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 일신창업투자 사장(48)은 국내의 대표적인 ‘컬처펀드(culture fund)’ 전문가다. 영세하고 불투명한 거래 관행으로 개인투자자 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국내 영화산업에 벤처캐피털이란 새로운 영역을 접목한 주인공이다. 오늘날 한국 영화가 ‘제2의 중흥기’를 맞게 된 저변을 만든 숨은 공로자인 셈이다. 벤처업계는 그를 영화투자의 ‘원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95년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침대’에 투자해 ‘대박’을 터뜨린 뒤 10여년 간 매년 100억∼200억원 규모의 영상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눈에 들어 자금이 투입된 작품은 총 36편. 이중 흥행에 성공한 영화만 ‘접속’ ‘조용한 가족’ ‘몽정기’ ‘범죄의 재구성’ ‘친절한 금자씨’등 무려 18개. 이제껏 개봉관에서 상영된 영화가 모두 31개인 점을 감안하면 편수 기준으로 투자 작품의 60% 이상을 성공시킨 셈이다. 고 사장은 지난해에는 100억원 규모의 ‘음악 전문 투자조합’을 결성, 일신창투를 자타가 공인하는 컬처펀드 전문운용사로 자리매김시켰다.최근 영화를 비롯해 음원 등에 대한 각종 컬처펀드가 조성되며 컬처펀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컬처펀드는 영화 음반 뮤지컬 애니메이션(만화영화) 등 제작에 투자하는 펀드다. 벤처캐피털 등 각종 투자업체들이 컬처펀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기존 벤처기업, 또는 중소기업 투자가 자본투입부터 현금회수까지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7년까지 소요되는 반면 영화 음반 등의 경우 1년도 채 안 걸리기 때문이다.고 사장은 “지난 1999∼2000년 벤처 붐 때 ‘몰빵’을 쳤다가 벤처기업의 ‘줄 부도’로 어려움을 겪었던 벤처캐피털들이 상대적으로 경기에 둔감한 컬처펀드를 경기 방어차원에서 효과적인 투자수단으로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컬처펀드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투자가 이뤄지는 분야는 단연 영화다. 고 사장은 “투자 초기엔 영화를 흥행시키고도 수익금을 챙기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며 “이러한 시행착오를 헤쳐 나가는 게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예컨대 배급사 측이 입금을 일부러 늦추면서 애를 태우거나 부도를 내는 수법으로 수입금을 가로채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90년대 중반 영화투자 시 큰 걸림돌은 제작사 및 배급사에 대한 ‘카운터파티 리스크(counterparty risk:계약상대자 위험)’였다고 고 사장은 설명했다. 고 사장은 아직도 영화투자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고 말한다.“대박영화라고 불리는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친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모두 초기 펀딩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죠. 남자들의 이야기, 또는 남북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 과연 어떤 투자자가 이 같은 영화가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 내다볼 수 있었을까요.”투자자들이 영화를 바라보는 분석과 예측은 이처럼 빗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고 사장의 지론이다. 그는 “영화 등 컬처 투자가 어려운 점은 다른 기업 또는 금융투자와는 달리 과거 실적은 참고사항일뿐, 이보다는 제작자 등의 창의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 사장은 “한 사람 또는 한 기업의 창의력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라며 “최근 개봉한 ‘남극일기’의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도 알고 보면 영화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제작자인 싸이더스의 ‘연속 흥행기록’에 너무 기댄 결과”라고 분석했다.이 같은 이유에선지 고 사장이 말하는 영화투자의 성공비결은 역설적으로 매우 비(非)컬처적이다. 그는 “여태껏 한번도 영화 시나리오를 읽어 본 적이 없다”며 “영화 투자에서 CEO와 전문 심사역의 역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고 사장은 “철저히 확률적으로 접근해서 자칫 감상적으로 치우칠 심사역들을 견제, 실패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며 “연속으로 3번 흥행작을 만든 심사역 또는 감독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견해가 더욱 주관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영화제작 전 사전준비작업이 얼마나 완벽히 이뤄졌는 지 여부도 영화 성공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다. 실제로 일신창투로부터 투자를 받고 지난 97년 최대 관객을 동원한 ‘접속’의 경우 1년6개월 동안 제작진이 30여 차례나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촬영콘티(진행표)를 고치는 등 철저한 사전준비 작업을 펼쳤다. 당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PC통신과 인터넷 채팅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도 매우 시의적절했다는 평가다.고 사장은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가 나올 수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에선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없다는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말은 영화 투자자들이 마음에 새겨둬야 할 첫 번째 항목”이라고 귀띔했다.요즘 컬처펀드에 투자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세태와는 달리 고 사장이 바라보는 컬처펀드에 대한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최근 연예기획사와 제작사의 다툼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작 돈을 대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자는 잠자코 있는데 제작사와 기획사끼리 더 많은 이익을 챙기겠다고 으르렁대는 모습이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죠.” 현재 국내에서 영화수익이 분배되는 구조가 투자자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8000원짜리 영화티켓을 팔 경우 10%의 부가가치세와 5∼10%의 배급수수료를 제외하면 나오는 수입은 평균 6660원가량. 그마저 영화를 상영해준 극장이 50%를 챙기면 제작사와 투자사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은 3330원 정도다. 결국 이를 절반씩 나눈다고 할 경우 투자자들이 티켓 한 장을 팔아 벌어들이는 수입은 1665원으로 전체 매출의 20% 남짓이다.고 사장은 “최근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연예인이 출연료 외에 매출에 비례한 러닝 개런티를 요구해 거절당했다”며 “영화는 적자를 보더라도 연예인이 전체 매출의 40% 이상을 챙기겠다는 심산은 결코 합리적인 요구가 아니다”고 꼬집었다.그는 “제작사와 연예인들은 영화가 실패할 경우 ‘다음에 잘하겠습니다’고 하면 되지만 투자자들은 그 손실분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며 “영화가 성공을 거둬도 이처럼 연예인들과 제작사들이 자신들의 몫을 늘릴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가끔 영화 투자를 왜 해야 하는 지 의구심이 들 때도 없지 않다”고 토로했다.결국 한국 영화투자가 투자자 사이 우스갯소리로 ‘고위험 저수익(high risk,low return)’업이라 불리듯이 지금의 악순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익배분구조의 합리화 △영화시장의 국제화 △거품 낀 스타시스템의 현실화 △스타시스템의 다각화 등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고 사장의 소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