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의 초록이 눈부시다. 산등성이마다 새잎에 새순이 풍성하다. 신록의 화음이 여름을 재촉한다. 밤이 되자 소쩍새가 이 골짝 저 골짝서 운다. 해가 가고 나이가 들어도 봄이 한창인 이즈음 들리는 소쩍새 소리는 정겹기만 하다. 저녁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울어대는 무논의 개구리 합창이 들녘의 풍요를 기약한다.서울에서 출발해 강경을 지나자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모내기 모판 사이로 논마다 자운영이 연홍색과 연초록의 배색으로 인상파 그림처럼 바람에 일렁인다. 정읍을 거쳐 장성 갈재를 넘으니 남도의 공기가 상쾌하다. 길섶 개오동나무마다 연보라 꽃송이를 한껏 매달고 오월 한 봄의 자연을 즐기고 있다. 담양. 조선 정원문학의 산실이다. 무등산 동쪽 그림같이 펼쳐진 원림 사이로 정자며 고옥들이 즐비하다. 조선시대 전통 정원으로 손꼽히는 소쇄원(瀟灑園)을 비롯해 조선 사대부 정자의 아름다음을 한껏 보여주는 송강정과 면앙정 그리고 명옥헌 등 담양은 그야말로 한 편의 문학이요, 한 폭의 그림이다.고향의 자연에서 은거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문인 양산보(梁山甫, 1503~57)의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별서정원이란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野合)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해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을 말한다. 글자 그대로 요즘의 별장인 셈이다.양산보는 창평에서 창암 양사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7세 되던 중종 14년(1519)에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조광조가 신진사류를 등용하고자 실시했던 현량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받지 못했다. 바로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고 관직의 무상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출세를 단념하고 18세(1520)에 고향인 창암촌으로 돌아와 자연에서 은거하기를 결심하고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소쇄원은 양산보가 창암촌 산기슭 계간(溪澗)에 서른 살부터 짓기 시작하여 서른아홉 살이 되었을 때 거의 완성을 보았다. 정자와 독서당을 짓고 축대를 쌓아 계곡의 부족한 공간을 넓히며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는 등 자연과 벗하며 사시사철을 보냈을 것이다.‘소쇄’라는 말은 육조시대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 은자는 속됨을 털어낸 밝은 의표와 세속의 더러움을 벗어난 소쇄한 생각으로 백설을 헤아려 깨끗함을 겨루고 푸른 구름 위로 곧바로 올라가야 함을 이제야 알겠구나…”라고 하였다. 양산보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잘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소쇄원이 있는 지곡리에는 김성원이 세운 식영정과 정철의 환벽당이 지척에 있어 소쇄원과 더불어 한 동네에 세 절경이라 불렸다. 이곳은 임억령 김인후 정철 고경명 김성원 등 많은 문사가 교유하던 곳이기도 하다.양산보는 처사공실기(處士公實記)에서 당나라 이덕유가 평천장(平泉莊)을 조성하고 그 자제에게 평천장의 나무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양도하지 못하도록 한 고사를 따라 자기가 지은 소쇄원 역시 남에게 양도하거나 후손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소쇄원의 원형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로는 1775년에 간행된 ‘소쇄원도(瀟灑園圖)’의 목판과 하서 김인후(1510~60)가 쓴 소쇄원 ‘사십팔영(四十八詠)’의 시가 남아있고, 고경명(1533~92)이 1574년 4월 소쇄원을 답사하고 쓴 ‘유서석록(游瑞石錄)’이 있다.‘흉회쇄락은 여광풍제월이라’오월, 소쇄원 오르는 길섶 아침 햇살이 싱그럽다. 계곡을 끼고 오르니 대숲이 하늘을 가린다. 작은 다리를 건너 완만하게 굽은 숲길이지만 길 앞이 보이지 않아 안으로 무엇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대숲의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서정이 듬뿍 묻어난다.한 이삼 분 걸었을까. 대숲을 벗어나자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목백일홍 동백나무 측백나무 오동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 고목들이 계곡의 바위 사이로 빼곡히 들어온다. 계곡 건너 편 아담한 기와집 한 채, 광풍각(光風閣)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높다란 축대 위에 산뜻한 제월당(霽月堂) 와옥 한 채가 산중에 걸려 있다. 이 광풍각이니 제월당이니 하는 당호는 송나라 황정견이 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은 마치 비갠 뒤 햇빛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 떠오르는 달빛과 같다(胸懷灑落如光風霽月)”고 한 데서 광풍과 제월을 차용한 것이다. 부르는 이름도 좋고 뜻도 좋다.광풍각, 작지만 작지 않은 공간시내 다리를 건너 몇 걸음 자리를 옮기니 광풍각 돌담 안 황홀하게 피어 있는 황매화가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가운데 한 칸을 온돌방으로 두고 사방을 마루로 깔은 광풍각은 들어열개 문을 삼면으로 열어젖히니 그야말로 기둥만 남은 완연한 정자다.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마루에 올랐다. 시원한 물줄기에 바람까지 부니 여름 정취가 그만이다. 계곡 건너 대숲에서 나는 새소리가 투명하다.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 사이로 산다람쥐 발길이 잦고, 할미새의 몸놀림이 나비같이 가볍다. 광풍각 조선 소나무 둥근기둥을 어루만진다. 앞으로는 다듬어졌지만 뒤로는 자연목 그대로의 휨이 눈에 띈다. 휘면 휜 대로 다듬어졌으면 다듬어진 대로 세월의 멋이 묻어난다.광풍각의 백미는 마루 가운데 온돌방이다. 사방이 겨우 2m 남짓한 아주 작은 방이다. 주인과 손님이 마주 앉아 주안상이라도 놓는다면 더 남을 공간도 없다. 서로의 체온을 고스란히 느낄 만큼 정다운 공간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들어열개로 문을 열어 바깥 풍경을 방안으로 들이다가 겨울에는 문을 닫고 온돌에 불을 지펴 온기로 세상의 따뜻함을 나누었을 것이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공간, 삼면에서 새어 들어오는 반투명의 창호 빛으로 작은방이 작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정겨운 공간이 되게 바꾸었던 양산보의 미감에 감탄할 따름이다. 광풍각 작은 공간이 우주의 절대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제월당, 마당 가득 달빛이소쇄원 대나무 숲에서 생황(笙篁) 연주라도 하듯 바람소리가 댓잎을 흔든다. 선비의 청아한 거문고 소리가 들리던 곳, 봉숭아꽃이라도 피어나고 꽃잎이 계곡물을 타고 흘러내리던 봄날, 무릉도원이 따로 없던 이곳 계곡 바위에서 지난해 담가 놓았던 송순주 한 잔을 권하며 마음 맞는 벗님네와 시 한 수 씩 읊다가 삼복더위엔 매미 소리 들으면서 계류에 탁족이라도 한다면, 소쇄의 마음이 절로 일어나 세상사 근심걱정이 절로 사라질 듯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제월당으로 자리를 옮겼다.광풍각이 손님들과 담소하던 사랑이라면 제월당은 주인의 독서 공간이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그중 바라보기에 왼쪽 한 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높다란 대를 쌓고 시원하게 앉힌 건물은 소쇄원의 중심 공간이다. ‘제월당’이라고 호방하게 쓴 우암 송시열의 글씨에서 당대 풍류를 여실히 보여준다.가을, 제월당에 마루에 정좌하고 어둠이 내리길 기다리는 동안 들녘의 풍요와 계절의 바뀜에 한 해를 생각할 즈음, 광풍각 건너 동산에서 보름달이 덩두렷이 떠올라 달빛이 제월당 앞마당에 하얗게 내리면, 그 차고 맑은 기상이 마음의 찌꺼기와 찌든 때를 고스란히 사라지게 할 것이다.밤이 깊어지자 대숲에서 불어오는 이상한 소리에 방문을 열고 바깥을 살피는 주인의 심사에서 가을이 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덮어두었던 구양수(歐陽脩) ‘추성부(秋聲賦)’를 꺼내 다시 읽는다. 생각만 하여도 조선시대의 선비의 일상이 새롭게 그려진다.유월의 순채 맛벽오동 심은 옆에 대봉대(待鳳臺)라 불리는 초정(草亭)을 두었다. 봉기불탁속(鳳飢不啄粟)이라 했던가. 봉황은 배가 고파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 하거늘 세상이 어지러워 출세하지 않고 봉황이 날 때까지 때를 기다려 은거로 자적하겠다는 심사일까. 아니면 글자 그대로 봉황새를 기다리는 소쇄원 주인의 소박하고 어진 마음일까. 대봉대를 끼고 오곡문(五曲門)이 둘러쳐 있다. 담장 아래 계류가 흘러들어 바위를 감싸고 흐르는 물소리에 새들이 즐거워한다. 매화나무 심고 춘설이 분분할 때, 피어나는 설중매 감상에 흥을 돋우던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 쓰인 매대(梅臺)에 오월 초여름 아침 햇살이 밝게 내린다. 유월 보리가 필 무렵 살찐 옥 같은 농어회와 어린 순채의 맛이 일미였다는데 소쇄원 입구 장방형 연못에 순채나물을 심고 풍미를 즐겼던 듯하다. ‘사십팔영’ 가운데 제41영의 ‘연못에 흩어진 순채싹(散池蓴芽)’이라는 시구를 보자.장한(張翰)이 강동으로 돌아간 뒤 張翰江東後풍류를 아는 이 그 누구인가 風流識者誰농어회를 미쳐 마련 못했으니 不須和玉膾오래도록 물위 순채만 보소 要看長氷絲장한은 오(吳)나라 사람으로 진(陳)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먹고 싶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 강동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양산보도 참으로 인생의 풍류를 음미하고 살았던 것이다.북송의 문장가 동파 소식은 적벽부(赤壁賦)에서 이르기를 “천지만물에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내것이 아니라면 한 터럭이라도 취할 수 없지만, 강가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위에 뜬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음악이 되고 눈으로 보면 경치가 되어, 이것을 가져가도 금하는 사람이 없고 사용해도 닳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창고다”라고 했다. 광풍각에서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물 한 줄기, 풀 한 포기, 산 구름 풍경이나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눈비내리는 자연의 소리야말로 누구든 눈 크게 뜨고 귀 활짝 열고 마음껏 보고 마음껏 듣고 무진장 즐겨도 누가 뭐랄 이 하나 없다. 소쇄원의 삶 그 자체가 은자의 행복이다.아름다운 기억계절이 여름을 향한다. 소쇄원 맑은 물에 귀를 씻고 동산 위 밝은 달에 눈을 닦는다. 하릴없이 가는 해가 야속도 하지만 다가올 새 날도 기다려진다. 오늘 일이 내일 삶의 시금석이다. 어제는 갑자기 바람이 불고 먹구름에 비를 뿌렸다. 아침, 하늘이 투명하고 햇살이 눈부셔 새날이 되었다.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소쇄원 광풍각 마루에 걸터앉아 들려오는 새소리에 마음 앗기던 그때가 선경이다. 오늘의 나도 내일엔 그리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까. 창을 열고 높아진 아침 하늘을 무심히 본다. 나도 모르게 기억 저편 묻어 두었던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린다.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사람 마음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왜 이 좋은 아침에 그 시가 생각나는지, 왜 마음이 찡해지는지. 아름다운 기억이 흑백영화 모노톤 트럼펫의 애잔함에 녹아든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