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거대한 황금빛 남성 속에 남녀가 현란한 무늬와 육감적인 본능으로 뒤엉킨다. 화면 아래에는 바닥인지 남성의 뿌리인지 구분이 안가는 꽃밭이 있고, 그 아래로 우수수 금빛의 욕망이 흘러내린다.에도(江戶) 시대 일본 금박병풍 같은 바탕에는 금가루가 은하수처럼 흩뿌려져 있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갔음인가. 연인의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가 그린 <키스>(The kiss)의 장면이다. 클림트가 오십이 넘어 원숙한 경지에 그려낸 <처녀>(The Virgin)에서도 성숙한 관능미가 넘쳐흐른다. (The Virgin) 부분, 1913년, 유화(Oil on Canvas), 190×200cm, 국립미술관, 프라하">
클라이맥스의 순간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중첩한 여인들의 의상은 중국 전통채색화의 구름 문양과 색감으로 장식하고 있고, 어둠이 둘러싼 윤곽은 <키스>의 테마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남성이다.
봄의 환희처럼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듯 방금 태어난 아이의 탯줄 같은 관능으로 엉켜있다. 그가 바라본 세계는 성적 본능과 욕망을 그려낸 듯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클림트의 그림을 보고 즐거워한다. 마치 그림 속 주인공을 눈앞에서 대하는 듯 황홀해 한다. 성적 욕망이야말로 가장 클림트다운 그림이요, 예술가다운 자기표현의 소산이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마치 프랑스 근대 조각의 거장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의 <키스>처럼, 두 사람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예술 분야는 달랐지만 삶과 인생, 열정과 욕망, 성공과 좌절에서 너무나 유사하다.
심지어 그들이 평소 즐겨 입는, 한통으로 흘러내리는 긴 옷자락의 차림새조차 흡사하다. 예술가의 기질은 남다르다는데, 클림트는 정말 남달랐다.
빈의 여인들 클림트는 시대를 앞서가는 화가였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13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600년이나 이어온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불안한 왕족과 귀족, 시민들은 빈을 가로지르는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미래의 세상에 불안해 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는 불안한 세기말의 정서를 폭풍 같은 격정으로 표현해 교향곡을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고, 요한 스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Jr.·1825~1899)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왈츠 선율로 궁정의 무도장을 격정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클림트는 빈 시내 자신의 화실에서 남색 작업복을 걸치고 알몸을 스케치하다가 붓을 들어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유디트Ⅰ>(JudithⅠ)의 절정의 순간을 완성했다.
고양이를 안고 산책하던 정원에는 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 개양귀비가 정원의 녹음에서 속살거리고, 자작나무의 가녀린 잎사귀는 푸른 욕망을 한들거렸다.
클림트는 당시 아직도 건재한 빈의 귀족풍 고전주의 사실화풍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격정 사이를 은밀하고 솔직하게 그려냈다. 빈의 사회는 술렁이었고, 귀부인들은 수군거렸지만 은근한 호기심과 관심을 떨칠 수 없었다.
빈의 여인들은 클림트를 흠모했다. 그 가운데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클림트의 곁을 지킨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ge)도 있었다.
또한, 클림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오토 슈미트(Otto Schmidt)와 빈의 백작부인 아델레 브로흐 바우어(Adele Bloch-Bauer) 같은 수많은 여인들은 클림트의 붓 끝에서 영원 속의 삶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언제나 빈의 여인들과 함께 했다.
팜므파탈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는 금속세공사이자 조각공이었다. 예술적 재능을 보인 어린 클림트는 빈의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해 동생 에른스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모자이크에서부터 회화, 프레스코 그림까지 여러 가지 기법을 공부했다.
에른스트와 마치는 졸업 후 ‘예술가 컴퍼니’를 구성, 공동 작업을 했는데 이들의 협동 작업은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클림트는 바로크 양식으로 역사화를 그렸고 그 결과물이 빈 미술사박물관 계단천장의 장식화다. 그는 서서히 빈의 미술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The Kiss), 1907~08년, 유화, 180×180cm, 벨베데레 미술관, 빈 4. <아델레 브로흐 바우어의 초상 Ⅰ>, 1907년, Oil·silver and gold on Canvas, 140×140cm, 개인 소장">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갑자기 사망하자 ‘예술가 컴퍼니’는 해체되지만 빈대학교 신축 건물에 의학, 법학, 철학의 세 학부 장식화를 주문받는다. 클림트가 의학, 법학, 철학을 위한 알레고리화의 초안을 제출하자 교수, 비평가, 국회에서는 폭풍 같은 분노가 일었다.
일개 화가가 감히 학문과 지성의 전통을 능멸하고 허물려 했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클림트가 나체의 임신부, 혼돈 속에 무기력하게 떠다니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몸을 대학의 강당에 그렸고, 학문의 승리를 찬양해야 할 마땅함에도 죽음과 무상함을 그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빈 화단은 술렁였다. 클림트는 더 이상 기존의 관습과 작품 제작방식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클림트는 빈의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tto Wagner·1841~1918),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1870~1956) 등과 함께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제 더 이상 예술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됐으며,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이들은 감각적인 예술을 원했고, 건축과 공예, 회화 등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확대한 종합예술 작품을 만들고, 나아가 궁극적 목표는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클림트는 마침내 빈 분리파를 떠나,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으로 전환했다. 클림트는 여인의 성과 속, 그리고 나체를 대담하게 그리면서 더욱 세간의 ‘훌륭한’ 취향과 멀어졌다.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점점 더 여인들을 그리는 데 빠져 들었다.
팜므파탈(Femme Fatale), 즉 19세기 문학에서 미모와 성적 매력을 무기로 남성을 파멸적 상황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여자의 뜻하는 이 용어는 클림트 그림의 주요한 모티브였고,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 등 삶의 허망함도 그를 사로잡았다.
클림트의 사랑 , 1891년, 종이에 파스텔·금박 프레임, 개인 소장">초기 작품들을 제외하고 클림트는 전적으로 여인들을 그리는 데 열중했다. 클림트가 그린 여성들은 19세기 말 빈의 퇴폐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었고, 잔잔한 에로티시즘은 세기말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성적 긴장감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1856~1939)의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클림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명의 여성에게만 몰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언제나 나체의 모델들이 있었고, 빈의 귀부인들도 그와의 연애를 은밀히 즐겼다.
그 가운데 <아델레 브로흐 바우어의 초상 Ⅰ>을 보면, 그녀의 품위가 그녀를 둘러싼 황금빛 현란함과 보석으로 휘감은 가녀린 몸매와 우아한 용모에서 잘 드러난다.
일본과 일본 미술에 상당한 수집과 감식안을 갖고 있는 클림트의 안목은 브로흐 바우어 부인의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드레스의 배경 무늬에, 일본 전통문양 가운데 다카와치(立涌)라고 불리는 물의 소용돌이나 물이 수증기로 변해 솟아오르는 문양으로 화려함을 극대화시켰다.
이렇게 자신들의 초상을 자신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게 그려내는 클림트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부인이 몇이나 있었을까. 빈의 사교계에서 클림트는 화제의 인물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클림트에게도 자유분방함 가운데 그 나름대로의 순정으로 한 여인만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충실했다. 그녀가 바로 1874년 태어난 에밀리 플뢰게였다. 플뢰게는 클림트의 친동생 에른스트의 처제로 클림트보다 열두 살 아래였지만 그 둘은 누구보다도 가까웠다.
둘의 관계는 둘만이 알 뿐이었지만, 플뢰게는 클림트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가장 신뢰하는 사랑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다. 클림트가 그린 <17세의 에밀리 플뢰게> 초상을 보면, 1891년 열일곱 살의 풋풋한 그녀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아마 한눈에 반해 정성으로 그려낸 작품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표정이 곱고 아름답다. 당시 플뢰게의 순수함과 풋풋함이 그녀의 청순한 눈빛과 고운 피부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녀의 초상은 평소 클림트가 사랑하던 일본풍의 금박액자에 올려놓았는데, 액자의 여백에 일본 장식병풍의 중요한 소재인 매화와 갈대, 추규(秋葵), 패랭이, 대나무 그림을 일본화보다 더 일본화답게 그려 놓았다.
천재화가의 재능은 동서고금을 뛰어넘는가 보다. 클림트의 플뢰게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20세기 초, 많은 예술가들이 지지했던 자유연애는 클림트도 좋아했던 생활방식이었다. , 1910년, 유화, 100×100cm, 개인 소장">당시 뮌헨의 ‘청기사파’ 화가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86~1944)와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unter·1877~1962), 역시 화가였던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1880~1916)와 마리아 프랑크 커플들처럼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하거나 두 사람이 동등하게 예술가로서 작업한 예는 흔한 경우였다.
클림트와 플뢰게의 관계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클림트가 플뢰게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와 석 점의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은 둘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증명한다.
플뢰게는 언니 헬레네와 함께 패션살롱을 운영했는데, 빈 사교계의 귀부인들은 플뢰게 자매의 혁신적인 패션 디자인에 매료돼 의상을 맞추었고, 플뢰게 자신도 자신의 살롱에서 만든 헐렁하고 파격적인 의상을 즐겨 입었다.
개미허리같이 몸을 꽉 조이는 코르셋으로부터의 여성 해방은 19세기 말부터 시대의 관심사였으며, 플뢰게의 생활방식과 패션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클림트의 복장도 물론 플뢰게가 디자인한 것으로, 그녀도 클림트 못지않게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자질을 풍성하게 갖추고 있었다. 1918년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가 “미디(플뢰게의 애칭)를 불러줘”였다. 생의 마지막까지 클림트는 그녀를 찾았고, 그녀는 그의 임종을 지켰다. 플뢰게는 클림트의 유산을 받고 1952년 세상을 마칠 때까지 클림트의 사랑과 추억을 안고 살았다. 플뢰게는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9세기 말, 대담한 관능과 도전적 화법으로 당대의 도덕적 규범을 깨트렸고, 빈 사교계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새로운 화가의 출현을 흠모와 멸시의 눈총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빈의 새로운 바람이었고,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화가의 자유는 그에게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가장 큰 열정이었다.
인간의 본능을 욕망보다 더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기행을 평범한 사람보다 더 평범하게 받아들인 클림트는 빈의 화단과 단절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고, 그의 욕망과 명성은 20세기를 지나 21세기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예술에서의 자유는 예술가의 양식이다. 자유를 먹고 고독을 호흡하며, 영혼의 소리를 그려낸 클림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글·사진 최선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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