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월 더위도 막바지다. 낮에는 그리 뜨거워도 아침저녁으로는 시원함이 다르다. 자정 무렵 화실에서 늦게 귀가하는 길에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어제와 다르게 또렷하다. 가을이 서서히 가까워 온다. 계절은 어김없다. 장마 그치고 폭염에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교향곡 3악장도 입추 지나고 처서로 다가가니 피날레로 치닫는다. 가을을 잉태한 계절, 늦여름이 만삭이다.강진 다산초당 가는 길, 성전을 지나 백련(白蓮)꽃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는 금당리 백련지를 찾았다. 지난해 여름 백련을 보러 이곳을 찾았건만 연꽃은 피지 않고 연잎만 무성했었다. 꽃 사정은 금년도 마찬가지. 연당 가운데 한옥 빈 여름 뜰 풀만 수북하다. 늘어진 버드나뭇가지가 정취를 달래보지만 꽃 없는 초목이 서글프기만 하다. 다시 차를 몰아 강진읍내를 끼고 얕은 풍경 산천이 새롭다. 부드럽고 너른 맛이 바다가 어디쯤 있을 법하여 차창을 내리니 더위와 소금기 밴 바람이 확 몰려든다. 아침 서울을 떠나 남도의 끝자락 강진 도암면 만덕산 귤동마을 다산초당에 도착한 때는 오후 햇살이 길게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서다.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장장 18년에 걸친 강진 귀양살이 가운데 10년을 지내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자기 생애의 한겨울 속에서 동백꽃처럼 붉게 학문과 사상을 피워 올린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다산학’이라 일컫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했고, 가족과 헤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적 고뇌와 아픔이 뼈에 사무친 곳이기도 하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했다.다산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 부친 정재원과 모친 해남 윤씨 부인과의 사이에 팔당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미용(美庸) 호(號)는 삼미자(三尾子)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 세력을 잃은 남인 계열로 그의 고조부로부터 조부까지는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8대에 걸쳐 줄곧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해 온 명문이었다. 다산의 외가(外家)는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 가문이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는 인물화에 탁월해 조선시대 회화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지는데, 윤두서의 셋째아들 윤덕렬의 딸이 바로 다산의 모친이다. 따라서 윤두서는 다산의 외증조이며 윤선도는 외가로 6대조가 된다. 다산의 시가(詩歌)와 서화(書畵)가 지닌 예술적 품격은 외가에서 계승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 시절에도 강진이 해남과 이웃 고을이라 외가친척들과 친밀하게 어울렸으며, 강진의 다산초당도 외가 친척이 되는 귤림 윤단(橘林 尹)의 산정(山亭)이었다. 이렇듯 다산은 자신의 친가가 화평한 인품과 학문적 전통이 있는 학자 가문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녔으며, 외가가 시 서화의 문학과 예술적 정취가 깊이 배어 있는 가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바로 이런 뿌리에서 자양분을 얻어 정밀하고 분석적인 학자로서의 이성과 더불어 섬세하고 풍부한 예술가로서의 감성을 길러 품격 높은 선비로 성장할 수 있었다.1776년, 다산은 15세 되던 해 풍산 홍씨 홍화보의 딸과 혼인한 후 처가에 왕래하느라 서울을 출입했다. 그 무렵부터 매형인 이승훈과 큰형수의 아우인 이벽과 사귀었고 그들을 따라 이가환 등과 교유했다. 이가환은 경세치용학파 실학자인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증손이다. 이익이 남긴 책들을 읽으면서 평생을 통해 추구할 학문의 방향과 뜻을 세웠다. 22세에 소과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고 곧 이어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에 이벽으로부터 처음으로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대해 듣고 책도 얻어 보았다. 그는 서교를 접한 후 넓게 알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던 성벽(性癖)으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는 등 한동안 상당히 몰두했지만 과거 공부에 바빠지고 또 서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을 접하고부터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28세에 대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34세에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를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 사이 정조의 명령으로 배다리를 만들거나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 쌓는 데 쓰게 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겼다.다산이 사학(邪學)에 물든 죄인이라는 죄명을 덮어쓰고 강진에 귀양 온 것은 1801년(순조 1년) 11월,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그 해 봄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 세레명 아오스딩)이 은밀하게 옮기려다 발각된 책롱(冊籠) 사건으로 정약용 3형제가 체포돼 의금부에 투옥되는 일이 벌어졌다.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이가환, 이승환 등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그 자신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 가을에 다산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불려가 문초를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가 없자,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고,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다산은 강진읍 동문 밖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사의재란 마땅히(宜) 지켜야 할 일을 네 가지 조목으로 제시한 것으로, 담백한 생각, 장엄한 용모, 과묵한 언어, 신중한 행동으로 자신을 단속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수양방법인 동시에 유배 생활로 좌절해 자신의 품격을 잃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다산은 강진에서 귀양살이 8년째 되던 해 봄, 마흔일곱 살 때(1808) 윤단의 산정인 귤동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은 다산초당의 차나무가 마음에 들었고, 윤단의 장서 2000권을 볼 수 있고, 멀리 강진포구의 경치와 가까이 담장 안 꽃들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다산은 다산초당의 풍광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초당 주변에서 가까이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광경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살피며 애정 어린 눈길을 주고 있다. 담을 스치고 있는 작은 복숭아나무(拂墻小桃), 문발에 부딪치는 버들가지(撲簾柳絮), 봄 꿩 우는 소리 듣기(暖日聞雉), 가랑비에 물고기 먹이주기(細雨飼魚), 아름다운 바위에 얽혀 있는 단풍나무(楓纏錦石), 못에 비친 국화꽃(菊照芳池), 언덕 위의 대나무의 푸르름(一埠竹翠),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萬壑松波)을 다산팔경(茶山八景)으로 정하고 시로 읊었다. 그가 말하는 다산팔경이란 사방에 펼쳐진 기이한 경치를 꼽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활속을 맑게 들여다보며 시의 주제처럼 찾아낸 그 자신만이 아끼고 즐기며 간직하는 경치다.또한 그는 다산초당 주위에 매화 복숭아 모란 차 작약 수국 석류 치자 등을 가꾸고 세심하게 감상하며 ‘다산화사(茶山花史)’를 지었다. 이듬해 다산은 초당 주변을 새롭게 꾸미면서 초당 앞 비탈에 돌로 단을 쌓아 채마밭을 만들었다. 이어서 연못을 넓히고 꽃나무를 심어 산속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채마밭에다 손수 아욱 오이 부추 상추 무 쑥갓 토란 가지 등을 심었다. 그리고 빈 터에 저절로 나는 비름 고사리 쑥 같은 나물도 알뜰하게 캐다 먹는 전원생활의 맛을 즐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산초당에서 독서와 저술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으며, 몸과 마음이 지쳐 잠시 쉬는 여가에 채마밭을 돌보는 것이었다.다산초당에 두 칸짜리 띳집을 짓고 송풍루(松風樓)라 이름 붙였다. 송풍루의 방이야 보잘 것 없지만 산 위의 집이어서 누각처럼 높고, 밖에서 불어오는 솔바람 소리가 피리나 거문고를 연주하듯 음악처럼 들렸다. 여기에 더하여 무엇보다 그가 소중하게 여긴 2000권 가까운 초당 주인 윤단의 장서였다. 그로서는 다산초당이 솔바람 부는 자연과 쌓여 있는 장서 2000권이 있었기에 이렇게 먼 외딴 산속이라도 학문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다산은 유배 생활의 답답한 심회를 풀기 위해 자주 가까운 사찰을 찾았고 그곳 학승들과도 친밀하게 교유했다. 그중에도 아암 혜장(兒菴 惠藏, 1772~1811)과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은 가장 가까운 학승이었다. 혜장은 다산이 다산초당에 머무를 때 자주 찾아왔다. 때로 차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고 시로 화답했다. 혜장은 다산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지만 ‘논어’와 ‘주역’을 비롯해 성리학까지 해박했다. 혜장은 그에게 유배 생활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는 마음의 벗이었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에서 아직도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1811년 마흔의 나이로 죽었다. 이에 그는 산(山) 과일 한 접시를 손수 따고 마을에서 술 한 사발을 사다가 혜장의 제자 자홍을 시켜 혜장의 영전에 올리게 하고 또 자신이 지은 제문을 읽게 했다. 강진 생활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던 벗 한 사람을 잃은 것이다. 그 정황을 생각으로 그려보기만 해도 눈물겹다.다산보다 스물네 살 아래인 의순은 다산이 마흔여덟 살 때(1809)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가 돌아올 때 그에게 작별의 시를 지어 올리며 다산의 문하에 제자로 입문했다. 의순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동갑으로 만년 추사와 교유하면서 선학(禪學)과 유학, 그리고 시서화 예술의 세계에서 각별한 우의를 나눴다. 이러한 인연은 훗날 추사가 다산초당과 보정산방 등의 현판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의순은 다산초당으로 자주 찾아와서 배웠으며, 대흥사로 돌아가서도 다산초당의 스승을 늘 그리워했다. 의순은 1813년 여름에는 스승의 부름을 받고 다산초당을 찾아가려다가 장마철 심한 비바람으로 되돌아가는 안타까움을 시로 읊기도 했다. 의순은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마재로 스승을 찾아갔으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을 비롯하여 홍현주 등 선비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폭넓게 교유했다.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보여준 자신의 다도생활이 의순에게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짓고, 다도를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완성하는데 깊이 영향을 주었다.다산초당 오르는 길 대나무 소나무 동백이 우거져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초봄, 동백이 피어나고 새들이 숲 사이를 날며 봄의 정취를 반겨하더니, 한여름 녹음이 매미울음 소리조차 가린다. 가는 실개천을 끼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니 석양빛에 다산초당이 나타난다. 초당 오른편 언덕바위에 다산이 손수 쓰고 새긴 정석(丁石)에서 다산의 단아한 성품과 생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묻어난다. 다산이 차를 달이던 부뚜막 바위가 있고, 다산초당 뒤 약천 샘물에서는 맑은 감로수가 샘솟는다. 후끈한 몸에 한 모금 목을 축이니 마음이 탁 트인다. 다산은 다산초당 왼쪽으로 네모진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을 쌓아 둥근 섬을 만들었다. 나무등걸에 홈통을 내어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 속에 물고기를 키우면서 가는 봄비 내리는 날 물고기 밥을 주며 시심을 달래기도 했다. 다산초당은 말없이 자리하고,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천일각(天一閣)이 역사 속으로 걸어간다. 천일각은 다산이 서울 두고 온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흑산도로 귀양 간 둘째 형 약전을 그리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심회를 풀어낸 곳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구강포 앞바다나 죽도 건너편 칠량 땅도 모두 그의 눈길이 닿던 곳이다. 천일각 옆을 지나 만덕산을 넘어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그와 혜장선사가 유(儒)와 불(佛)의 경계를 넘어 오고갔던 그 길이다.다산의 초상화에서 시적인 정감과 고뇌의 열정으로 빛나는 눈빛이 형형하다. 다산의 생애와 사상은 차분하고 단조로운 학자의 그것이 아니라 격동하던 시대만큼 파란만장한 고비를 겪은 결과이다. 청년 시절 서양과학에 눈을 뜨고 천주교 신앙에 접하면서, 낡은 세계가 깨어져 나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지각변동을 겪었다. 이 때문에 다산은 장년기 18년간을 하늘 끝의 변방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추사가 제주 유배지의 척박한 환경에서 학문과 예술에 불굴의 업적을 이루어 냈듯 다산도 역사에 빛나는 학문의 세계를 이루어 냈으니, 하늘은 인재를 그리 내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