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형 만다라를 그리는 화가 박서보

지가 빨아들인 색이라 어머니 젖가슴보다 더 부드럽고 아늑하고 편안하다. 화가가 수없이 쓰다듬어 만들어낸 색이다. 거기에서 신기를 느낀다. 색이 주는 행복의 극치를 맛본다. 그만 기절할 것 같다.”지난 7월 초 경기도 미술관에서 막을 내린 박서보 씨의 전시회를 다녀온 누군가가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글 중 일부다. 그가 그림을 제대로 꿰뚫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화면에서 튀어 오른 한지가 반복적인 선을 긋고 있는 입체 회화. 이를 위해 작가는 두 달여 간 물에 담가 두었던 한지를 캔버스에 몇 겹으로 바르고, 그 위에 물에 풀어 물감에 갠 한지를 올려서 4B연필이나 자로 수백 번 그어 ‘날(결코 예리하거나 날카롭지 않다)’을 세운다. 그런 다음 또 다시 색을 입히는 과정이 이어지니, ‘화가가 수없이 쓰다듬어 만들어낸’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다양한 색채의 모노크롬 작품을 여한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이런 색상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이전에는 흑색과 백색 아니, 거무스름하고 희끄무레한 무채색만 등장했었다.“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 항에 놓이느냐가 동서양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서양에서는 헬레니즘 이후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이원화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면서 회화에서도 원근법, 소실점 같은 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나로부터 보니까 사물이 멀리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노크롬 회화 또한 여러 색을 쓰는 다색주의에 반대해 나타난 상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게 아니다. 동양은 자연과 인간을 일원화해서 본다. 자연에 가깝게, 자연에 살고…. 내가 그린 흑색 그림도 어린 시절 부엌에서 보았던 자연색을 표현한 것이다. 아궁이에 군불을 땔 때 생기는 그을음이 주변 벽이며 천장에 묻기를 여러 번.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거무스름한 색이다. 손을 집어넣으면 계속해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런 오묘한 빛깔이다.”55년이 넘도록 그림을 그리면서 ‘죽어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원칙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한국 사람일지라도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한국적 감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박서보 씨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지역의 좋고 나쁜 여러 가지 사건, 뉴스를 보고 들으며 한국적인 사회와 정서에 기꺼이 관리당하고자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중간 중간에 사각형 모양이 파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마다 위치와 형태가 모두 다른 이것은 이른바 ‘숨구멍‘이다. 반복되는 수많은 선 속에 뜬금없이 들어서 있는 이것은, 보는 사람에게는 선을 추적하느라 바쁜 시선에 잠시나마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고 그림에는 꽉 들어찬 선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창을 내 준 것과 다름없다. 이런 인간적인 배려와 감성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작가 박서보. 30년 넘게 해 온 그의 ‘묘법’ 작업을 보고 ‘변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화가의 작품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혹은 작품 세계를 이해했거나 둘 중 하나다. 작가는 초기에는 화면의 물감이 완전히 마르기 전 연필로 반복적인 선을 그었고, 1980년대 말부터는 물에 불린 한지를 바르고 다 굳기 전에 연필로 선을 그어 골을 만들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가지런히 늘어선 골 하나하나는 최소한 100번 이상씩 그어서 생긴 것이다. 단순 작업을 여러 번 거듭하는 작품의 과정을 보고 있자면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나에게 그림은 수신을 위한 도구다. 수신의 도구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세계관이 기본적으로 변했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 당연히 작품도 달라진다. 예술은 작게는 개인의 경험, 크게는 시대의 산물이니까. 작품이 완성되는 원리는 드럼 세탁기와 비슷하다. 여러 가지 빨랫감이 그 안에서 뒤엉켜 막 충돌하고 나면 물로 헹궈지고 말려서 나오듯이 주변의 자연, 보고 느낀 것들이 감성 속에서 범벅이 되었다가 정리돼 그림으로 표출되는 것이다.”작가는 ‘불행하게도 20세기에 죽었어야 하는데, 21세기까지 살아서 힘들어 죽겠다’며 2000년 들어 선보이기 시작한 빨간 그림, 파란 그림, 노란 그림, 초록 그림 등의 단서를 제공한다. 디지털 시대는 이른바 속도의 시대이고 많은 것들이 한번 쓰고 버려지는 1회용 시대다. 몇 번 더 사용할 수 있는 종이컵도 한번 쓰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변해가는 시대의 속도에 부응하지 못하면 퇴보하고 낙오되기 일쑤다.“명품 카메라를 백 점 가까이 모았었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니까 그냥 방치될 수밖에 없더라. 얼마 전에는 기능이 훨씬 좋은 신형 카메라가 나와서 부랴부랴 샀더니 아날로그 필름으로 치면 ‘한 마키’도 안 찍었는데 그새 200만 원이 내려 버렸다. 이처럼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와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평생직장 개념이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은 아니다. 60세가 정년이었는데 이제는 30대가 아닌가. 이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기 힘겨울 수밖에 없다. 21세기는 스트레스 병동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작가는 캔버스에 자신의 생각을 쏟아 놓았다. 그 시대에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내 고민도 못 털어놓는 이때에 작가의 번뇌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있겠는가. 예술도 디지털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한 사람이 예술품을 보면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말하자면 예술은 치유의 공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색채 작업 중에는 형광 빨강도 있고 핫 핑크도 있다. 감성을 흥분시키는 컬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맛’을 거쳐 나오면 ‘계도된 문제아’처럼 차분하고 평안한 느낌을 준다.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초과 수요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말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에서의 전시 계획을 세웠지만 그의 전화기는 여전히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 이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은 21세기형 만다라인지도 모른다.“내가 그린 흑색 그림도 어린 시절 부엌에서 보았던 자연색을 표현한 것이다. 아궁이에 군불을 땔 때 생기는 그을음이 주변 벽이며 천장에 묻기를 여러 번.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거무스름한 색이다.”글 정지현 미술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