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변재희
년 만이었다. 작가 변재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녀와의 첫 만남은 2003년 4월, 미국에서 작업을 하다 돌아와 서울에서 연 개인전에서였다. 인터뷰를 하러 가기 전,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동심의 세계를 담아낸 듯한 작업과 수줍음 많은 소녀 같은 작가에 대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렇다. 그녀의 작품은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맞닿아 있었다. 동화 속에 나옴직한 유럽의 성과 시계탑이 화면 곳곳에 등장하고, 선명한 컬러의 아크릴 물감과 반짝이 가루가 어우러진 화려한 색감이 정말 ‘예뻤다’. 회화라지만 변형 캔버스를 사용하고, 화면 위에 종이죽이나 젤 같은 미디움을 붙여서 입체감을 살리고, 사각형의 캔버스 밖에까지 연장시켜 그리거나 캔버스 틀의 옆면까지 채색을 해서 마치 부조처럼 느껴지는 작품을 선보였더랬다.이런 기억만을 간직한 채 20번째 개인전을 여는 한남동의 전시장을 찾았을 때에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다른 작가의 전시인가’하는 생각이 들만큼 갤러리 외부 유리벽에 걸린 그림을 비롯해 작가의 작품 스타일이 예전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소재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해, 바람, 꽃은 온데간데없고 발레나 승무 같은 ‘춤’을 모티브로 한 색다른 작품들이 작가의 이름을 달고 벽면에 걸려 있었다. 표현 기법도 확연히 바뀌었다. 전반적으로 선명한 색감에는 변화가 없지만 미디움을 활용하지도 않고, 아크릴만 고수하던 이전과 달리 유화로 작업을 한 것이다. 이런 그녀의 변화를 마주한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진정한 작가라면 한 가지 작업 방식만 고수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변재희 작가가 스스로 가두어 두었던 틀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1990년대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작품의 주된 소재로 자연 풍경을 택했어요. 언덕이나 꽃과 나무 등 그곳에서 보았던 요소를 그려 넣음으로써 현지에서의 느낌을 담아낸 것이죠.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성이나 건축물은 그 외형을 묘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런 형상을 빌려서 지중해성 기후의 포근한 느낌 이를테면 자연의 향기, 바람, 햇빛, 공기 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라고 이전 작업에 대해 그녀는 설명한다. 다시 말해 최근의 작품 이전까지 그녀가 애착을 가진 소재는 지중해였고, 작가는 자신이 느낀 지중해의 이미지를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이고 화려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에는 ‘꿈과 환상의 여정을 형상화’. ‘어린 시절 동화 속 상상의 세계’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물론 작품 자체는 기분을 들뜨게 할 만큼 경쾌하고 좋았지만, 색상에 비유하자면 베이지 컬러를 닮은 그녀가 그려낸 것이라고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글이든 그림이든 거기에는 작가의 성향이나 스타일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마치 작가가 속내를 숨기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선장이셨던 아버지는 여섯 살 때부터 화가의 꿈을 꾸었던 저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어요. 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까닭에 함께 보낸 시간은 적었지만 집에 오실 때면 물감이나 붓과 같은 그림 도구와 유명 작가들의 화집 등을 항상 사가지고 오셨죠. 타국에서 가족들에게 엽서를 보낼 때에도 제 엽서만은 수가 놓이거나 수공예로 만든 특별한 것이었어요. ‘화가가 될 아이니까’라는 이유에서였죠. 29세 되던 해에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힘들었어요. 이런 까닭에 30대 초반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오히려 더 밝고 달콤한 그림을 그리게 되더라고요. 화려한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이 내게 매우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곤 했었어요. 제 그림을 보고 ‘이렇게 행복하세요?’라고 묻기도 했죠. 하지만 실은 그렇게 작업했던 시절이 가장 행복하지 못했던 시기였어요. 오히려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그렸던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은 모든 것이 많이 편안해 졌어요. 그래서 작품에도 변화가 찾아온 거겠죠.”이번 작품의 주제는 ‘춤’이다. 서울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있지만 뉴욕을 자주 찾는 그녀는 미술관은 물론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는 편. 특히 고전발레, 재즈발레, 현대무용 등 움직임의 속도감과 의상과 무대가 어우러진 컬러감이 매력적인 춤에 매료되었다. 춤을 모티브로 그에 대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구체화하기 시작한 지 1년 남짓. 발레의 우아한 동작,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살풀이춤 등 장르를 불문하고 소재로 삼으며, 작품에 따라 시선을 줌업(Zoom-up)해서 전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고 시선을 줌인(Zoom-in)해서 춤을 추는 사람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리기도 한다.이처럼 다양한 시선으로 소재를 다루는 최근작을 보면 색감이나 표현은 한층 성숙된 깊이감을 주는 한편 작업에 임하는 자세는 더욱 적극적으로 바뀐 듯하다. 표현법에 있어서도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는데, 화면에 다양한 색상을 칠한 후 큰 붓으로 그대로 긁어내려 흘러내리는 듯한 효과를 주기도 하고 점묘화처럼 균등한 간격의 작은 점들을 찍어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강한 마티에르 효과를 내기도 한다. 전자의 화법은 번지는 느낌을 주어 흔들리는 춤의 이미지를 좀 더 몽환적으로 보여주고, 후자의 화법은 작은 점들이 모여 화면을 구성하는 즉 픽셀(Pixel) 기법을 이용한 현대적인 표현 방식이 인상적이다.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길이가 4m50cm, 11m에 달하는 대작이 많다. 개인 작업이 아니라 LIG 손해보험 대구 사옥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건축법상 대형 고층 건물의 경우 건축비와 전용 면적에 따라 일정 퍼센티지는 예술품을 구입,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의무 규정을 따르기 위해 흔히 건물이 완성되고 난 후 작품을 구입하기 때문에 공간과 작품이 잘 어울리지 않고 크기가 맞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와 달리 대구 사옥은 건물 공사와 함께 작업을 의뢰해 그에 어울리는 색상과 크기를 맞춰 건축물에 그림이 놓였을 때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완성도가 높다. 작품이 걸린 강남 사옥을 비롯해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변재희 작가는 대구에 이어 부산 사옥에 참여하는 등 LIG 손해보험과의 공동 프로젝트는 한동안 이어질 예정이다.“공사 기간과 전시 일정에 맞추느라 하루 16시간씩 작업을 하다 결국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어요.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데, 즐거운 고통이죠. 사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절실한 게 없었어요. 작업실에서 음악 틀어놓고 커피 마시며 그림도 그리는 그런 일상이었죠. 그런데 내가 작업실 월세를 내고 재료비를 충당해야 할 상황이 되니 죽도록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더라고요.”서강대 교수였던 고 장영희 씨는 그녀의 저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가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더 정직하게 마음을 전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얼굴은 웃고 있어도 짝사랑하는 연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다 돌아서는 사람의 뒷모습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슬퍼 보이고, 짐짓 별 것 아니라는 듯 숨기려 해도 지금 막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의 뒷모습은 어딘지 힘줄도 불끈불끈, 생동감 있고 기뻐 보인다.’ 6년 전 그녀를 만났을 때 뒷모습이 아버지를 여윈 슬픔과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였다면 지금의 뒷모습은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무르익은 작품을 들고 나타난 작가를 다시 만난 기쁨 때문이었을까? 갤러리 문을 닫고 나오면서 입가에 씨익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서범세 기자©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