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금주 신토불이 제주 대표

언제부턴가 최고경영자(CEO)들 사이에 ‘양금주를 모르면 CEO가 아니다’라는 말들이 오간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이래저래 챙겨야 할 VIP가 많아지는데, 그들을 위한 선물을 고민할 때 가장 많이 찾는 사람이 ‘양금주’ 씨라는 것.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로라하는 CEO들을 단골로 만들고 기부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는 양금주 신토불이 제주 대표를 찾아가 선물과 ‘나눔’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어봤다.
[Noblesse Oblige] 선물사업도 나눔도 ‘명품’ 급 행복인 이유
"제게 있어 일은 ‘축제’이자 ‘행복’이에요. 아홉 살 때부터 학교 수업을 빼먹으면서 부모님 장사를 도울 때도 마냥 즐거웠으니까요. 지금 하는 비즈니스도 사실은 제가 행복하려고 시작한 것인지도 몰라요.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일을 대신해 주는 사업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웃음)”

‘신토불이 제주(www.sintobury.co.kr)’의 양금주 대표에게 일은 축제와 동급이다. 신토불이 제주는 제주산 옥돔, 전복, 은갈치 등 제주도 수산물 선물용품 컨설팅과 공급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5남매 중 둘째인 양 대표는 제주 우도에서 조부(祖父) 때부터 가업으로 내려오던 수출 중심의 수산물 총판업(도매)을 16년 전 고객을 직접 만나는 소매업으로 전환시켰다.

장남인 오빠를 대신해 가업을 물려받아 ‘VIP를 위한 명품 수산물 선물용품’이라는 틈새시장을 공략, 우후죽순 생겨나는 수산물 도매업자들과의 경쟁을 뒤로 하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1993년 제주시 연동에 수산물 전문 선물 숍으로 문을 열며 출발한 후 현재 대기업들을 포함해 고객 어카운트가 200여 개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오롯이 ‘행복’하려 시작한 사업 ‘선물’

[Noblesse Oblige] 선물사업도 나눔도 ‘명품’ 급 행복인 이유
선물이란 것이 연중무휴로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니 만큼 많이 바쁘겠다 싶다. 하지만 그는 두 차례 ‘반짝’하고 바쁘다며 웃었다. 설과 추석 때가 이른바 ‘시즌’인 셈. 오래전 경기도 일산으로 거처를 옮겨온 뒤로는 시즌 때면 한 달 이상 고향인 제주도로 ‘특수(特需) 출장’을 간다.

바쁠 땐 30~40명 가량이 매달려야 주문량을 소화할 수 있는 만큼, 한 달 내내 호텔에 투숙하며 잘 자지도, 먹지도 않는 그 자신을 포함해 성수기 때는 집안 일가친척이 손을 거든다.

제주 옥돔, 전복, 은갈치 등의 선물은 기본 20만~25만 원 선에서 시작하지만 VVIP를 위한 특별한 선물은 한 상자에 100만 원에 달할 때도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걸려온 고객의 전화를 받았다. 부모님 생신을 맞아 보낸 선물이 잘 도착했는지 묻는 전화였다.

“모 은행 상하이 지점장으로 나가신 분인데 엊그저께 부모님 선물을 부탁해 왔더라고요. 고객 중에 제일 오래된 분은 12년째 거래하고 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회장님이세요. 처음엔 어느 고객께서 그 회장님께 선물을 보내달라고 했었죠.

그런데 회장님께서 선물을 받고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 왔더라고요. ‘양금주 씨 되시냐’고 물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했더니 선물 상자에 들어있던 제 편지를 보고 감동하셨나 보더라고요. ‘이 정도면 믿을 만하겠다’고 하시면서 조금씩 주문을 늘려 오신 것이 지금은 몇천 상자로 늘어났죠.(웃음)”

신토불이 제주의 고객 가운데는 이 같은 사연으로 인연을 맺은 고객이 허다하다. 한 번 고객이 되면 보통은 10년 이상 ‘장수고객’이 되는 경우가 많단다. ‘영업 비밀’을 물었더니 그는 거리낌 없이 밝혔다. 첫째는 수산물의 신선도 유지요, 둘째는 정성들여 직접 손으로 쓴 편지라는 것. 고객의 입장이 돼 철저하게 고객의 마음을 읽었던 세심한 배려가 주효했다.

“지금은 제주시에 계신 아버지가 도와주고 계시지만 최우선은 좋은 물건을 골라야 한다는 겁니다. 물 좋은 최상급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아요. 그 다음은 좋은 물건을 가장 신선하게 공급할 수 있는 배송인데, 과감하게 퀵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많아요. 그럴 땐 퀵 배송료만 건당 5만 원에 달할 때도 있어요.(웃음)

손해를 볼지언정 제가 꼭 지키는 원칙이에요. 또 하나는 고급스러운 포장인데, 고객의 니즈에 맞춰 그때그때 주문, 제작하고 있어요. 마지막은 제가 반드시 상자 속에 넣는 편지예요. 선물을 보내는 기업의 가치와 감사의 마음을 제3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려고 애쓰죠. 그 편지를 보고 반찬을 열두 가지나 해서 일산 집까지 직접 가져오신 고객도 계세요.”

제주 우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배운 것

[Noblesse Oblige] 선물사업도 나눔도 ‘명품’ 급 행복인 이유
양 대표의 사업가 기질은 ‘큰손(巨商)’이었던 친정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조부께서는 우도에 있던 12개 마을의 어부와 해녀들이 잡아들인 각종 수산물 중 최상급 상품을 일본 대도시로 수출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제주 우도의 수산물 총판 격이다.

그 사업을 이어받은 것은 양 대표의 아버지였으나 사실 사업을 궤도에 올린 주인공은 어머니였다. 보통 사람보다 ‘통’이 컸던 어머니를 양 대표는 맨손으로도 장사로 일어설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스케일이 엄청나게 크신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정계 진출에 뜻을 두는 바람에 사업은 뒷전이셨고, 어머니가 그야말로 ‘큰손’이셨죠. 중학교 다닐 때까진 집에 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정도로 잘살았어요.

초등학교 땐 거의 매일 아침 저희 집 마당에서 40~50여 명의 어른들이 밥을 먹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께서 이런저런 선거에 많이 출마하신 탓에 집에 사람들이 북적였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선거에 나가신 게 1980년이었는데, 그때 낙선한 뒤 빚 청산하느라 집까지 팔고 변두리 초가집으로 옮겨가면서 완전히 바닥을 쳤어요. 그때도 집안을 일으킨 분이 어머니였죠. 망하고 나서도 신용이 좋았는지 어부들이 외상으로 물건을 대주는 덕분에 서서히 가세를 회복할 수 있었죠.”

어머니의 ‘기본기’를 이어 받아서일까. 양 대표 역시 신토불이 제주를 경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신용’이다. 요즘 세상에 돈 받기 전에 물건부터 보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그는 물건부터 보낸다.

결제는 형편 될 때 혹은 시간 될 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고객 클레임도 거의 없지만, 간혹 전화가 오면 그는 말없이 그냥 새 물건을 보낸다. 이유야 어찌 됐건, 지금껏 쌓아온 신용을 지키기 위해 상품 한 상자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친정어머니께 물려받은 ‘기질’ 가운데는 ‘못 말리는 나눔벽(癖)’도 빼놓을 수 없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면 새벽기도 드리던 두 손으로 손녀 등을 두드리며 ‘바른 마음, 바른 정신, 베푸는 마음’을 되풀이하셨던 외할머니의 피가 고스란히 어머니께 유전됐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잘살던 시절이나 아버지의 낙선으로 시쳇말로 ‘바닥’을 쳤던 시절이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않으셨다.

“가정부에 유모까지 두고 살던 때는 낮에 학교 안 가고 저희 집 처마 밑에 와서 앉아 있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학교는 왜 안 갔느냐’고 물어보면 준비물을 마련치 못했다는 아이도 있고 운동화가 다 떨어졌다는 아이도 있었죠.

그러면 어머니가 그 아이들 부족한 걸 모두 준비해서 학교에 보내곤 하셨어요. 저도 어릴 적엔 고아원 원장을 꿈꿨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고등학교 땐 밭을 ‘밭뙤기’로 사서 거기서 나는 수박이랑 채소를 시장에 내다판 적이 있어요. 동네 고아원에 빨래 짜는 ‘짤순이’ 사준다고요. 하하하.”

그땐 어머니 흉내도 제법 냈다. 그래도 우도 열두 동네 가운데서는 ‘유지’ 소리 듣던 집안 딸로서 소풍 갈 때 김밥도 못 싸가는 친구들을 미리 파악해 소풍 전날 김 열 장이랑 달걀 두 개씩 친구들 집 앞에 몰래 놔두고 달려오던 길이 그렇게 즐겁고 짜릿할 수 없었다.

두 아들 위한 가장 큰 유산은 ‘자생력’

그런 양 대표의 집안도 한때 가세가 일시에 기울면서 그 흔한 치약과 비누마저 귀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다 등장한 비누가 어머니가 산에서 쑥을 캐 장터에 나가 판 노력의 대가라는 것을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그는 알았다.

하굣길, 길에서 쑥을 팔고 계신 어머니를 친구들과 함께 마주쳤을 때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다섯 남매는 자생력을 키웠다. ‘딸은 물질(해녀)을 시키라’는 문중 어른들 얘기도 어머니는 무시했다.

그 덕에 5남매 모두 대학까지 나왔지만, 어느 하나 편하게 공부한 사람은 없다. 막내 동생마저 스스로 도시락 세 개를 싸서 학교에 다녔고 대학 때는 택시 운전까지도 불사했다고. 하지만 바닥부터 다시 일어서야 했던 부모님이 짊어졌을 ‘멍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랐다.

“아홉 살 때 새벽 4시에 일어나 부모님 장사를 거들 때부터 사업가를 꿈꿨어요. 인생의 롤 모델을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님으로 삼았고요. 전 솔직히 돈 벌겠다는 욕심으로 사업하는 건 아니에요. 고객들의 선물을 대신 고민하고 또 대신 전달하는 과정이 제게는 큰 행복이거든요. 선물을 받고 좋아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일 년에 두 달 잠을 못자고 매달려도 너무 행복하거든요.(웃음)”

신토불이 제주의 연매출은 ‘비밀’이라 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양 대표의 월수입의 상당 부분은 ‘기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1000만 원 이상의 기부자 모임인 ‘1004클럽’ 회원으로 금전적 기부와 함께 각종 봉사활동을 통한 재능 기부를 실천해 왔다. 물품 기부를 합해 그의 연 기부액은 웬만한 봉급 생활자의 연봉에 달한다. 그는 평생에 걸친 건강한 기부를 고민하다 모금전문가학교까지 다녔다.

“하하하. 네, 먹고 살 만큼 법니다. 버는 거 절반 정도 나눈다는 생각인데요, 뭐. 하루는 독거노인 반찬 만드는 봉사를 갔는데,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시더라고요. 할아버지 혼자 계신 집이 어찌나 썰렁한지 수중에 있던 7만 원을 털어 연탄을 넣어드리고 운전하고 집에 오다 큰 사고가 날 뻔 했어요.

어찌나 놀랬던지 집에 파래진 얼굴로 들어갔더니 남편이 도대체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며 걱정을 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했죠. 처음엔 저더러 대체 결혼은 왜 했으며, 남한테 하는 거 십 분의 일만 가족한테 베풀라며 역정을 내더니 나중엔 꼭 안아주더라고요.(웃음)”

필자의 우회적인 질문 끝에 인터뷰 도중 그는 이제껏 말하지 않았던 사실 하나를 공개했다.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복지시설 건립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약정서를 이미 써뒀다는 것이다. 자칫, 두 아들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가장 큰 재산은 ‘자생력’이 아닐까요? 그것이 재산보다 값진 유산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아이들도 저처럼 스스로 자라야죠.(웃음)”

정주영 회장을 평생 롤 모델로 삼고 살아가는 그가 그리는 마지막 꿈은 청소년 리더십 교육을 위한 센터를 건립하는 것. 40대 후반에 그리는 꿈은 대학교수인 남편도 함께 키워갈 것을 약속했다. ‘낙관론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찾는다’고 했던 윈스턴 처칠의 말을 되새기면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활짝 웃고 있을 것이다.

양금주
신토불이 제주 대표
제주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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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