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핵심 테르와르

화 ‘어느 멋진 순간’을 보면 캘리포니아 와인이 와인 세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어찌 보면 그건 물론 프랑스 사람의 평가에 불과하지만 사실 많은 동의를 얻고 있는 평가이기도 하다.감독은 영화 곳곳에 캘리포니아 와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숨겨 놓았다. 예를 들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러 프로방스까지 찾아간 처녀의 설정은 와인의 본향인 유럽으로부터 명실상부한 적자임을 확인받으려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기대를 의미한다. 또한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태양 아래서 옷을 훌훌 벗고 태연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처녀의 설정은 흥미롭다. 그녀는 너무 오래 태운 나머지 결국 화상을 입는데, 감독은 여기서 포도가 너무 익어 본연의 맛을 잃어 가고 있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스타일을 지적하고 있다.캘리포니아는 태평양 연안에 자리 잡은 해양성 기후 덕분에 온화하고 따뜻하다. 여기서 자라는 포도나무는 포도가 익을 충분한 일조량을 확보하고 있다. 와인의 메카인 대서양 연안의 보르도와 유사한 조건을 갖춘 캘리포니아는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즉,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등을 혼합해 만드는 방식이다. 육식을 주로 하는 미국인들에게 무난한 와인이라고 할 만하다.캘리포니아는 포도를 재배하는 데 있어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단점도 있다. 영화에서 표현되었듯이 태양이 포도를 태워 버릴 기세로 뜨겁게 내리쬐기도 한다. 포도는 적당한 일조량 하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익어야 포도 자체의 특성이 와인에 묻어난다. 이에 따라 일부 고급 생산자들은 시행착오 끝에 서늘하게 오랫동안 익어 가는 포도밭을 발견했다. 오늘날 나파밸리는 양조가들에게 엘도라도와 같은 곳이다. 여기에서는 보르도 최고 와인에 버금가는 숙성력을 지닌 와인들이 태어나고 있다. 그 가격이 상당해 오히려 보르도를 능가하기도 한다.미국 와인 산지 중에서 가장 좋은 포도가 영근다고 모두 입을 모으는 나파밸리는 와인 세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파밸리의 장점은 풍부한 일조량과 고른 기후 덕분에 포도의 완숙을 기할 수 있어 품질의 일관성을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생산되는 대부분의 와인이 하나같이 강하고 진하고 풍성해 와인의 특성이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많다. 나파밸리가 우수하다는 건 인정해도 생산 와인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맛이기 때문에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다.하지만 스타일의 동질화가 문제가 돼도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는 와인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나파밸리 와인 더미 속에서 시음해도 맛의 특성이 구별되는 이른바 테르와르(terroir: 포도밭에서의 다양한 영향 요소들의 상호작용. 토질, 토양, 강수량, 일조량 등이 테르와르의 구성 요소다)에 근간하는 와인은 금방 나타난다.지난 30여년간 와인에 대해 글을 써 오고 있는 미국인 맷 크레이머는 특유의 논리로 자신만의 와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저널리스트다. 그는 테르와르가 와인의 특징이라고 설파한다. 와인은 테르와르가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양조 문화와 전통이 깊어야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와인의 향기를 맡고 맛을 보니 그 밭의 특질이 느껴지는 경우라면 그 와인은 테르와르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 밭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꼽진 못해도, 어디쯤엔가 어렴풋이 그런 맛을 품고 있는 밭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경우인 것이다. 맛을 보고 향을 맡아도 도무지 이런 와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경우라든가, 혹은 아무데나 어디를 가도 비슷한 맛과 향기를 풍기는 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면 테르와르가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테르와르가 느껴지는 와인은 시음자에게 특정 장소로 여행을 떠나게 한다. 스파게티에 곁들이는 키안티 한 잔은 우리를 피렌체로 이끄는 것 같다. 같은 키안티라도 질감이 올곧고 단단하며 제비꽃 향기가 풍부하고 또한 입 안에서 긴장감을 더 제공하는 경우라면 키안티의 중심부인 키안티 클라시코가 떠오른다. 수많은 키안티 클라시코 양조장 가운데 유난히 색이 진하고, 방향이 멀리 미치고, 두터운 입맛과 진하고 텁텁한 뒷맛, 게다가 잘 짜인 구조감과 균형을 느끼는 와인이라면 이른바 슈퍼 키안티 클라시코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스타일의 힘 있는 와인이라면 폰토디를 꼽을 수 있다. 한 잔의 키안티를 통해 동남향으로 조성된 원형경기장 같은 포도밭에서 나오는 그 폰토디를 연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테르와르다.유럽에서 만개한 와인 문화 중에 단일 품종으로 와인을 양조하는 전통은 수도원의 공로가 크다고 맷 크레이머는 강조한다. 서로마제국에 이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은 암흑의 시기를 맞는다. 유럽인들은 영성의 고갈을 체험하며 괴로워하다 드디어 큰 깨달음을 얻는다. 베네틱트 수사들에 의해 유지되는 수도원에서 본격적으로 와인을 양조하기 시작한다.수도사들은 잃어버린 영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고달픈 수행을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 행위는 땅에서 이뤄짐을 깨달았다. 그들은 땅을 부지런히 갈고 가꾸어 가며 땅의 목소리를 통해 하늘의 분부를 얻고자 했다.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 즉 와인은 수도사들이 가장 애지중지 만드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영성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오직 포도 한 가지만으로 만들어내는 와인은 순수하게 그 땅의 기운을 길어 올린다고 믿었다. 그 기운 속에서 그들은 땅의 목소리를 들었고 이를 통해 하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땅의 소리를 듣다 보면 땅마다의 차이에 민감해지게 된다. 지역 간 차이를 살피면 땅의 차이를 발견하고, 땅의 차이를 살피면 땅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에 따라 신령한 것에 대한 긴장의 끈을 유지함으로써 수도원이 지탱할 수 있었다. 테르와르에는 이러한 땅의 차이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유럽에 비해 턱없이 일천한 와인 양조 역사를 지닌 미국, 그 미국인들이 쓰는 말에는 테르와르에 합당한 말이 없으며 한글에도 역시 없다.조정용 비노킴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