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철학

마하에 있는 워런 버핏의 사무실 책상에는 ‘너무 어려운(Too Hard)’이라고 이름 붙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다름 아닌 버핏의 실질적인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최고투자책임자(CIO) 지원자의 서류를 모아 놓은 곳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600여 통의 지원서가 쌓여 있다. 버핏은 “이 중 3~4명을 CIO 후보로 우선 선발해 각각 20억~50억 달러의 자금을 준 뒤 운용 성과를 보고 CIO를 결정하겠다”고 이번 주주총회에서 밝혔다. 버핏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에 쏠린 세계의 관심은 엄청나다. 벅셔해서웨이가 운용하는 총자산은 1320억 달러다. 이 자산을 운용할 책임자인 데다 버핏이란 엄청난 큰 나무를 대신하는 사람인 만큼 투자 철학과 성향이 어떤 사람일지는 주목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아직 누가 버핏의 후계자가 될지는 모른다. 버핏도 “어려운 작업”이라며 “잘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다만 조만간 3~4명의 후보를 선정해 테스트를 거칠 방침임을 밝혔다. 이들에게는 이전 직장보다 많지 않은 월급을 주되 운용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번 주총에서 버핏은 CIO가 갖춰야 할 성향과 조건을 비교적 자세히 제시했다. 이를 통해 버핏의 투자 철학도 어느 정도 드러났다. 버핏이 제시한 후계자의 자질을 통해 버핏의 투자 철학을 살펴본다.버핏이 후계자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건 자질은 ‘예상치 못한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갈수록 금융상품이 복잡해지고 시장이 글로벌화됨에 따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험이 나타날 수 있다”며 “이런 위험은 정교한 금융 기법으로도 회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따라서 미리미리 이런 위험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벅셔해서웨이의 자산을 오롯이 보존할 수 있다는 주문이다. 가치투자의 대가답게 수익보다는 리스크 관리를 우선순위에 꼽은 셈이다.실제 버핏은 그 자신이 리스크를 회피하는 것을 제1의 투자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는 두 가지 투자 철학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첫 번째는 ‘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첫째 항목을 항상 지킨다’는 것이다. 결국 돈을 잃지 않으려면 안전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먹는 게 적더라도 안전한 주식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투자 철학의 전부라는 말도 된다. 그는 “증시에서 타자가 스트라이크 아웃될 일은 없다”며 “가장 치기 좋은 공이 나타날 때까지 참을 성있게 기다리면 된다”고 리스크 회피의 필요성을 강조한곤 한다.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후계자가 갖춰야 할 두 번째 조건으론 역시 장기적 성과의 꾸준함을 꼽았다. 버핏은 “벅셔해서웨이의 운용 자산은 일반 펀드와 다르다”며 “최근 좋은 성과를 냈거나 우수한 두뇌를 갖춘 사람보다는 꾸준하고도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즉 장기 투자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로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매년 10% 이상의 수익률을 내기는 힘들다”며 “그렇지만 시장 수익률 위주의 꾸준한 성적표를 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단기적 성과가 혁혁한, 내로라하는 펀드매니저를 후계자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실제 그는 1965년부터 벅셔해서웨이를 운영하면서 마이너스 수익률을 냈던 적이 지난 2001년 딱 한번 뿐일 정도로 꾸준한 실적을 내왔다. 반대로 연간 수익률이 40%를 넘은 경우도 딱 두 번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벅셔해서웨이는 코카콜라 아멕스 등 한번 사들인 주식을 좀처럼 팔지 않는다. 버핏이 포스코에 대해 “앞으로 장기 보유할 계획”이라고 통보한 것도 이런 장기 투자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버핏이 후계자의 조건으로 내건 세 번째 자질은 통찰력과 판단력 감수성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버핏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판단력과 시장 참가자와 기관투자가의 행동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 정서적으로 안정된 감수성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그래야만 시장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뚝심과 판단에 따른 투자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이런 능력은 다름 아닌 버핏이 갖춘 자질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컴퓨터도, 주가 정보 단말기도 없다. 사무실에선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 애널리스트도 두지 않고, 애널리스트의 투자 의견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기업 분석 보고서만 보고 자신의 원칙과 판단에 따라 투자 대상을 고른다.버핏이 ‘후계자의 모델’로 제시한 게이코(GEICO)보험사의 최고운용책임자인 루 심슨(70)도 똑 같다. 버핏과 마찬가지로 애널리스트의 보고서도 읽지 않은 채 투자 대상을 찾기 위해 심도 있는 연구하기를 즐긴다. 심슨은 “많은 투자자들이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는 데 비해 많이 생각하고 적게 행동하려 한다”는 말로 그의 투자 원칙을 대신했다. 버핏도 섣불리 종목을 선택하기보다는 오래오래 생각해서 거래를 최소화하는 투자 원칙을 가졌다는 얘기도 된다.버핏이 내건 후계자의 네 번째 자질은 적어도 S&P500지수 수익률을 능가해야 한다는 점. 버핏은 “CIO 후보들이 S&P500지수 수익률과 비교해 어느 정도 수익률을 냈는지 따져 인센티브를 지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투자 능력의 잣대를 S&P500지수로 삼고 있다는 얘기다.실제 벅셔해서웨이는 매년 발행하는 애뉴얼 리포트 맨 앞에 벅셔해서웨이 수익률과 S&P500지수 수익률을 비교해 싣고 있다. 1965년부터 작년까지의 벅셔해서웨이 연평균 수익률은 21.4%. S&P500지수 수익률(10.4%)을 배 이상 능가하고 있다.버핏은 이와 함께 “간단한 인터뷰만 하면 후계자감을 금방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칭송하는 루 심슨도 버핏이 30분간의 인터뷰에서 찾아낸 사람이다. 자신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고르기가 쉽다는 얘기이지만, 뒤집어 보면 가치 투자의 달인이 되려면 성격적으로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한다는 말도 된다.버핏은 이번 주총에서 후계자의 자질과 조건에 대해 꽤나 자세히 얘기했다. 이를 투자 철학으로 정리하면 △예상치 못한 위험조차 염두에 둘 것 △장기적 투자 안목을 견지할 것 △통찰력 판단력 감수성을 갖고 상황을 판단할 것 △S&P500지수 수익률을 능가할 정도의 수익률은 유지할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두가 버핏과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버핏을 따라하려는 사람들은 한번쯤 자신과 비교해볼 만한 항목이다.반면 버핏은 이번 주총에서 투자 대상 기업의 기준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이머징 마켓 기업이라도 벅셔해서웨이 차원에서 투자하려면 시가총액이 1억 달러는 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신용평가사인 S&P는 △순이익이 2000만 달러 이상일 것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이 15% 이상일 것 △최근 3년 동안과 직전 분기의 자기자본이익률이 15% 이상일 것 △앞으로 5년 동안 현금 흐름 전망이 양호할 것 등을 기준으로 매년 두 차례 ‘버핏식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버핏이 내부적으로 이런 기준을 갖고 투자 대상을 고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버핏은 이런 계량적인 지표 외에도 나름대로 기업을 고르는 원칙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주를 위한 경영을 하는가 △경영자들은 솔직하고 기업에 헌신적인가 △내가 알 수 있는 산업인가 △세월이 흘러도 반드시 존재해야 할 기업인가 △연차보고서만 봐도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가 등이다.이렇게 보면 버핏의 투자 철학은 ‘믿을만한 기업과 믿을만한 경영진에 투자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은 ‘사람에 대한 투자’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