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

증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은 금융감독을 책임지고 있는 정통 관료지만 ‘기업가정신’을 무던히 강조한다. “경제성장 없이 금융산업이 발전할 수 없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 경제성장의 근본 동력은 기술혁신이고 기술혁신을 하려면 창의적 기업가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투자를 이끌고, 그 바탕 위에 개인들이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윤 위원장은 400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 자금이 생산적인 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금융환경을 개선하겠다고 강조했다.“현재 6개월 미만 단기 금융시장에 몰려 있는 자금이 400조원에 달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믿고 맡길 데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제2금융권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단시일 내 저금리 시대에 들어서면서 소비자들도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금리는 선진국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소비자들은 이에 익숙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저축도 중요하지만 금융 소비자들이 투자에 눈을 뜨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사가 창간하는 ‘머니’가 그런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합니다.”금융과 세제분야에 정통한 윤 위원장이지만 재테크 실전 경험은 거의 없다. 고위 공직자가 재테크를 잘못했다 오해받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떤 철학으로 투자하는 게 바람직한지 질문을 던졌다.“투자도 경제와 마찬가지입니다. 정답이 없지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다른 한쪽엔 부정적인 측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경제학이나 투자 철학은 오류(리스크)를 줄이면서 최선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고 봅니다. 길게 보고 투자처를 찾는 게 유용하다는 일반론 말고 왕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주식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비과세 증권저축 말고는 주식에 직접투자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그였지만 재무부 관료라는 이유로 주위에서 주식과 관련해 자문해 오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먼 친척뻘 되는 아주머니가 주식을 샀는데 2배가량 올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왔다. 별 생각 없이 7개월 만에 2배가량 올랐으면 팔아도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친척 아주머니는 다음날 그 주식을 팔아치웠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친척 아주머니가 보유했던 주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것이다. 윤 위원장은 그 아주머니로부터 적지 않은 원성을 샀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윤 위원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주식에 관한 한 입을 다물고 산다고 한다.그는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밀고 나간다. 작은 것들은 제쳐두고 큰 것만 멀리서 보려고 한다. 후배 관료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배들은 그를 두고 ‘보스기질이 있다’ ‘카리스마가 있다’ ‘승부사 기질이 있다’고 평한다. 소신이 있고 원칙에는 집요할 정도로 충실해서인지 따로 개혁을 외치지 않아도 참여정부와 코드가 잘 맞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금융감독 수장으로서 지나치게 친기업적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윤 위원장은 “경제정책을 펴는 관료는 반드시 친기업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무원이 나서서 경영환경을 개선해야 기업들이 해외에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일부 시민단체의 집요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거 분식회계를 고해성사한 기업에 대해 감리를 면제하도록 감독규정을 고친 것도 이런 견해에서 나온 것이다.“장터 각설이를 해도 힘든 마당에 수백명 수천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기업을 운영하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투명하고 공정하게 룰을 적용하되 기업들이 혁신을 통해 많은 이윤을 내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일본의 전통 제조업이 강한 이유도 칼 속에 모두 함축돼 있습니다. 일본의 검 문화가 칼 산업으로 이어졌고 칼 산업 발전 정도에 따라 지방 제후의 힘이 결정됐습니다.”윤 위원장은 저금리시대에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수록 금융권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국가 재정만으로 고령화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1.2%에 불과해 사람자원(생산노동인구)이 급속히 고갈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많이 바뀌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간 부문이 일정한 역할을 맡아줘야 합니다. 특히 보험을 지속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험산업이 다른 금융권과 조화롭게 확대 발전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펴나갈 계획입니다. 금융회사들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선 경제성장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평소 유연하게 생각하려고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 다양한 대화를 나누길 즐기고 역사소설을 탐닉하는 그지만 금융감독 정책 방향을 묻는 질문에는 ‘법과 원칙’이라는 잣대를 단호하게 제시한다.그가 강조하는 ‘법과 원칙’은 글로벌 기준에 입각해 국내외 자본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윤 위원장은 글로벌시대에 자본의 국적을 묻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며 외국자본에 대한 적대적 사고를 경계하지만 불건전한 회계 및 공시 등 위법·부당행위에 대해선 국적을 불문하고 제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영국계 펀드인 헤르메스의 불공정 행위 조사는 이미 4명의 조사관이 영국 현지 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실무 차원에서 법 위반 여부를 꼼꼼히 따지고 있습니다.”금감원이 홍보대사로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상궁 역을 맡았던 양미경씨를 선정한 것도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감독기관의 이미지와 부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윤 위원장은 스스로 소신과 원칙을 중시하다 보니 후배 관료에게도 비슷한 덕목을 잣대로 생각하고 행동해 주길 바란다고 말한다. 소신과 원칙을 앞세우려면 아이디어와 이를 뒷받침할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금감위 공무원과 금감원 임직원에게 당부하곤 한다.“옛 재무부 시절 장·차관께 보고할 때 정책 해법으로 한 가지만 올렸습니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사인만 해달라는 취지로 항상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대안을 함께 내놓지 않았지요. 대안이 필요하면 참고자료로만 첨부했습니다.” 이런 전략이 상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윤 위원장은 승승장구했다. 그는 주말이면 산을 찾는다. 주로 집에서 가까운 우면산을 오를 때가 잦다고 한다. 때론 홀로 산에 오른다. 그때마다 관료로서 30여년 동안 걸어온 추억이 때론 보람으로 다가오고 때론 아픔으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세월이 흐를수록 반추할 게 늘어나지요. 내가 한 결정 중에 혹시 잘못된 게 없는지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봅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행동을 했는지도 생각합니다. 혹여 양심에 거스르는 일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산에도 물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