들의 삶을 전달하곤 한다.
<조지 클라이브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인디언 하녀> / <예수의 탄생>
<조지 클라이브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인디언 하녀> / <예수의 탄생>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aynolds), <조지 클라이브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인디언 하녀>(George Clive and His Family with an Indian Servant), 1765~66년, 베를린 회화갤러리 소장

그림은 언뜻 봤을 때 화려한 옷을 입은 어느 귀족가문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멋진 아빠와 우아한 엄마, 그리고 가운데에는 깜찍한 아이와 아이 곁에 시중을 들고 있는 거무스름한 피부의 하녀가 있다.

비록 집이 아니라 스튜디오지만 화려한 장식의 옷차림과 인물들의 기품 있는 태도만 봐도 부유한 사람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볼수록 인물들의 표정에서 뭔가 여느 초상화들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궁금해서 찾아본 이 초상화 이야기에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그림 속 조지 클라이브경은 영국의 귀족이었다. 동인도회사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1763년 시드니 볼턴과 결혼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764년에 귀여운 딸을 얻게 된다. 바로 그림 속 여자아이다.

언뜻 보면 길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어 아이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아이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2~3세에 불과했다. 아이는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고 이 그림은 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 초상화가 되고 말았다.

아이는 병약했던 것 같다. 그림 속에서 아이의 겨드랑이와 턱을 받쳐 들고 있는 어머니의 손길이나 무릎을 꿇고 아이를 잡고 있는 하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아이의 건강 상태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인 클라이브경의 눈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기품과 함께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얽혀있는 듯하다. 그녀는 곧 자신의 품에서 이 귀여운 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예감했을까.

그림의 왼쪽 창문 너머 부분은 다시 그려진 것으로, 창밖의 풍경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붉은 노을이 가려진다. 어딘지 쓸쓸한 느낌, 마치 묘지와도 같은 풍경이다. 화가는 미완성이었던 이 그림을 어린 여자아이의 묘비처럼 남기고자 그림에 변화를 주었던 것 같다.

어머니인 볼턴의 얼굴은 완성됐지만 X선 감정 결과 그녀의 옷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아이가 죽고 나서 이 초상화는 완성될 필요가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그림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아이를 지탱해주고 있는 하녀다. 흑단같이 검은 머리에 에스닉한 장신구를 걸친 하녀의 얼굴은 어둡다. 그녀 역시 어린 주인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애정 어린 손길로 조심스럽게 아이를 지탱해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언뜻 무표정해 보이나 마치 주술을 행하는 듯 엄숙해 보이기도 하다. 아이의 죽음은 이 집안에 남겨진 어른들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슬픔으로 남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조슈아 레이놀즈는 영국 미술계에서 토머스 게인즈버러와 나란히 손꼽히는 대가다. 당시 영국 초상화는 반다이크 스타일이 대세였으나, 레이놀즈는 이탈리아 화가들과 루벤스 등의 화풍을 연구해 영국 초상화계의 새로운 스타일을 이끌어냈다.

화사한 색채와 우아한 명암의 대비, 장중한 화면 구성으로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레이놀즈는 이 그림이 완성되고 몇 년 후 영국 왕실 아카데미의 창립과 함께 초대회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아 궁정화가가 됐으며 아카데미에서 <미술론> 강의를 맡았다. 당시로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많은 공헌을 했던 것이다.

폴 고갱(Paul Gauguin), <예수의 탄생>(The Birth of Christ), 1896년, 뮌헨 노이에피나코텍 소장

그림 속 노란색 침대시트 위에 한 여인이 누워있다. 타히티 섬의 원주민인 여인은 이제 막 출산을 마치고 힘겨운 모습이다. 그녀의 곁에는 아이를 받아든 다른 여인이 있는데, 얼굴이 무척 어둡다. 사실 그녀는 저승사자다. 그녀가 받아든 갓난아기가 죽은 것이다.

폴 고갱이 고흐와 불화를 겪다 결별하고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그곳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했고 파후라라는 원주민 여인과 함께 살았다. 그림 속에 누워있는 여인이 바로 파후라로 그녀는 고갱의 아이를 낳았다.

그림의 제목이 <예수의 탄생>인 것은 고갱이 자신의 여인과 아이를 모델로 예수의 탄생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원주민 성모라니 언뜻 생각해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모 마리아는 백인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보기 드물게 살결이 까만 원주민 아이로 그려져 있다. 산모와 아기의 머리에는 각각 후광이 그려져 있고 집안에 그려진 소들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를 떠오르게 한다.

남루한 집안의 풍경이 아기의 죽음을 맞아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여인은 모든 의욕을 잃은 듯 눈을 감고 힘없이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데 오직 그녀의 밑에 깔려있는 노란 침대시트만이 따뜻하고 화사해 보인다.

이는 화가이자 여인의 남편인 고갱의 배려로 볼 수 있다. 갓난아기를 잃은 그녀를 위로하고픈 남편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부유한 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 그리고 슬픔의 무게를 따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저 그 슬픔을 가슴에 묻고 서로를 다독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이를 먼저 보내고 살아남은 부모의 몫이다.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난 지금 다시 한 번 그림을 보자. 처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인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리사랑으로 표현되는 부모의 사랑은 비로소 내 자신이 부모가 돼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고 했던가.

어느새 나도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되고 나니 철없던 시절엔 생각하지 못했던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식을 잃는다는 큰 아픔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작은 위로를 전한다.

강지연 _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