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그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홍지연의 미학탐험

지연의 그림은 총천연색 에너지로 발광(發光)했다. 칠해진 색색(色色)은 단청처럼 화려했으나 가볍지 않았고 그려진 면면(面面)은 전통 민화를 모체로 한 ‘생명체’들이었다. 익숙한 그 ‘생명체’는 어떤 것들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억 너머로 희미해져 가는 옛 그림 속 호랑이 용 연꽃 학 매화 등이었다. 작가는 그 모두를 조화롭고 감각적으로 되살려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관통하듯 그려냈다. 먼지 쌓인 옛 그림과 같지도, 또 다르지도 않게 말이다. “사람들이 왜 민화를 소재로 했는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합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준 책이 인연이 됐습니다. 선물로 받은 것인데 조선시대 민화를 모은 책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다가 매력에 빠졌어요. 옛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고 해야 할까요. 그 이후 박물관, 고서적 전문점, 전시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꼼꼼히 모았고 그 안에서 현재의 모티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다양하고 화려한 색들의 결합은 제 생각으로 맥을 잡습니다. 흑백텔레비전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다양한 색에 접근하며 여러 색들을 재배치하죠.”전통 민화에서 받은 강한 인상을 발판삼아 자신만의 고운 빛깔로 완성된 그림. 그녀의 작품은 낡은 기억을 보듬어 새 옷을 입힌, 무심히 지나쳤던 옛 그림의 신비함을 섬세한 관찰력을 통해 들춰낸 것들이다. 이는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있어 왔던 과거의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홍지연의 작품을 대하면 숨은그림찾기 하듯 같음과 다름을 찾아보게 된다. 그림 속 매화는 전통 민화의 그것과 형상은 비슷하지만 색채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판화처럼 선명하다. 그녀가 그린 호랑이는 해학적이며 익살스러운 모습이 민화 속에서와 같지만 색채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다. 왜일까. 이는 어린 시절 외국에서 자란 환경과 성인이 된 후에도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경험 그리고 그녀의 편집증적인 세필질의 영향이다. 신체적 성장을 이룬 곳, 새 삶을 열어준 여행, 작업실에서의 붓질. 이 모든 것은 치밀함에 집착하는 홍지연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엮어진 삶은 작가 자신이자 작품 자체였다. “어린 시절, 건설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외국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남미, 인도, 유럽 등을 수개월씩 돌아다니며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체험했고요. 그런 것들이 저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영향은 현재진행형으로 제 속에서 숨 쉬고 있을 테니 저도 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것이라고 봅니다. 전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많아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못합니다. 모든 자식이 다 예쁘다는 말을 대신할 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죠. 전 제 작품이 그렇습니다. 제 나름대로 모든 작품에 시간과 노력을 쏟기 때문에 저에게는 모두 다 소중해요.”그녀의 작품이 숨 막힐 듯 치밀한 것은 다름 아닌 완성도에 대한 스스로의 혹독한 단련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캔버스 앞에서 또 다시 ‘세필질’을 하는 스스로를 생각하면 가끔 대견하고 놀랍다고 말하는 작가적 기질,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멀리서 보다가 코 닿을 듯 접근해 감상해도 그 기대감을 거스르지 않는다. 흐트러짐 없는 뚜렷함은 ‘가깝거나 멀거나’이다. 작품 앞에 서면 작가가 캔버스에 불어넣는 땀과 노력은 그 ‘아우라’만이 감지될 뿐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홍지연의 작품에서는 눈으로 드러나는 그 치밀한 묘사가 그녀의 내공을 짐작케 한다. 그녀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세필질을 했으며 또 며칠 밤낮을 보냈을까. 작품의 진정성은 이렇듯 작가가 작품에 쌓아 올린 에너지의 결합일 것이다. 홍지연을 보니 실로 ‘숨쉬는’ 작품은 삶의 여정을 성실히 지나칠 때 ‘정직하게’ 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과 작품이 단단한 깍지를 끼고 동체(同體)가 되면, 그 그림이 풍경화든 정물화든 모두 ‘얼굴 없는 초상화’가 됨을 알게 된다. 많은 이들은 홍지연의 작품에 대해 ‘구성이 모던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팝 아트적인 색채가 가미되었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다’라고 평한다. 모두 귀 기울여 볼 말들이지만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떤 특별함을 만들기 위해 작품을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것들의 즐거움 안에서 작품을 해요. 저는 동양화 속의 오래된 형상들을 가져오며 서양화의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냅니다. 부딪치듯이 보이지만 그 자체가 흥미로워요. 또 절대 옆에 둘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색들을 오선지에 음표 그리듯 결합해 보는 것도 좋고요. 멀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모두 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나온 제 안에 있는 공공의 적이자 공공의 목표입니다. 특별히 팝 아트적으로 작품을 만들지도 또 어떤 이즘(ism)을 염두하며 구속받지도 않습니다.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저를 이끌죠.”미술평론가 강우방은 “근원(根源)에 가까울수록 지평(地坪)은 넓어진다”고 말한다. 이는 미술사학자들에게 사료(史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작가 홍지연에게도 잘 어울리는 부분이다. 초석에 놓인 자신만의 즐거움을 기준삼아 시야를 넓혀 작업에 매진하는 과정. 그 과정에 자신을 고스란히 내려놓은 그녀. 이렇듯 앞으로의 작품에 기대를 걸게 하는 그 근원은 그 뿌리가 깊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