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보이스·앤디 워홀·장 미셸 바스키아 등 작품 상한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앤디 워홀(Andy Warhol)이 1970년대 후반 전후 예술(Post-War Art)계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유라시아 출신의 샤먼(Shaman)’이라고 불린 보이스와 ‘미국 팝아트(Pop Art)의 교주’ 격인 워홀은 예술의 전통성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서로 달랐으나 동시대의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들이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들의 공식적인 첫 만남은 197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이뤄졌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마치 ‘라이벌이었던 역사 속 두 교황이 아비뇽(Avignon)에서 만났을 때 풍길 법한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서로 너무나 달랐던 이들은 비록 막역한 친구 관계를 맺진 못했지만, 보이스가 1986년에 사망할 때까지 서로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워홀의 일기(The Andy Warhol Diaries)에 기록된 일화에서도 보이스와 워홀의 관계가 흥미롭게 그려지는데 워홀이 회상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보이스는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해 그의 작업실도 살펴보고 그의 삶의 방식도 구경하면서 차와 케이크를 같이 들어야 한다며 우겼고, 그 제안은 무척이나 근사한 것이었다. 보이스는 나에게 거품 나는 액체가 담긴 두 개의 병으로 된 작품을 선물했는데 이 작품은 결국 내 여행가방 속에서 터져 버려서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걸 망가뜨렸다. 현재 나는 그 작품을 여전히 예술품이라 생각해도 될지 아니면 단지 깨진 유리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그 상자를 다시 열지도 못하겠다. 그 상자는 진짜로 엉망진창이 돼 버렸기 때문에 그가 뉴욕을 방문할 때 꼭 우리 집으로 데려와서 사인을 받아야겠다.”보이스와 워홀의 교류로 인한 또 하나의 결과는 바로 워홀이 그가 찍었던 보이스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이용, 보이스의 초상화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워홀은 이 작품에서 그가 새롭게 개발해낸 ‘반전(reversal) 기법’에 따른 ‘네거티브 이미지(negative image)’를 이용했고 샤먼과도 같은 예술가의 신비스러운 영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해내기 위해 ‘다이아몬드 분말’을 흩뿌렸다. 워홀은 그가 회화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식으로 이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는 작품 대상을 영웅화해 크고 강력한, 불후의 아이콘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당대 최고의 미국 팝 아트 작가였던 워홀은 많은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아이돌(Idol)이자 숭배의 대상이었으나, 20세의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에게는 더욱 그러한 존재였다. 뒤 이어 곧 전설적인 예술가가 된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뉴욕 신표현주의(Neo expres-sionist)계의 ‘어린 흑인 랭보(Rimbaud)’라고 불리곤 했고, 그 역시 워홀처럼 유명인사들에게 몰두, 실제와 가상의 영웅 이미지들을 모두 조합해 예술작품을 창조해내곤 했다. 바스키아가 워홀의 ‘유명인사 초상화 시리즈’의 대상이 되어 이 유명한 팝 아트 작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부자 같은 묘한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바스키아가 워홀을 처음으로 만났던 1982년 당시 그의 예술세계는 여전히 과거 뉴욕 다운타운의 부랑자 생활에 기반한 ‘영웅주의 혹은 거리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후광으로 둘러싸인, 황금빛의 의기양양한 인물의 휘갈겨진 이미지가 인상적인 그의 작품 ‘무제’(Untitled)는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 흑인 스타였던 바스키아가 자신만의 신전에서 불러낸 모호한 영웅, 성인 이미지들을 극적으로 조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유명 운동선수, 재즈 뮤지션, 권투선수, 길 잃은 천재, 아버지의 형상 등 모든 종류의 영웅 이미지들에 몰두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고, 이렇게 태어난 작품들은 영웅 초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그의 복잡한 내면세계의 산물인 작품들을 ‘극도의 개인주의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즉 바스키아의 작품세계는 보이스나 워홀의 세계관인 ‘우리 모두가 예술가이며 명성이란 이 모두를 잠시 빛나게 할 뿐인 덧없는 것’이라는 시각을 완전히 비켜 나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러나 천재 흑인 예술가 바스키아는 늘 고독과 쓸쓸함에 시달렸고 그나마 자신을 지탱해준 스승이자 친구였던 워홀까지 타계하자 실의에 빠져 27세의 젊은 나이로 천재 예술가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