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은진의 미학세계

람들은 새벽에 정화수를 받아놓고 기도를 하고, 정월대보름에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어떤 신비한 대상, 경외심이 생기는 대상을 보면 자신의 기복을 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인 듯하다. 이러한 샤머니즘적 사고는 비단 과거의 방식인 것만이 아니라 요즘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화가 김은진,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희생, 구원, 치유와 같은 종교의 성향을 이미지화한다. 그녀의 그림이 중세 시대에 그려진 종교화와 다른 것은 작가 특유의 위트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루이뷔통을 입고 있는 예수와 마리아라니. 이화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뉴욕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를 공부한 그녀는 초기에는 화병, 거울, 사기 인형들을 깨뜨린 후 그 조각을 다시 맞춰 본래의 형태로 복원하는 작업을 보여줬다. 작품의 주제는 힐링(Healing), 곧 치유라는 것. 그러나 그녀는 이후의 작품을 기다리던 몇몇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술계를 떠났다.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하는 등 미술과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지만 이전과 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는 없었다. 그러던 2000년, 마우스를 내려놓고 붓을 든 채 그녀가 돌아왔다. “미대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흔히 말하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사실 없었어요. 친구들이 입시 전에 전공을 정해 진학하는 것처럼 그냥 미대를 선택한 것에 불과했었죠.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때 파리에서 온 선배가 열심히 작업하는 것을 보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도 행복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제야 제 인생에서 그림이 비중을 갖게 된 것이죠.”회화 이외에 설치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미술 작업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림을 접고 컴퓨터 그래픽 등 다른 일을 하면서 보낸 10여년의 시간들은 돌이켜보면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는 그녀. 시간이 지날수록 미술에 대한 미련이 커지고,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종이에 붓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간 그렸던 작품들에 작업실 밖 세상 구경이라도 시켜줄 참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후 다른 갤러리로부터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일민 미술관에서 ‘나쁜 아이콘(1월20일~2월19일)’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다.일상에서 익숙해진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된다 인삼, 동양적 문양, 베개 등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그녀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을 기록하듯 선택해서 그린 것들이다. 인삼은 어렸을 적 한의사 집 친구의 집에서 자주 봤던 이미지를, 동양 문양은 고전 무용을 하던 친척 언니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보던 기억에서, 베개는 집에 늘 있었던 양쪽에 수가 놓인 베개를 떠올려 그린 것이다. “제 작품에 여성, 한국사람, 동양 등과 같은 이미지가 묻어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도적인 면도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제가 동양 여자이고 한국 사람이라는 불변의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니까요. 단지 이미지를 차용해서 예수나 마리아의 성상에 한국 문양을 첨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보는 이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인 거죠.” 보여지는 이미지는 다양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제의(祭儀)라는 공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인삼이라는 것도 어렸을 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 자체를 먹음으로써 사람들을 치료하는 인삼의 기능은 종교의 기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권투 선수가 가운을 입고 있는 뒷모습을 그린 작품 또한 그러하다. 사각의 링 위에서 필사적으로 싸우기 전에 멋진 가운을 입고 등장하는 것, 특정 종교와 관련된 의복도 일종의 제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똑같이 그리지 않는다. ‘개가죽과 지팡이’라는 작품에는 교황의 망토에‘101마리의 개’에 나오는 얼룩강아지 문양을 그렸고, ‘두통의 마리아’라는 작품에서 마리아의 얼굴은 깨진 도자기를 다시 붙여놓은 듯한 모습이다. 말하자면 종교의 거룩함, 신성, 구원, 헌신 같은 것과 사람이 지닌 폭력, 잔인함 같은 악적인 요소가 그녀 안에서 만나 형상화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종교와 인간의 악성을 믹스해 재현한다.여러 번 붓질해야 비로소 색이 나온다선명한 색감이 두드러진 김은진의 작품은 한두 번 붓 칠을 하면 되는 아크릴 물감으로 얻어진 색이 아니다. 그녀는 분채(粉彩:가루 형태의 전통 안료)를 써서 작품을 그린다. 분채에 아교와 물을 넣고 개어서 종이에 칠을 해서 선명한 색을 얻으려면 여러 번 붓질을 해야 한다. 색을 칠하고 건조하고 그 위에 덧칠하기를 반복해야 작품 속과 같은 색상이 나오기 때문에 배경색을 칠하는 데에만 2~3일은 족히 걸린다고. 만약 지금까지 동양화만 고수했다면 검정색, 흰색, 황토색 등 한정적인 색깔만 썼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원색적인 색감이 작품 속에 묻어날 수 있는 것은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색감을 접한 덕분이다. 이런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화려한 색감이 시선을 확 끌어당기기도 하고,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가 감돌아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다소 무거운 주제를 엽기적이면서도 유쾌하게 표현해서 발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독의 자유가 있다는 것도 그림의 매력 중 하나죠.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를 간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거든요. 제사장과 같은 차림을 한 ‘특별 미인도’라는 작품을 그릴 때 하트 무늬가 그려진 검정색 돼지를 수컷으로, 모란꽃이 그려진 하양색의 뚱뚱한 돼지를 암컷으로 그렸지만 반대로 보는 분도 있더라고요. 조목조목 따져가며 왜 검정색 돼지가 수컷이고 흰색 돼지가 암컷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답니다. 작품을 그린 제 자신 또한 하나의 거대한 붓에 불과하죠. 제가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그려지는 법이 없거든요. 독립된 생명체가 아님에도 작품을 시작하면 그림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진화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