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투자신탁운용 이용범 차장
반적으로 규모가 작은 펀드들은 시장보다 초과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만, 펀드 덩치가 어느 정도 커지면 초과 수익을 내기란 사실상 어렵다. 펀드 규모가 비대해지면 투자할 수 있는 종목이 줄어드는 데다 가입자가 많아진 탓에 시장 수익률에도 어느 정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펀드의 덩치가 커지면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KB금융 등의 편입 비중이 높아지는 이유다.이런 통념과 달리 10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면서 올 들어 다른 펀드들보다 20%p 이상 수익을 더 낸 정통 주식형 펀드가 있다. 바로 ‘한국투자한국의힘’ 펀드다. 올 들어 이 펀드의 11월11일 기준 수익률은 64% 이상이다. 같은 기간 설정액 10억 원 이상의 759개 국내 주식형 펀드의 평균 수익률이 42% 정도니까 22%p가량의 수익을 더 내고 있다는 얘기다. 보통의 국내 주식형 펀드에 올초 1000만 원을 가입한 경우보다 이 펀드의 투자자는 220만 원이나 더 수익을 내고 있는 셈이다.이 펀드를 책임지고 있는 이용범 한국투신운용 차장은 다소 특이한 취미를 갖고 있다. 직업과 나이만을 봐서는 골프 등이 취미일 것 같지만, 그는 취미가 만화보기라고 했다. 시트콤에서 흔히 ‘백수’가 그러하듯 주말이면 홍대 앞에 있는 만화방으로 가서 자장면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본다고도 했다. 주말뿐 아니라 증시가 급락한 날에도 종종 찾는단다.“매일 숫자와 그래프를 보고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니 감성이 메마르고 있는 것 같은 이유도 있지만, 신문기사도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잖아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읽어야 영감이 떠오르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만화 속 이야기를 보면 상상력이 풍부해져 투자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그 안에도 세상이 있으니까요.”주로 국내 만화를 주로 보는 그는 “고행석씨의 만화인 ‘구영탄’이 나와 같이 성장하고 나이 들고 있는 느낌이 든다”며 웃었다.만화를 보는 펀드매니저의 일상은 어떨까. 아침 해가 뜨기도 전인 5시30분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경TV를 튼다. 새벽의 뉴욕 증시와 주요 변수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경제신문을 보고 회사에 오면 7시20분. 7시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회의에 참석하고 장이 시작하기 전까지 놓친 뉴스를 체크하기 위해 다시 신문과 인터넷을 뒤적인다.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주식 매매에만 몰두한다. 장이 끝나면 다시 회의가 있으며,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기업 탐방을 간다. 그는 한국의힘 펀드 외에도 ‘패스파인더’ 펀드를 맡고 있으며 연기금이 맡긴 자금 등 총 3000억 원 정도를 운용하고 있다.이 차장이 금융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1997년이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대학(서울대 경제학과)을 졸업할 무렵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꿈을 접고 조흥은행에 입사했다. 운용업계로 들어온 건 조흥투신운용으로 옮긴 1999년부터다. 이후 대우증권을 거쳐 2005년부터는 피데스투자자문에서 펀드매니저를 맡았다.2007년 2월 한국투신운용으로 옮긴 그는 “투자자문사는 조직이 작아 매니저 몇 명에 의해 회사 수익이 좌우되는 경향이 있는데 큰 조직으로 가서 어깨를 가볍게도 해보고 싶었고,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서 제대로 된 운용을 해보고 싶었다”고 이직 배경을 설명했다.그의 펀드는 정통 주식형 펀드지만, 보통의 펀드와 확연히 다른 철학으로 운용된다. 많은 펀드 매니저가 품고 있는 ‘벤치마크’에 대해 강박관념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한국의힘 펀드의 포트폴리오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8월 말 기준으로 한국의힘 펀드가 가장 많이 편입하고 있는 주식은 삼성전자(전체 주식의 12.97%)로 다른 펀드와 대동소이 하지만, 그 다음으로 들고 있는 주식은 LG전자(5.52%) CJ제일제당(5.04%) SK에너지(4.41%) 등의 순이다. 이 중 LG전자의 시총 비중은 7위권이지만, CJ제일제당은 70위권,SK에너지는 20위권 안팎으로 보통의 펀드가 시장과 수익률 오차를 줄이기 위해 시총 비중 순서대로 종목을 담고 있는 것과 비교해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시총 2위의 포스코의 비중은 4%에 그치며 3~4위인 현대차 KB금융은 2% 이하로 들고 있다. 대신 시총 30위인 기아차를 3% 넘게 편입하고 있다.이 차장은 “그나마 최근 SK에너지는 비중을 줄인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될 성싶은 성장주를 발굴해 집중 투자하는 게 나의 운용방식”이라고 잘라 말한다. 펀드 이름처럼 ‘한국의힘’을 가진 기업에 집중한다는 얘기다.그가 생각하는 성장주의 선택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는 현금 창출력이 높고, 경쟁력을 갖춘 신사업을 벌이는 회사다. 이런 회사의 전형이 SK에너지다. 이제 SK에너지는 화학회사가 아닌 2차전지 회사라는 게 이 차장의 설명이다.또 큰 경기 순환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반사이익을 보는 회사도 그가 관심을 갖는 성장주에 포함된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그에 따른 원자재가격 상승의 수혜를 볼 기업인 CJ제일제당을 편입한 것이 좋은 예다.“예컨대 구조적으로 좋아질 수밖에 없는 기업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중동엔 달러가 많아지는데 결국 이는 석유 다음의 시대를 생각하는 중동 국가의 플랜트 발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동 지역의 플랜트 발주는 단기 모멘텀에 그치지 않고 이와 관련된 국내 기업들에도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또 중국과 브라질의 경제 성장도 조선소 제철소 건설 등으로 이어지면 기술력을 갖춘 삼성엔지니어링 GS건설 등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입니다. 시장이 정해준 편입비중은 신경 쓰지 않고 이런 종목들을 찾으려고 항상 노력 중입니다.”그는 교수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다고 했다. 시장에서 실력대로 정정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적성에 맞는다는 설명이다. 앞으로 은퇴 후에도 자신의 자금을 펀드매니저처럼 계속 운용할 계획이라고 밝힐 정도다.이러한 원칙을 지키다보니 주변에서 고집이 세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차장과의 인터뷰 전 우연히 만난 김영일 주식운용본부장은 이 차장에 대해 “고집이 너무 세 다루기 힘든 데다 ‘돌아이’ 기질도 있지만, 항상 같이 일하고 싶은 친구”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얘기를 전하자 이 차장은 “회사가 정한 포트폴리오 전략 차원에서 사라는 종목을 제가 안 샀거든요”라며 웃어넘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매니저 하나쯤은 우리나라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비단 기자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됐다.글 김재후 한국경제신문 기자·사진 김기남 기자 hu@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