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오래 되다 보면 상대방의 나이를 착각할 때가 더러 있다. 세월 간 줄 모른 채 첫 만남 때 각인된 모습 그대로 마음에 품고 사는 것. 세월의 진공상태인데, 언뜻 실체적 진실을 깨달을 때 너무나 당혹스럽다. “나도 늙었구나”하는 신세 한탄을 할 수밖에 없다.물론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한결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가끔 있다. 물리적인 나이는 속절없이 지나갔으나 예전처럼 영원한 젊음을 구가하는 멋쟁이들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오곤 한다. 최근 내 만남 가운데 그런 정체 불변의 멋쟁이가 있었다. 배우 유인촌씨다. 올해 나이 쉰넷. 이 글을 쓰기 위해 새삼 나이를 확인하고 “벌써!”라며 약간 경악했으나,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 무심한 젊음이 더욱 놀라웠다. 그 비밀을 물었다. “마라톤 덕분인가요. 특별한 건강비결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중년 남자들의 필수품격인 속칭 ‘배둘레햄’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몇 년 전부터 마라톤에 푹 빠져 틈나는 대로 달리며 건강을 유지한 결과다. 유씨는 지금은 배우와 교수(중앙대)의 역할에서 벗어나 문화행정가로 변신해 있다. 지난해 서울시 재원으로 설립된 서울문화재단의 초대 대표이사를 맡아 서울시 문화정책을 일부 혁신 중이다. 부임 초기엔 천직인 배우에서 이탈한 의외의 발탁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탁월한 통솔력으로 일찌감치 조직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모험이긴 했지만 점점 보람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음대로 연기도 할 수 없지요, 극단(극단 유) 운영도 엉망이 되지요. 하지만 남을 위한 봉사가 결국 더 좋은 효과로 돌아올 것이라 믿기 때문에 행복합니다.”한 가지 일도 제대로 못하는 게 장삼이사들의 그렇고 그런 삶인데, 중원을 헤집고 다니는 토털 사커의 멀티플레이어가 따로 없었다. 유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처럼 촌각을 아끼고 사는 와중에 그가 잠시 천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 자신의 성이자 ‘당신(You, 관객)을 위한다’는 의미로 창단한 극단 ‘유’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은 기꺼이 기념할 만하다. 아무리 바빠도 챙겨야 할 일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하는 극단 유의 10주년 기념공연작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다.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 자를 단죄해야 하는 백척간두의 순간에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나약한 인간, 그 원초적인 인간다움으로 인해 원작이 나온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영원히 살아있는 햄릿은 유씨의 배우사(史)에서도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지금까지 햄릿을 무려 다섯 차례 연기했으며, 석사논문도 햄릿을 주제로 썼다. “1980년 전후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없어진 신촌의 한 소극장에서 ‘햄릿’의 타이틀 롤을 처음 맡았습니다. 이후 가장 많이 한 주인공 역이 햄릿입니다. 1999년 사재를 털어 청담동에 극단 전용극장인 ‘유씨어터’를 오픈하면서 개관기념작으로 선보인 것도 ‘햄릿’이었습니다. 햄릿과 저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10주년 기념 공연이 ‘햄릿’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여기에 있다. 그에겐 여섯 번째 도전인 셈인데 자꾸 나이가 의식돼 잘 해낼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욕심이 나는 것은 햄릿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햄릿은 우유부단한 듯해도 결단력이 있는 다면적 인간의 화신과도 같습니다. 배우가 표현해야 할 모든 것들이 그 인물 속에 담겨 있지요. 태산이 높다지만 오른 뒤의 성취감에 탐닉하게 되는 등산처럼 어려워서 해볼 만한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특히 비극은 폭발적인 에너지가 없으면 곤란한데, 그래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원작의 역사가 깊은 만큼 ‘햄릿’은 셀 수 없이 많은 변주들을 양산했다. 한국에서도 자기분열의 역사는 길고도 두텁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햄릿’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연극사가 증명한다. 그 힘든 여정에 유씨는 다시 나선다. 그것도 정공법으로 말이다.“그야말로 원본 노컷 버전을 보여주려고 해요. 희곡을 읽기만 하는 데에도 3시간 정도 걸립니다. 연기가 덧씌워지면 공연시간이 4시간 가까이 될 겁니다. 원작이 가진 리드미컬하고 압축적이며 시적인 운율을 최대한 살려 마치 음악극을 연상시키는 무대를 만들 겁니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해석’도 가미할 것입니다. 햄릿이 유령에 집착하는 대목이 있는데, 저는 이 장면을 아버지의 혼이 빙의(憑依)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말을 듣고 보니 유씨의 욕심에 다시 배가 아파지려 했다. 유씨는 이번 무대에서 출연은 물론 연출까지 하는 1인 2역을 마다하지 않는다. 유씨어터를 중심으로 성장한 극단의 ‘젊은 기관차’ 김관씨와 문삼화씨가 협력 연출로 그를 돕지만 완벽주의자의 오기가 발동했으니 그 결과는 불문가지이다. 오윤균(무대), 안애순(안무), 서정기씨(의상) 등 각 분야의 1급들이 뒤를 받치고 대중스타로 성장한 극단 유 출신 탤런트 공형진, 김수로, 주진모 외 전 단원이 합세하는 대형 무대다.사실 10년 전 극단 유의 시작은 규모와 의의, 선언적인 가치 면에서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고고지성의 울림이었다. 연극의 메카라고 자부하면서도 대학로의 소극장 중심 연극은 극장 사이즈를 닮듯 만드는 사람들의 시야가 점차 왜소해져 갔다. 그 위험한 추락의 순간에 극단 유는 ‘연극은 이런 것’임을 웅변하듯 화제작을 들고 나왔다. 당시 기가 승할 대로 승해 있던 이윤택(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쓰고 연출한 ‘문제적 인간 연산’(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이었다. 어머니의 부당한 죽음에 대해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연산의 광포한 비극성을 탈 권세와 색(色), 정의의 역사가 충돌하는 거대한 쟁투로 묘사한 묵직한 작품이었다. 연산 역은 유인촌, 그의 총희(寵姬) 장녹수 역은 이혜영이 맡았는데 이 최고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는 보기 드문 압권이었다. 그 결과 그해 동아연극상 등을 휩쓸었다.지금 한국 연극은 이런 스케일을 잊어버렸다. 하도 고질병이 돼서 병든 것조차도 모르는 참담한 실정인데, 유씨도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각 분야의 진흥을 위한 지원정책을 총괄하는 ‘끝발’있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그야말로 고민 중이다. 쉽게 해결책을 낼 수 없는 숙제인 셈이다.그에게 극단 창단 10주년의 소회를 물었다. “솔직히 초기보다 쪼그라든 느낌입니다. 극장을 짓고 나서 오히려 움츠러든 게 사실입니다. 극장 경영이란 게 깨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아서 보통 공력으로는 현상 유지도 힘듭니다. 여기에 온통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제작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햄릿’은 그런 점에서 초심을 재확인하는 무대인 셈입니다.”자력갱생하는 악전고투의 세월이었지만 그의 곁에는 18명으로 이뤄진 디딤회라는 후원모임이 늘 함께 해서 큰 힘이 됐다. 창단 역사와 같이 한 이 한결같은 사람들은 어느 공연이든 첫날 첫 회는 자신들이 산 티켓으로 매진시키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한 사람이 4백만~5백만원씩 갹출하는 금전적 도움은 물론 안내하고 프로그램도 파는 자원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의 도움이 있어 유씨는 자신의 강의노트를 책으로 엮어내는 용기도 냈다. 그는 10주년 공연에 앞서 그의 연기론을 집약한 단행본 ‘유인촌, 연기를 가르치다’를 출간한다.문의 (02) 3444-0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