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맵시와 젊음의 열기, 우아한 부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풍겨나오는 곳. 세계 각국의 명품 거리는 닮은꼴이다. 뉴욕과 도쿄, 그리고 상하이 거리를 처음 걷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쯤 걸어봤던 느낌을 받는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쇼윈도와 화려한 조명으로 꾸며진 명품 거리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수많은 인파가 북적거리는 세계 명품거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계 명품 1번지로 꼽히는 맨해튼 피브스 애비뉴(맨해튼 중심부를 남북으로 길게 관통하는 도로로 맨해튼 남쪽에 가까운 40가부터 위쪽 90가까지 세계적 브랜드의 명품 숍들이 밀집해 있다)의 매력은 펄펄 살아 숨쉬는 생동감에 있다. 파리 리브고슈와 생토노레 거리, 한국 청담동의 명품거리가 도도하고 고급스러운 매력을 풍긴다면 뉴욕 피브스 애비뉴는 보다 흐름이 빠르고(맨해튼을 걷는 뉴요커들의 보행 속도는 타 지역 미국인들보다 두 배쯤 빠르다) 조금은 대중적이다. 물론 티파니, 카르티에, 드비어스 등 귀금속 매장 앞에는 위압적인 체구의 보안 요원들이 행인들에게 심리적 통제선을 요구하고 있다. 뉴욕 명품 고객은 관광객, 소셜라이트, 보통 뉴요커이곳의 또 하나의 매력은 뉴욕의 생명인 문화적 향취다. 창의성과 예술 감각을 중시하는 곳인 만큼 최고급 백화점도 매장을 뛰쳐나와 행인을 대상으로 퍼포먼스를 열고, 명품 매장에선 대중 스타들의 사진전을 연다. 최근 명품 백화점 ‘삭스 피브스 애비뉴’는 가을을 맞아 캐시미어제품 판매행사를 하면서 캐시미어 양을 끄는 도우미들을 거리에 내세워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11월 중순까지 피브스 애비뉴 52가의 매장 2층의 갤러리에서 전설적 파파라치 론 갈렐라의 사진전을 열고 있다. 소피아 로렌, 마돈나, 로버트 레드퍼드 등의 향수어린 흑백사진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누구나 마음 편히 들어갈 수 있다. 피브스 애비뉴의 160년 된 티파니 매장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오드리 헵번의 후광 덕에 관광명소가 된 지 오래다. 한편 여러가지 명품 브랜드를 모은 아울렛 성격의 할인점에선 샌드위치맨을 내세워 아예 거리에서 호객을 한다. 유명 브랜드 이름이 적힌 샌드위치 판 아래엔 남성정장 40~60% 할인이란 문구가 눈에 띈다. 관광객은 뉴욕 명품가의 대표적 고객집단이다. 특히 일본 중국 한국 등에서 온 관광객은 큰 손으로 꼽혀 명품 매장이나 고급 백화점에선 이들을 겨냥해 동양인 직원을 배치하기도 한다. 또 하나 주요 그룹은 소셜라이트(socialite:사교계 명사)로 명품 업계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고(故)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부터 도널드 트럼프의 전처 이바나 트럼프 등 부유층 패션 리더, 그리고 유명 연예인들이 이 그룹에 속한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 기사에서 ‘마음 내키면 1만달러짜리 반지를 쉽게 샀다가 1주일이면 싹 잊어버릴 수 있는 여성들이 뉴욕엔 무척 많다’고 한 명품 업체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묘사했다.세 번째, ‘보통 뉴요커’그룹에서 ‘보통’이란 물론 상대적 개념이다. 크리스마스나 가족 친지의 생일 등 1년에 두 세 번 정도 500~1000달러의 명품을 구입할 수 있는 중산층을 지칭한다. 이들의 소비 패턴은 ‘액세서블 럭셔리(accessible luxury)’ 혹은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란 표현으로 요약된다.어포더블 럭셔리란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가격대와 착용성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살 만하고 쓸 만한’ 제품을 말한다. 즉 3000달러 혹은 9000달러까지 하는 루이뷔통 에르메스 등 제품을 사기는 쉽지 않지만 370달러짜리 코치 백이나 195달러 하는 푸치(Pucci) 모자는 마음먹으면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흐름에서 최근 뉴욕에서 각광받는 브랜드는 ‘코치’ ‘버버리’ ‘콜한(Cole Hahn)’ 그리고 ‘태그호이어’다. 코치 버버리 모두 보수적 인상이 강했으나 수년 전 시작된 개혁 작업의 결과 젊고 실용적이면서도 고급스런 제품으로 뉴요커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신발과 가방 등 가죽제품에 강한 콜한은 젊은 감각으로 인기를 끈다. 히딩크 감독의 시계로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태그호이어는 전체 판매량의 40%가 미국에서 이뤄지는 특이한 경우. 개당 500달러 이상의 명품 시계는 원래 미국에선 인기가 떨어진다. 전체 시계시장에서 명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에서 20%에 달하는 데 비해 미국에선 10%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니얼 라롱드 LVMH그룹 북미지역 시계 및 귀금속 담당 최고책임자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스포티한 태그호이어가 미국인의 취향과 맞아떨어져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 주요 명품매장만 650개 넘어일본은 명품 브랜드의 천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명품 브랜드의 최대 고객은 ‘짠돌이’로 유명한 일본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길거리에서 명품으로 치장한 일본인들을 보고 혀를 내두른다. 실제로 지하철이나 버스 등을 타보면 여성 10명중 2~3명이 수백만원짜리 루이뷔통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쉽사리 볼 수 있다.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지난해 일본시장에서 사상 최대 이익을 거뒀다. 시장 조사회사인 데이코쿠데이터뱅크가 최근 발표한 ‘2004년도 외국계 45개 명품 브랜드의 법인 소득 신고액’에 따르면 이들 업체는 총 1258억엔의 법인 소득을 올려 1993년 조사 이후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업체별로는 루이뷔통, 펜디 브랜드 등을 운영하는 LVMH그룹이 364억엔의 소득을 기록해 12년째 법인 소득 1위 자리를 지켰다. 2위부터 4위까지는 에르메스, 갭, 나이키 등으로 전년도와 순위 변동이 없었다. 에르메스는 124억엔으로 1.3%가 줄어든 반면 갭은 18% 증가해 108억엔의 소득을 올렸다. 아디다스, 티파니, 구치그룹, 롤렉스, 리슈몬, 샤넬 등도 10위권에 포함됐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일본은 1990년을 정점으로 버블(거품) 경기가 꺼지기 시작해 2000년대 초반까지 장기 침체를 겪었다. 2003년 하반기부터 조금씩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 아직도 일본 소비시장은 90년대 호황기에 비하면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별명의 장기 침체 기간에도 별 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주요 명품 업체들이 지난해 일본 시장에 새론 문을 연 500㎡ 이상 대형 점포 수만도 18개나 된다. 2000년부터 5년 간 주요 브랜드의 매장은 약 25% 늘어 작년 말 650개를 넘어섰다. 코치와 티파니는 지난해 하반기 도쿄 중심지 마루노우치에 대형 매장을 새로 열었다. 1위 명품 브랜드인 루이뷔통은 지난해 9월 도쿄 긴자의 나미키도리에 일본 내 최대인 1600㎡짜리 매장을 오픈했다. 오사카에도 작년 가을 우메다 ‘힐튼 플라자 웨스트’에 약 900㎡짜리 매장을 새로 오픈했다. 크리스찬 디올, 미국 브룩스 브러더스, 샤넬 등도 지난해 연말 잇따라 국내 최대급 매장을 열어 명품 매장의 대형화 경쟁은 가열되는 양상이다. 외국 업체들이 초대형 단독 매장을 잇따라 열자 미쓰코시 이세탄 등 유명 백화점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긴자 등 쇼핑가 중심지에 위치한 백화점 상권과 신설 대형 매장과 상권이 겹쳐 고정 고객을 빼앗길 것으로 긴장하는 분위기다. 외국 브랜드의 국내 시장 공략에 대응해 일본 메이커들도 고급화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명품을 좋아하는 일본 소비자들이 새로 생긴 대형 매장으로 몰려가고 있기 때문. 중급 브랜드들도 고급화 경쟁에 가담하고 있다. 대표적인 업체는 10월 초 쇼핑 중심가 긴자에 신규 진출한 유니클로다. 올 하반기 브랜드 고급화를 선언한 유니클로는 외국 명품이 즐비한 긴자 중심가에 초대형 단독 매장을 내고 고객 몰이에 나섰다.화장품 의류 메이커들도 고급 브랜드 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일본 1위 업체인 시세이도는 8월 말 회사의 주요 브랜드를 전면 재편해 신제품을 대거 런칭했다. 2위 업체인 가네보는 화장품 브랜드 수를 60개에서 20개로 축소하고 고급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10여년 이상의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빈부 격차가 많이 벌어지면서 ‘90% 중류층’이라는 고도 성장기 모델은 다소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일본의 중류층은 두텁다. 평소에는 10엔짜리도 아끼지만 해외여행이나 명품 소비에서는 씀씀이가 크다. 아낄 때는 아끼지만 쓸 때는 쓰는 사람들이 일본인이다. 상하이 난징루의 명품 광장상하이 난징루(南京路)는 상하이 최고의 패션 스트리트로 통하는 곳이다. 대형 쇼핑센터가 밀집돼 있고, 거리에는 명품점이 즐비하다. 이곳에 자리잡은 헝룽(恒隆)광장은 그 중 하나. 5층짜리 대형 건물에 아르마니, 루이뷔통, 프라다, 디오르 등 세계 내로라하는 명품점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프랑스 명품브랜드 라거펠드 매장. 겨울맞이 숙녀복, 신사복을 전시해 놓고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점원에게 가죽 잠바를 가리키며 값을 물었더니 ‘2만2000위안’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우리 돈 275만원. 중국 도시지역의 10년 차 샐러리맨 평균 월급보다 4배 정도 많다. 아무리 명품이라고는 하지만 중국인의 소득수준을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그런데도 전시하자마자 팔려나간다는 게 점원 왕제메이(王杰美) 양의 말이다. 그는 “모두 6벌을 수입해 들여왔으나 벌써 4벌이 팔렸다”며 “본사에 유사한 종류의 옷을 더 주문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격이 비쌀수록 오히려 잘 팔리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바로 옆 루이뷔통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시품 중 열쇠고리가 있었다. 가격은 3000위안, 어지간한 샐러리맨의 한 달 치 월급이다. 무슨 열쇠고리가 이리 비싸냐는 질문에 점원은 ‘루이뷔통 마크가 붙어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 ‘명품숭배’ 의식이다. 중국에서 명품 상점에 들르는 사람들은 일부 부자 계층에 한정된 일이다. 그런데 그 부자들의 수가 간단치 않다. 갤럽 분석에 따르면 연간 가처분소득 5만1000위안(약 640만원) 이상의 중산층은 1억40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 6700만 명 정도는 해외 명품 브랜드를 살 수 있는 소비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메릴린치는 중국에서 100만달러 이상의 금융자산(부동산 등 고정자산 제외)을 갖고 있는 부자들이 23만6000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상하이에서 명품브랜드 전시회가 열렸다. 그 중 스위스의 명품브랜드 시계인 블랑크페인이 출품됐다. 가격은 600만위안, 원화로 약 7억5000만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이 시계는 그러나 한 중국인이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사갔다. 중국인들의 고급제품 소비능력이 어느 정도인 지를 알 수 있다. 컨설팅업체인 베인 앤드 컴퍼니가 핸드백 향수 등 500여 개 사치품 제조회사의 재무제표를 분석,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명품 시장 규모는 대략 연간 5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은 연간 50~60%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고급 명품 브랜드 수요 계층이 선진국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 유럽 일본의 경우 고가 명품 브랜드의 주요 고객은 중장년층이다. 그러나 중국은 40대 이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80년대 이후 당국의 1가족 1자녀 원칙에 따라 태어난 이른바 ‘샤오황디(小皇帝)’로 부모의 후광에 힘입어 막강한 구매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연히 각 브랜드 사이에 점포확장 경쟁이 붙었다. 프라다는 향후 2년 동안 중국에 4000만달러를 투자해 중국 내 매장수를 현재의 2배인 15개로 늘릴 계획이다. 보석 브랜드인 카르티에는 현재 3개에 불과한 전용점을 연말까지 7개로 늘릴 계획이다. 남성의류 브랜드 제냐 역시 중국 주요 도시에 42개의 전문매장을 설립키로 하는 등 중국 공략에 나섰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명품 브랜드가 중국 사회를 파고들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 주요 도시에서는 명품 브랜드 선전포스터, 명품 전문점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이 소득수준의 증가와 함께 명품시장의 큰 손으로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