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석 브랜드 메이저 사장

미안, 자이, 더샵, 아이파크, 도곡 렉슬, 타워팰리스, 브라운 스톤, 비바 패밀리, 경희궁의 아침, 짜임…. 이는 모두 우리나라의 대표적 아파트나 주상복합 브랜드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이 브랜드 모두 한 업체가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것이다.그 주인공은 ‘브랜드 메이저’란 회사다. 이 회사는 직원 10여 명의 소기업이지만 연간 2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래서 이 회사 황은석 사장은 ‘현대판 김봉수’로 불린다. 김봉수는 반세기 전 장안에서 가장 유명했던 작명가였다. 당시 ‘김봉수가 지은 이름’은 곧 ‘당대 최고로 좋은 이름’과 같은 말로 통했을 정도다. 김봉수와 마찬가지로 황 사장이 만든 브랜드도 당대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브랜드의 새 트렌드를 창조하는 ‘개척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우리은행, 삼성테크윈, 쿠쿠홈시스, 굿모닝증권, 브릿지증권, 교보다이렉트, 키움닷컴, 메트라이프코리아, 에스원 등 회사 이름뿐만 아니라 n016, Na, KTX, 싸이언, 카프리, 넥센, 2%부족할 때, 삼성김치독 다맛, 햇살담은 간장 등 제품명이나 서비스 브랜드까지 그의 손끝을 거친 게 한 둘이 아니다. 물론 해당 업체들은 작명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우리나라 브랜드 산업에서 황 사장은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지만 그가 처음 이 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다.“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체질에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직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이 극구 반대했고 저도 생각해 보니 뭔가 더 국제적이며 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사의 꿈을 접고 외국계 기업을 노크하기로 했습니다. 신문에 난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했는데 글쎄 나중에 알고 봤더니 브랜드 컨설팅 사업을 하는 국내 업체더라고요. 영어로 된 모집광고에다 영어 면접까지 치러 외국계로 생각한 것이지요. 어쨌든 입사 후 철제 책상에 볼품없이 배치된 사무집기들을 보면서 한 번 다녀볼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그러나 브랜드 네이밍에 대한 일반 기업들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당시 대부분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들이 제품 이름을 공짜로 지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회사 내에서 자체적으로 작명하는 사례도 많았다. 따라서 돈을 주고 회사나 제품 이름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결국 황 사장은 업체 방문과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브랜드 네이밍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면서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갔다. 이 과정에서 황 사장은 경제 규모가 커지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면 브랜드 사업이 성장할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됐고 결국 1994년 창업을 결심했다.“작은 오피스텔에서 달랑 두 명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장조사 나갔을 때 대부분 기업은 썰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례로 자동차 회사에 가면 ‘당신들이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느냐’며 문전박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서서히 상황이 바뀌면서 지금은 시장이 많이 커졌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드는 쌀만 200여 종이 되고 모두 브랜드를 필요로 하니 수요가 크게 확대된 것입니다.”브랜드 네이밍에 대한 시장은 이전보다 커졌지만 하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은 여전히 순탄치 않다는 게 황 사장의 설명이다. 특히 기존의 통념을 깬 브랜드를 만들려면 고객과의 치열한 논쟁과 설득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디스’라는 담배 브랜드를 만들 때의 일입니다. 당시 담배 이름은 ‘솔’이나 ‘거북선’처럼 대부분 한글로 만들어져 있었고 영문은 ‘엑스포’ 같은 게 전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일드 세븐’이란 외국 담배가 인기를 모으자 국산 담배에도 세련된 이름이 필요하다며 우리에게 브랜드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고심 끝에‘디스’를 제안했더니 당시 담배인삼공사의 임원 대부분은 “그게 무슨 브랜드냐”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성의 없다”거나 “지시대명사를 어떻게 브랜드로 하느냐”는 반발도 나왔습니다. 임원들은 ‘글로리(glory)’나 ‘아너(honor)’같은 브랜드를 선호했는데 저는 ‘이런 브랜드로는 결코 마일드 세븐을 이길 수 없다’며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마침 브랜드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연세대 교수였는데, 학생들을 대상으로 반응을 테스트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반미정서가 심한 상황에서 영어 이름에 대한 반발이 크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다행히 학생들에게 감각적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아 ‘디스’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디스’는 우리나라 담배 역사에서 가장 큰 히트 상품이 됐습니다.”특히 공공기관의 프로젝트는 민간기업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고속철도 이름인 KTX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할 때에 이름을 결정하는 위원회에 참여했던 국어학자들이 영문 이름을 반대해 큰 진통을 겪었다. 또 부산의 최첨단 정보화 도시인 센텀시티란 이름도 수많은 공무원들의 반대를 뚫고 만들어진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심한 산고를 겪으면서 태어난 브랜드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 황 사장은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롯데칠성의 ‘2% 부족할 때’라는 음료는 브랜드 덕을 톡톡히 본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회사 사람들과 같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사람 몸 안에 수분이 2% 부족할 때 갈증을 가장 심하게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이를 바로 브랜드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영어로 세련된 이름을 짓는 게 유행할 때였지만 음료의 핵심 경쟁력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고 판단해 이런 파격적인 브랜드를 제안했습니다. ‘햇살담은 간장’도 마찬가지로 큰 성과를 냈습니다.”황 사장의 제안으로 이처럼 긴 브랜드가 선보이고 나서 수많은 회사들이 모방함에 따라 긴 제품명은 한 때 업계의 트렌드가 됐다. 한국의 아파트 브랜드를 거의 싹쓸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겠다는 의지 덕분이다.“한때 우리나라 아파트 브랜드는 대부분 마을을 뜻하는 ‘빌(vill)’이 포함되는 이름 일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성건설 경영진이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외국계 회사에 하청을 줬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던지 우리한테까지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는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별화고, 트렌드를 조금 앞서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 경쟁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영문 명칭이 수없이 많지만 우리는 당시 트렌드였던 영어보다 더 세련된 한자를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래미안(來美安)이란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한자의 조합이었지만 뜻도 좋았고 ‘raemian’으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어식 발음으로도 잘 읽혀서 삼박자가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삼성에서 쉽게 이를 받아들였고 결국 래미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파트 브랜드가 됐습니다.”래미안의 성공 이후 다른 건설회사에서도 브랜드를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잇따라 들어왔다. 황 사장은 그 때마다 ‘더 샵’ 이나 ‘브라운 스톤’ 같은 고정관념을 깨는 새 트렌드를 만들면서 아파트 가치를 높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아파트 브랜드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GS건설의 자이였습니다. 사실 건설회사 브랜드를 만들 때마다 새로운 컨셉트를 창조했기 때문에 밑천이 거의 떨어졌던 시점이었습니다. 래미안 같은 한자도 한물갔고, 브라운 스톤 같은 영문 결합형이나 더 샵 같은 부호를 활용한 브랜드도 만들어 봐서 새로운 것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죠. 하지만 여전히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 트렌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첨단’이란 이미지를 전면에 부각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엑스트라 인텔리전트’를 줄여 ‘자이(Xi)’를 제안했습니다. 또 다시 파격적인 이름을 들고 나왔는데 이에 대해 대부분 임원들은 ‘당신은 이 단어를 읽을 수 있느냐’ ‘X자가 들어가서 중국 냄새가 난다’며 비판했습니다. 한번 임원들에게 호되게 혼났지만 다시 회사에 들어가 자이를 고집했습니다. 거부감이 강해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차를 마시면서 제가 ‘자 이젠 자이’란 광고 문구까지 생각해 뒀다고 말했더니 임원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며칠 후 자이로 결정됐다는 전화가 왔습니다.”이처럼 통념을 깨는 새로운 사고로 브랜드 업계를 평정했지만 황 사장은 아직도 브랜드 네이밍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브랜드를 가꾸고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 이미지가 없고, 또 다른 사람의 상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긍정적 이미지를 전달할 수만 있다면 브랜드로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과제는 얼마나 그 브랜드를 알리고 가꾸느냐 하는 것입니다. 브랜드 하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황 사장은 다국적 브랜드 업체에 맞선 토종 업체로 세계 시장에서 진검 승부도 기대하고 있다.“브랜드 메이저가 국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아직 연 매출 규모는 15억~20억원 수준입니다. 물론 지식 산업이기 때문에 인건비를 제외하고는 원가가 거의 들지 않아 이익률은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국내 시장만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인터브랜드 같은 대형 브랜드 업체와 경쟁하면서 해외 시장에서 인정받는 게 희망입니다. 베이징과 뉴욕에 연락업무를 갖춰 놓았는데 이를 토대로 해외 시장 개척에 더욱 발 벗고 나설 계획입니다. 또 새로운 브랜드 구축과 이미 만들어진 브랜드의 평가 및 관리를 위한 컨설팅 서비스 ‘브라마's’ 를 통해 컨설팅 사업 영역도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