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 Rothko

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는 스스로의 삶과 예술을 자기방식대로, 고집스럽고 집요하게, 괴팍하고 비상식적으로 풀어나간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자존심이다. 예술가로서의 극단적인 삶을 자살이라는 비극적 선택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뉴욕 시그램 빌딩의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하는 그림을 거액에 계약하고 정작 그림이 완성되자 “비싼 돈을 내고 우아한 음식을 먹는 놈들에게 내 그림을 보라고 허락 할 수는 없다”고 계약을 취소한, 자존심과 고집과 용기로 똘똘 뭉친 예술가였다.로스코는 1903년 9월 26일 러시아 드빈스크에서 약사인 아버지 야콥 로트코비치와 어머니 사이에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원래 이름은 마르쿠스 로트코비치로 유태인이었다. 당시 드빈스크 교외에 살던 유태인들은 항상 학살의 공포 속에서 살았다. ‘유태인을 죽여 러시아를 구하자’는 슬로건이 횡행했다. 로스코는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마르쿠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드빈스크의 많은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결심했다. 마르쿠스가 10살이 되던 1913년, 미국에 건너오자마자 겪게 된 아버지의 죽음은 고생의 시작이자 그의 작업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비극적 서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로스코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뛰어난 성적 덕분에 장학금을 받고 코네티컷에 위치한 명문 예일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유태인들이 사회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결국 2년 공부를 마치고 예일대를 중퇴한 그는 46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미술학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로스코는 1938년 2월 21일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다른 많은 유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치의 발흥과 미국에서의 반유태주의 부활가능성을 우려했다. 당시의 많은 유태계 미국인들이 자신의 혈통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1940년 1월 마르쿠스 로트코비치는 마크 로스코로 개명했다. ‘로스코’라는 이름은 미국인이나 러시아인, 유대인 또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이름으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신비로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로스코는 나른한 미국의 일상을 담은 그림을 경계하고 처음부터 남다른 주제로 고민하였다.초기 그의 작업은 신화를 주제로 한 기호와 형이상학적 신비감을 그려냈다. 그러다가 1949년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에서 전시된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을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당시 로스코는 이 그림을 보러 여러 차례 미술관에 들렀다. 마티스의 그림은 부피감과 그림 안에 구현되는 전통적인 공간감을 모두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림이 가져야할 극적 요소는 전혀 반감되지 않았고, 색채로 규정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림 자체라는 확신을 줬다. 로스코는 드디어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신화적이고 원시적인 감성을 더 이상 어떤 형태를 통해 구현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단지 색 면 하나로도 충분히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로스코는 색 면의 크기와 색채의 농도를 수없이 조합시켜본 뒤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색 면의 크기가 안배되고 난 뒤에는 색 면의 층들이 차례차례 덮었다. 그러면서 캔버스에 ‘입김을 불어넣듯이’ 색 면을 진하게, 또는 엷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만든 색 면은 고정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향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화면 저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것 같기도 했다. 로스코의 색 면 그림은 신비롭다. 그저 큰 화면에 쓱쓱 물감을 펴듯 발라 내린 것 같다. 그의 대표작가운데 하나인 은 색과 색 사이 수평선처럼 보일 듯 말 듯 가는 금 사이로 삐져나오는 오로라 같은 기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한 색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로스코의 작품을 보면 색이 경계를 넘나드는 새롭고 신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평정심을 준다는 평을 가장 싫어했다. 그의 관점에서 그림은 관람자를 흥분시켜야 했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에 비극적 정서를 유발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여러 색 층은 켜켜이 운명적인 비극을 담아내야 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비롯된 비탄의 다른 극단인 황홀경의 흥분역시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했다. 그는 ‘ 비극이라는 감정은 그림을 그 릴때 늘 나와 함께 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빛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난 뒤에 볼 수 있는 포연 속의 빛이었다. Oil on Canvas, 1949, 208.3x108.3cm. 개인소장]>1958년 6월, 로스코의 명성이 뉴욕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자자할 무렵, 캐나다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맨해튼 사옥 시그램빌딩이 완공되자, 1층에 있는 ‘포시즌즈’ 레스토랑의 벽면을 장식할 벽화를 로스코에게 주문한다. 로스코의 작품은 피카소, 폴록의 작품들과 함께 이 레스토랑의 벽면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시그램이 제시한 작품 값은 3만5000달러로 요즘으로 치면 200만 달러 수준이다.포시즌즈 레스토랑은 반 층 내려가 깊이파인 바닥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필립 존슨이 디자인한 모더니즘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활엽수와 한가운데 파인 못으로 선적(禪的)인 분위기를 재현하면서 신고전주의의 훌륭한 대안이라는 면모를 뽐냈다. 하지만 그래봐야 포시즌즈는 결국 레스토랑일 뿐이었다.1959년 6월, 세편의 연작 스물일곱 점의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 지칠대로 지친 그는 작업을 중단하고 유럽여행을 떠난다. 그는 피렌체의 로렌초 도서관에서 미켈란젤로의 벽화가 만들어낸 공간감에 자극을 받고, 산마르코수도원에서 안젤리코의 프레스코 그림들이 소박한 공간에 던져주는 신비로운 빛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 막 문을 연 포시즌즈 레스토랑에 가 보았다. 로스코는 먹는 데 5달러 이상을 쓰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늘 얘기했으며, 싸구려 중국음식을 가져와서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던 사람이다. 포시즌즈에 앉아있던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입맛을 떨구게 하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다음날, 작업실로 돌아온 로스코는 너무 화가 나고 고통스러웠다. 로스코는 계약금으로 받은 7000달러를 돌려보냈다. 로스코는 스스로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자기가 부여한 작품의 순결성을 지키고, 영합을 마다함으로써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물론 그는 이미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벌었고, 스스로 매긴 작품의 가치가 매우 컸으므로 작품을 팔지 않고 소장한다고 해서 손해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로스코처럼 거액을 깨끗이 거절 할 수 있는 현대화가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시그램 기획은 수포로 끝났지만, ‘명상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는 로스코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시그램 기획이 실패한 것에 우울해하던 어느 날, 1965년 초 휴스턴의 미술품 수집가인 존과 휴스턴의 세인트 토마스 가톨릭 대학교 미술대학장인 도미니크 드 메닐이 로스코에게 커다란 벽화연작을 주문하면서 25만 달러를 내놓았다. 이는 토마스 가톨릭 대학교의 성당을 위한 작품이었다. 로스코는 이 프로젝트를 매우 기뻐했다. 존과 메닐은 로스코의 작품들과 예전에 로스코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시그램 빌딩 벽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그 해 가을, 로스코는 새로 이사 한 맨해튼 이스트 69가 작업실에서 열심히 작업했다. 높이 15m나 되는 실내공간에 임시칸막이를 설치하여 설계단계에 있는 성당과 비슷한 공간을 만들었다. 로스코는 성당 모양과 비슷한 팔각형의 토대를 제안했다. 그 결과 신도들은 벽화로 둘러싸이게 되고, 성당 중앙의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빛은 그의 맨해튼 작업실에서처럼 광섬유로 걸러지게 만들어졌다. 로스코는 성당 전면에 자신의 그림을 배치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를 마음에 들어 했다. 로스코는 휴스톤 성당의 벽화에 어두운 색조를 택했고 세 점의 3면화와 다섯 점의 개별 작품으로 이루어진 14점의 대형 그림을 완성했다. 휴스턴 성당 작품의 절반은 단색처리하고 나머지 절반은 윤곽선이 선명한 검은색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에 작업했던 형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로스코는 생의 마지막 2년 동안 이 어두운 색채실험을 계속했다. 성당벽화의 음울한 분위기는 로스코의 심각한 우울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휴스턴 성당은 1970년 2월 25일 맨해튼 작업실에서 로스코가 손목을 긋고 자살한 뒤 약 1년만인 1971년 1월 26일에 공개되었다. 벽에 걸린 어두운 그림들은 로스코가 만년에 겪었을 우울과 외로움을 반영하는 듯하다. 미술사가 바바라 로즈는 로스코 성당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과 니스 생폴 드 방스의 마티스 성당에 견주며 “이들 성당에서는 그림들이 내부로부터 신비스럽게 빛을 발하고 있는 듯 보인다”라고 했다. 성당 봉헌식에는 각계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에서 추기경이 교황대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날 도미니크 드 메닐 학장의 봉헌사는 로스코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려 할 때마다 진정한 예술작품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감춰져 있으며, 고집과 용기에 의해서만 화가는 위대해 진다”는 그의 말대로 로스코는 고집과 용기로 영원한 예술의 안식처를 얻었다.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글·사진 최선호(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