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하는 CEO 서영태 현대오일뱅크 사장

난 6월28일 저녁 광화문 금호문호아트홀. 연미복을 입은 한 신사가 무대에 올라 오페라 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을 열창했다. 쏟아지는 박수. 객석의 앵콜 요청에 신사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 나오는 ‘투나잇’을 선사했다. 이날 행사는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인 데뮤즈가 주관한 ‘작은 음악회’. 전문 성악가 못지않은 테너 실력을 뽐낸 신사는 서영태 현대오일뱅크 사장이었다.서 사장은 지난 2002년 경영난에 빠진 현대오일뱅크를 맡아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으로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는 앉아서 생각하기보다는 공장과 영업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혁신적인 제안들을 쏟아내 업계에서는 ‘야전사령관’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경영 현장에서는 이처럼 전투적 이미지의 서 사장이지만 그의 내면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서 사장을 만나 성악에 대한 그의 사랑을 들어봤다.“지난 2005년 말 지인들과의 송년모임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계셨던 성악가 한 분이 노래를 배워보라고 권유를 하더군요. 그래서 2006년 초부터 1주일에 1시간씩 발성 연습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대학원생에게 레슨도 받았죠.”“저는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많은 감동을 받고 살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합니다. 감동을 많이 받을수록 삶은 행복하거든요. 그런데 감동은 자신이 아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오페라도 공부를 많이 하고 가서 들으면 감동의 깊이가 다르지 않습니까. 성악가들도 무대에서 노래 부를 때 더 감동이 커집니다. 처음에는 무척 어려웠습니다. 특히 테너는 고음을 내야 하는데 발성이 쉽지 않거든요.”“지금은 1주일에 2∼3시간 정도를 배웁니다. 연주회가 예정돼 있으면 저녁에 시간을 내서 연습에 참석하고요. 저는 2007년 6월께 데뮤즈라는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에 들어갔습니다. 데뮤즈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자기가 한 달 동안 연습한 노래를 발표합니다. 이 때는 관객도 없고 무대 높이도 15cm에 불과한데도 그렇게 떨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아마추어에게는 무대가 선생님입니다. 덕분에 성악에 눈을 떴지요. 처음에는 성악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데뮤즈 활동을 통해 매년 6월과 12월에 관객 앞에서 노래를 하고, 회사 음악회에도 참가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골프도 한 달 동안 안 치면 스윙 감각을 잃듯이 성악도 그렇습니다. 성악은 몸이 악기여서 평소 악기 관리를 잘 해야 하지요. 특히 술을 마시면 목이 붓기 때문에 연주를 앞두고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흔히 권투선수들이 시합 앞두고 몸을 만든다고 하는데 성악하는 사람들도 그런 말을 합니다. 제가 새벽운동을 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성악을 하면서부터는 체육관에서 복근강화운동을 집중적으로 합니다.”“노래를 할 때 주로 레몬이나 오렌지 쥬스를 갖다 놓지요. 신 것을 먹으면 침이 나와서 입안이 마르지 않거든요. 또 배고프면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공연 전에는 반드시 간식을 먹습니다. 사실 성악은 전형적인 육체 운동이거든요. 특히 테너는 발성 연습할 때 땀이 엄청 납니다. 성악은 목이 아니라 머리에서 소리를 내는 겁니다. 두성이라고 하는데 목은 열어놓고 복근에서부터 울리는 공명으로 소리를 내지요. 그러다보니 폐활량이 늘어 건강에도 좋습니다.”“행사의 성격이나 듣는 청중에 따라 레퍼토리가 다릅니다. 최근 공연에서 부른 노래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과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별이 빛나건만’이 있었지요.”“물론 있어요. 그런데 역량이 안돼서….푸치니의 투란도트에 나오는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를 불러보고 싶어요. 이 노래는 중간에 음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잘 안 됩니다. 탁 찔러줘야 하는데 그게 어렵더라고요. 선생님들은 조금 더 기다리면 될 텐데 뭘 서두르냐고 하시지만요.”“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노래에 ‘하이 C ’가 있으면 매우 어렵죠. 발성할 때는 소리가 나오는데 실제 노래할 때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 유명한 파바로티도 다음 날 ‘하이 C ’를 내야 하면 잠이 안 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테너는 고음 때문에 애를 먹습니다. 멀쩡히 노래를 잘 부르다가도 몸 컨디션에 따라 소리가 안 나오거든요. 골프에서 싱글을 치려면 힘을 빼야한다고 하는데 성악도 힘을 빼야 합니다. 힘을 주는 순간 목이 굳습니다. 듣는 사람에게는 딱딱하게 들리죠. 그래서 고음을 내려는 테너 가수는 항상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합니다. 외국에서는 세계적인 테너들이 공연에서 고음을 제대로 소화 못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저는 호세 카레라스를 좋아합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너무 기계적인 느낌인데 반해 호세 카레라스는 호소력이 있고 감성이 풍부합니다. 또 제게 노래를 가르쳐주신 문익환 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님과 최상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님도 좋아하죠.”“아무래도 초기에 고생했던 게 기억에 남죠. 한 2년 전에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했는데 제가 대표곡 중의 하나인 ‘꽃의 노래’를 부르는 역할을 맡았어요. 저는 감독선생님이 배역을 정해주니 당연히 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고 공부를 했는데 너무 어렵더라고요. 더구나 가사가 불어여서 외우기도 쉽지 않았구요. 한 달을 고생하다가 개인교습을 해주는 선생님한테 너무 어렵다고 했더니 그 선생님이 ‘전공자도 부르기 힘든 노래’라고 하더군요. 피아노 반주도 엇박자로 들어와 노래에 방해가 되고 음조도 B플랫, C까지 올라가 정말 애를 먹었어요. 결국 3개월 특별과외를 받았고 썩 잘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해냈지요. 그거 하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저는 일단 시작하면 깊게 몰입하는 스타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집중력이 강하죠. 이왕 시작한 만큼 오래도록 하고 싶은 게 제 생각입니다. 테너이신 안영일 전 서울 음대 학장님은 지금 연세가 80이신데도 무대에 올라가십니다.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도 70세나 됐어요. 저 때문에 성악을 시작한 분이 두 분이 계세요. 한 분은 금호전기 박영구 회장님이신데 두 달 전부터 시작을 하셨고 또 다른 한 분은 전금홍 하몬아시아 대표에요. 이분들은 저보다 연세가 많으십니다. 제가 55세에 성악을 시작했는데 이 분들에 비하면 늦지 않은 겁니다.”“독창회 한 번 해야죠. 서영태 독창회요. 사실 전 지난 4월 20일에 독창회를 하려고 이미 1년여 전에 부를 노래까지 다 선정하고 연습을 했었어요. 그런데 작년 10월에 경제위기가 와서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됐지요. 환차손으로 손실이 계속 불어나는 상황이어서 도저히 성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연기했어요. 제가 그런 상황에서 독창회를 하면 사람들이 ‘저 사람은 일은 안하고 노래만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성악하는 사람들의 꿈은 독창회를 여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냥 친한 사람 앞에서 노래 공부한 거 들려주는 데 의의를 찾고 싶습니다.”“사실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업무에 방해가 안 된다고 말할 수 없겠죠. 그러나 큰 영향은 없습니다. 회사 업무가 끝나고 노래연습을 하니까요. 제가 회사에서 하는 역할은 큰 방향을 제시하거나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파악해서 개선하는 일이 대부분이죠. 결재도 주로 PC나 휴대폰으로 합니다. 전 가사도 아침에 운동을 하면서 외웁니다. 좋아진 점은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부드러워졌다고 하더군요. 사내 음악회에서 연미복입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일할 때는 굉장히 까다롭거든요. 완벽주의자인데다 기대수준이 높아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다고 하죠.”“순수 아마추어 성악가들의 모임입니다. 대기업 CEO는 저 한명이고 법조인 한의사 치과의사 대학교수 광고인 등 다양한 분들이 모여 있어요. 매월 1회씩 우리끼리 만나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발표합니다. 그래서 가사를 외워야 합니다. 6개월에 한 번씩 공연을 하는데 상반기에는 실비만 받지만 하반기에는 비싼 값을 받고 공연을 합니다. 이 때는 기업체 후원도 받습니다. 수익금은 소아암재단에 기탁합니다.”“성악은 일반인들이 시도를 잘 안 하는 영역인데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힘들지만 역시 도전을 해서 극복했다는 성취감도 있지요. 약 3년을 배웠는데 제가 봐도 많이 늘었어요.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욱 열심히 했지요.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도 가사를 외우곤 했으니까요.”“사진을 배우고 있지만 아직 내세울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원래 골프를 잘 쳤어요. 그런데 박사과정 공부를 하느라 3년 동안 못 치다가 올해 봄에 과정이 끝나 다시 시작을 했어요. 과거에는 70대 초반을 쳤는데 다시 레슨을 받고 최근에 76타를 쳤지요. 영화는 블루레이 타이틀이 1000여장 있습니다. 시골집에 홈 시어터를 만들어놓고 가끔 봅니다. 요즘 나오는 영화는 너무 폭력적이어서 많이 보지는 않습니다. 같은 영화라도 반복해서 보면 안 보였던 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새로운 것 같습니다. ‘카사블랑카’는 수도 없이 봤어요.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요즘 다시 보니 정말 좋더군요. 좋은 장비로 영화를 보면 감동이 더 크죠. 영화 한 편 보고 평을 써보면 30∼40페이지 정도 분량의 글은 충분히 나오는 것 같습니다. 비즈니스를 했던 사람들의 시각에서 본 영화는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많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은퇴 후 영화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습니다.”현대오일뱅크 사장건국대 경영학과고려대학교 경영학 석사로얄뱅크오브캐나다 서울지점 심사부장두산씨그램부사장살로만스미스바니 대표정리 김태완·사진 이승재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