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워런 버핏

내에도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며 높은 수익을 낸 가치 투자의 귀재들이 있다. 이채원 한국밸류자산운용 전무를 비롯해 박정구 가치투자자문 사장, 강방천 에셋플러스투자자문 회장, 허남권 신영투신운용 상무, 이택환 TSI 대표 등이 꼽힌다. 그들은 어떤 길을 걸어왔고 그들 나름의 투자 원칙과 방법은 무엇인지가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이채원 전무는 국내 자본시장에서 가치 투자의 개척자로 꼽힌다. 그가 이런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적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 1999년 말 정보기술(IT)주가 폭등하며 대세 상승장을 연출할 때 이 전무는 씁쓸히 시세판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가 투자한 가치주는 주로 시황에 상관없이 장시간에 걸쳐 더디게 움직이다 보니 시장에서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투자자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고 이 전무는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한 달간 요양원 신세까지 졌다. 그러나 ‘실패자로 낙인 찍힌 채 살 수 없다’는 오기와 더불어 자신의 투자 철학에 대한 확신을 버릴 수 없었다. 현업에 복귀해 동원증권 고유 자산 운영을 맡게 된 이 전무는 그때부터 가치 투자의 진정한 맛을 보기 시작했다. 6만 원대에 산 롯데칠성은 5배나 뛰었고 농심은 4만 원에 사서 9만 원에 처분했다. 5년 넘게 보유한 유한양행 삼천리 SK가스 등에서는 수십 배에 달하는 수익이 났다. 그가 고유 자산을 운용한 6년간 누적수익률은 435%로, 코스피지수 누적수익률을 56.40%나 웃돌았다.이 전무는 “주가수익률(PER)만 보는 단순 가치 투자의 시대는 갔다”고 주장한다. 요즘 같은 상승장에서 PER가 5배 미만을 맴돌고 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시장 지배력을 갖추고 진입 장벽이 두터우며 구조적이고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이익을 내는 주식이 주목 받을 가치주”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먹고 쓰고 입는 소비재 분야의 내수주이면서 시장의 관심에서 소외된 중형주, PER는 10배 미만인 종목”이라고 덧붙였다.박정구 사장도 이채원 전무와 쌍벽을 이룬다. 2003년 회사를 설립한 후 2006년 초까지 3년간 400%에 이르는 누적수익률을 내며 시장에서 실력을 인정 받았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 벽면에는 상장사 사업보고서 파일로 꽉 차 있다. 그가 가치주를 골라내는 보고인 셈이다. 박 사장은 자신의 종목 선정 원칙에 대해 “주식을 고를 때는 과거가 믿을 만한 종목 중에서 앞으로도 좋아질 만한 주식을 추려낸 후 적정한 가격에 산다”고 말했다. 기업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과거만큼 확실한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건 없다는 이유에서다. 박 사장은 고리타분한 주식이 최고라고 주장한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이 8% 이상이면서도 주가순자산배율(PBR)이 0.5배 미만인 종목 중 성장성이 낮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주식이 그의 관심주들이다. 특히 지속적으로 설비 투자를 해야 하는 업종이나 종목은 PBR가 아무리 낮아도 피한다. 박 사장은 “사양산업으로 인식되는 업종에 숨어 있는 자산주들이 의외로 많다”고 강조했다. 성장성의 한계로 설비 투자에 나설 이유도 없고 이익이 고스란히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멘트나 기계 방직 회사들도 그에게는 관심주 중 하나다.종자돈 1억 원을 1년 10개월 만에 150억 원으로 불려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강방천 회장은 ‘생활 속의 가치주’를 강조한다. 그는 “가장 좋은 주식은 생활 속에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비타500이 인기를 끌면 광동제약을 사고 할인점에서 A사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면 A사를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강 회장은 또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그는 자신의 집 주변에 물류창고가 많이 생기는 걸 눈여겨봤다. 중국 공장에서 만든 물건이 한국에 들어와 보관되는 물류 기지인데 이걸 보고 그는 중국 공장에 쓸 원자재를 공급해 주는 업체나 이를 배송해 주는 해운주의 수혜를 예상했다. 이렇다 보니 신문기사나 광고 한 줄도 그에게는 좋은 투자 정보가 된다. 음주 운전을 예방하자는 광고가 쏟아지는 걸 보곤 사고율이 낮아지면 보험주가 수혜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투자 대상을 고르는 데 5단계를 거친다. 우선 특정 기업이나 산업의 영속성을 따진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수년 내 기업이 없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면 투자 대상에서 제외한다. 또 얼마나 독점적이고 시장 지배력이 있는지 검토한다. 3단계에서는 주당순이익을 전망하고 적정주가수익비율을 산출해 주가 수준이 낮은지 체크한다. 여기에 최종적으로 보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경영자의 자질이다.허남권 상무는 장기 투자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마라톤 투자자로 꼽힌다. 농심 고려제강 동아타이어 유한양행 4개 종목은 10년째 보유하고 있다. 농심 유한양행은 3배 이상 수익을 안겨다 줬다. 그가 10년째 보유한 고려제강은 올 들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연초보다 50% 가까이 올랐다. 장기 투자를 고집한 그가 10년간 거둔 연평균 수익률은 18%에 달한다. 그에게 10년간 돈을 맡긴 투자자라면 누적수익률이 520%에 이른다. 그는 투신사 펀드매니저로 있으면서도 오로지 정통 가치주와 배당주 펀드만 고집했다. 그는 가치 투자에 대해 “가치 대비 주가가 싼 종목을 사 적정 가치에 도달할 때까지 보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가치 투자는 영원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적정 가치는 항상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기업 가치가 PER가 오르는 것 이상으로 좋아지면 충분한 투자 대상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과거 PER가 5배일 때 산 농심을 15배인 지금까지도 보유하고 있다.그가 종목 선정의 기준으로 꼽는 ROE나 부채비율 영업이익률 등은 남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는 ‘시세를 산다기보다 회사를 산다’는 개념으로 주식에 투자한다. 한번 투자하기로 마음 먹으면 기업과 평생 같이 갈 생각을 한다. 기업의 대주주와 신뢰를 바탕으로 배당이나 신규 투자 등을 놓고 의견을 나눈다. 그는 위험 관리 방법에 대해 “종목 선정 때 위험이 가장 낮은 종목을 고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이택환 대표는 “가치 투자도 공격적으로 하라”고 주문한다. 그는 2005년 ‘유리스몰뷰티’라는 중소형주 전문 펀드를 통해 1년 만에 123%라는 수익률을 내며 혜성처럼 떠올랐다.그는 숨겨진 가치를 찾는 스타일이다. 이 대표 역시 기본적으로는 기업의 재무제표를 본다. 그는 “기업의 미래를 예측하려면 과거 10년 치의 대차대조표를 샅샅이 분석해 과거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가치 투자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저PER주를 고른 후에는 자산 가치가 우수하며 안정적인 이익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또 시장 지배력이 있는 종목들 가운데 주가가 가치 대비 30% 이상 낮게 평가된 종목을 고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그는 투자 종목의 숨겨진 가치를 찾고자 한다. 재무제표에 지나치게 낮게 반영된 사옥(땅)이나 자산이 있는지 뒤지고 직접 가서 확인해 보기도 한다. 그는 특히 “대주주가 자기 회사 주식을 사는 기업은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경험상 대주주가 자사 주식을 지속적으로 사는 종목은 결코 수익률에서 실망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중소형주보다는 대주주 지분율이 최소한 40% 이상으로 높은 종목을 선호한다. 이 대표는 또 “성장성 없는 가치주는 사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이 점은 다른 가치 투자자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그는 “현 주가가 현 기업 가치에 비해 얼마나 저평가돼 있는지 따지는 건 기본이지만 이보다는 기업의 미래 가치를 따져 본 후 거기에 비해 앞으로 저평가될 종목에 점수를 더 준다”고 강조했다.최근 투자자문사를 직접 경영하면서부터는 그가 추구하는 집중 투자를 더욱 고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펀드에 보통 40~50개 정도를 편입하지만 이 대표는 20개 이내로 압축했다. 그는 “주식 편입 종목을 늘리는 그 자체가 위험을 높이는 것”이라며 “잘 알고 밸류에이션이 낮고 좋은 기업만 사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들 가치 투자 전문가들은 국내 주식시장에 일대 변화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채원 전무는 “워런 버핏 등 가치 투자 대가들의 투자 성과가 국내 투자자들의 투자 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또 “국내 경제도 선진국형 경제 구조로 바뀌면서 성장성이 둔화되고 부동산 경기나 내수 회복 등도 불확실해지면서 기업의 가치에 주목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최근 부동산 경기 침체도 가치 투자 부각에 영향을 줬다. 허남권 상무는 “가치 투자가 부동산 투자의 대체 시장으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부동산에 익숙한 국내 투자자들이 투자 자산을 주식으로 옮기면서 부동산 같은 주식을 찾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부동산처럼 없어지지 않고 변동성도 크지 않은, 즉 망하지 않고 안정적인 수익을 주는 기업에 투자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들 가치 투자자들은 이런 투자 분위기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이택환 대표는 “이제 시장의 초점은 첨단이냐 굴뚝이냐가 아니다”며 “2~3년간 실적이 꾸준히 좋아지는 종목이 주가도 꾸준히 오르는 구도가 증시에 제대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가치 투자가 빛을 발하는 증시 환경, 또 이것이 향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점 등은 국내 가치 투자 군단을 형성한 이들의 투자 기법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