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식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 노화랑 노승진 대표

가와 화상은 공생공존의 관계이다. 화가가 없이 화상이 존재할 수 없고, 화상의 도움 없이 화가의 지속적인 작품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예부터 화가와 화상의 인연은 특별했다. 화상 뒤랑 리엘은 르누아르와 평생 후원자 이상의 관계를 맺었고, 무명의 피카소를 화단에 등단시킨 앙부르아즈 볼라르는 드가, 세잔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홍대 미대 이두식 교수와 인사동 노화랑 노승진 대표도 화가와 화상으로 만나 남다른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이다.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게 1979년이었으니, 햇수로 30년이 넘었다. 지금이야 두 사람 모두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30대 초반의 젊은 시절이었다. 가난한 화가와 젊은 화상의 첫 만남은, 두 사람에게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다.이두식(이하 이) : 79년 IAA(International Artist Associate)가 독일 슈튜트가르트에서 있었어요. 제가 대학 강사를 할 땐데 거기 참가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거예요. 예나 지금이나 화가들은 돈이 없잖아요.노승진(이하 노) : 그때는 동양화가 대세였거든요. 그래서 서양화 하시는 분들이 특히 힘들던 시대였어요.이 : 미화 3000달러는 있어야 하는데, 300달러도 없는 거예요. 그때 1년 선배인 동료 교수가 노 대표한테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노 대표가 그림을 가져와보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그 자리에서 사주더군요.노 : 첫인상이 화가보다는 정치인 같았어요. 지금도 미남이지만 젊었을 때는 더 미남이었어요. 풍채도 좋고요. 작품도 좋았어요. 그때 가져오신 작품이 드로잉이었는데, 특이하고 좋았어요. 한 마디로 반한 거죠.이 : 노 대표 덕분에 꿈을 이뤘잖아요. 그때 제 꿈이 유럽에 가보는 거였거든요.호감에서 출발한 둘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가 더해졌다. 노 대표는 친분이 두터운 20~30명의 작가 중에서도 이 교수를 특별하게 여긴다. 그런 인연으로 1996년 FIAC(프랑스 아트 페어)에는 이 교수가 노화랑 전속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유명 아트 페어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FIAC은 최고의 아트 페어였다. 1996년은 FIAC가 특별히 ‘한국의 해’로 국내 작가를 초청한 해였다. 최고의 아트 페어에 노화랑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 교수가 참여한 것이다.노 : 이 선생님은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잘 팔려요. 전시회를 열기만 하면 “Sold out”되거든요. 이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인기작가셨어요. 미국에 진출한 것도 국내 작가 중에서는 이 선생님이 처음이셨을 걸요?이 : 제리 부르스터라는 관장이 있었어요. 달리의 의형제였던 분인데, 1991년~95년에 제가 그 분 전속으로 있었어요.노 : 그때 언론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그림이 전시된 뉴욕 57번가는 미국에서도 상급 갤러리들이 모인 곳이거든요.이 : 진짜냐고 뒤를 캐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미 카터 재단에서 제 그림을 가져갔을 때도, 로마에 벽화를 그렸을 때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어요.노 : 그렇게 잘 팔려도 큰 도움이 못 되는듯해 늘 죄송하죠. 이 선생님은 그림 값을 거의 안 올리세요. 미술품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어야 하거든요. 헌데 일부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그림 값을 올리는 경우도 있어요. 수요가 없으면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선생님 그림 값은 제가 보기엔 아주 합리적인 수준인 거 같아요. 세상 이치를 아시는 거죠. 작품이 좋으면 그림 값을 자연히 올라가게 되어 있거든요.이 :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요. 노 대표는 ‘전국민이 그림 한 점 이상은 갖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분이세요. 화단에 좋은 일도 많이 하세요. 가정 형편이 어려운 미대생들을 위해 장학금도 내놓으시고요. 그래도 그림 보는 눈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안 만나시거든요. 꾸준히 만나는 작가라야 한 20~30명 정도 될 겁니다.건축을 전공한 노 대표는 1977년부터 화랑을 경영해온, 해방 이후 1세대 화상이다. 30년이 넘는 동안 화랑을 경영해온 사람답게 그림을 보는 그의 눈은 무척이나 까다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미술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서 그는 매일 10~20개의 카탈로그를 섭렵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전시회를 찾아 작가의 테크닉이나 색상의 변화를 관찰한다. 그는 국내 화단의 젊은 작가들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노 : 젊은 작가 중에 굉장히 열심히 작품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이런 친구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죠. 인기에 영합해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보다는 당장은 잘 안 팔려도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친구들이 오래 남아요.이 : 학교에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기본을 튼실하게 다진 후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 하라고요. 그러다보면 자기 캐릭터, 자기 그림을 찾을 수 있거든요. 누구누구의 아류로 남아서는 좋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작가라면 바윗돌을 깨고 그 속에서 옥을 캐내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노 : 앞으로 작가들은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겁니다. 엄청난 경쟁에서 살아남는 작가가 좋은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이 : 네, 저도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질 거라고 봅니다. 예전보다 작가수가 많이 늘었어요. 그림으로 먹고 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거죠.노 : 그래도 열심히 하는 작가들은 미술사에 오래 남잖습니까. 화가가 죽은 후에도 작품은 남으니까요.두 사람은 오래토록 기억될 작품을 위해, 또한 더 좋은 환경에서 후배 작가들이 작품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로가 해야 할 역할이 적지 않음을 안다. 이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지난 30년이 그랬듯, 앞으로도 서로 격려하며 동행할 것을 약속했다.글 신규섭 ·사진 이승재 기자 wawoo@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