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BMW가 영국 로버자동차 인수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BMW가 랜드로버를 라인에 편입, 모델을 다양화하고 로버로 대량생산의 기초를 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BMW 경영진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BMW가 주목한 것은 영국의 아이콘 미니였다. 미니는 헨리포드의 T, 포르쉐의 비틀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차다. T, 비틀, 미니는 대량생산에 초점을 맞춰 개발됐으며 디자인 아이덴티티가 강하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영국 자동차의 상징 로버를 인수한 후 BMW는 산하 브랜드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다 랜드로버와 재규어는 포드, 로버는 중국 난징자동차에 차례대로 매각했다. 포드로 매각된 랜드로버와 재규어는 올해 인도 타타자동차로 매각되는 변화를 겪는다. 이로써 BMW는 미니의 브랜드 마케팅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정리했다.미니 인수에 대한 논란이 일자 BMW 헬무트 판케 회장은 “영국인들이 미니가 숨겨진 보석인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로버 사람들은 미니라는 잠자고 있는 브랜드 자산을 몰랐고 미니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한 혼다의 가치도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미니는 지금 BMW의 효자 브랜드다. 미니의 독특한 디자인은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고 BMW는 여기에 자사의 엔진 기술을 접목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이탈리아 피아트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친퀘첸토도 혁신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피아트500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도 따지고 보면 폭스바겐 비틀, BMW 미니 등 동시대를 살아간 차들의 등장 때문이다. 피아트 경영진은 부진을 타개할 모델로 500을 생각했고 고객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종합해 2030세대들을 위한 차를 개발했다. 피아트500은 판매 개시된 지 15일 만에 2만5000대가 판매될 정도로 유럽 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부에서는 유럽 20대들의 아이콘으로 아이팟과 피아트500을 꼽는다.그동안 자동차에서 디자인은 기능을 보완해 주는 영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브랜드 간 기술 차이가 좁혀지면서 차별화를 위한 전략은 디자인으로 모아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시각적인 부분에 민감한 현대인들의 기호도 작용했다. 요즘 자동차 디자인 업계에서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디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 말은 디자인과 관련된 일부에게만 한정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사활을 건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디자인은 각사가 생존을 거는 전략 중 하나다. 멋진 차를 만든다는 것이 톡톡 튀는 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자동차 디자인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회사는 일본차 혼다다. 혼다를 창업한 혼다 쇼이치로는 일찍부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자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다루는 기계인 만큼 미세한 부분까지 감지하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이 혼다 쇼이치로의 꿈이었다. 혼다가 자랑하는 비저빌리티 인덱스(Visibility index)가 탄생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비저빌리티 인덱스는 운전자의 오감, 그중에서도 시각을 방해하지 않는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것이 포인트다. 시야를 넓히고 계기판도 운전자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두도록 했으며 레버나 스위치 등은 운전자가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렇게 해야 운전에 따른 피로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앞뒤면 모두가 날렵하게 설계됐고 벨트라인과 보닛의 높이가 낮아 유리가 차지하는 면적이 다른 자동차에 비해 넓다.닛산도 마찬가지다. 카를로스 곤이 만든 닛산 재생 프로그램의 요체는 디자인이다. 그동안 닛산차는 가격 경쟁력 외에 별다른 차별화 전략이 없었다. 성능에 비해 값이 싼 일본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르노에 인수되기 전까지 닛산은 독일 아우디, BMW와 같은 퍼포먼스로 세계 시장을 정복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혼이 없는 차를 사람들은 외면했다. 닛산자동차 사장으로 부임한 카를로스 곤은 닛산만의 고유한 디자인을 강조했다. 최근 세계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무라노, 로그는 물론 선루프의 곡선과 직선의 절묘한 조화라고 평가받는 인피니티의 성공도 닛산의 혁신 디자인이 밑바탕이 됐다. 국내에서 ‘이효리 차’로 불리는 큐브는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다.도요타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의 자동차 철학은 엘피네스(L-finesse:Leading edge+Finesse)다. 이는 정교함과 세련미를 상징하는 렉서스의 기술력과 디자인의 완성이다. 렉서스의 모든 차종에는 ‘끊임없는 예견’ ‘시대를 앞서가는 심플함’ ‘섬세한 우아함’의 세 가지 요소를 통합한 엘피네스가 담겨 있다. 유럽과 미국차에 비해 너무 밋밋하다는 단점을 렉서스는 정숙과 절제라는 동양미로 극복했다.기아차 쏘울도 디자인 혁신 사례로 꼽힌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공을 들여 영입한 피터 슈라이어의 역작인 쏘울은 기존 기아차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꾼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벌써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선주문 물량이 폭증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쏘울의 강점은 도시형 유틸리티 차량의 구매 계층을 20~30대로 확대했다는데 있다. 이들에게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는 도구다. 그동안 국내 차들이 내놓은 중소형 차량은 일본과 미국의 세단, 피아트, 아우디의 초소형 차량을 결합한 정도에 불과했다. 타깃 층조차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 그러나 쏘울은 개발 단계에서부터 국내보다는 세계시장을 겨냥해 만들었고 세계 디자인 업계의 호평을 받았다는 점에서 기아차의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작이다. 물론 쏘울이 피터 슈라이어의 고유한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그동안 피터 슈라이어가 선보인 작품은 곡선 조화를 강조한 차량이 많았다. 하지만 모하비와 쏘울은 곡선보다는 네모반듯한 직선미가 눈에 띈다.GM대우가 최근에 선보인 라세티 프리미어 디자인 콘셉트도 주목받는다. 라세티의 전체적 디자인은 모기업인 GM과의 통일성을 강조했지만 내부 앞좌석을 비행기 조종석같이 배열하면서 양쪽을 좌우대칭으로 꾸미는 듀얼 콕피트 디자인을 적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비행기 조종석과 같은 느낌으로 내부를 꾸미는 것은 사브, BMW 등 유럽에서 유행했던 것인데 최근 와서는 거의 모든 자동차 업체들이 채택하고 있다. 푸조는 최근 국내 선보인 308SW를 통해 실내를 우주선 조종석과 같이 꾸몄다.그렇다면 앞으로 자동차 디자인은 어떤 트렌드를 보일까. 요즘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인수·합병(M&A)의 각축장이다. 한 개의 그룹 아래 다양한 브랜드가 모이다 보니 통일된 이미지가 필요하다. 예전까지만 해도 국가에 따라 자동차 디자인이 구분됐다면 요즘 와서는 브랜드별로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가령 스칸디나비안 럭셔리의 상징 볼보는 북유럽 특유의 투박함을 벗고 세련됨을 강조하고 있다. GM도 산하 각 브랜드에 차별화와 통일성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구상 한밭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마니아층을 확보하려는 업체들의 경쟁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며 “전체적인 디자인 트렌드도 마니아 차와 일반 대중차로 뚜렷이 구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브랜드 차별화를 위해 패밀리 룩은 더욱 강조된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엠블럼인 트라이포인트 스타를 더욱 강조하면서 특유의 타워형 전조등과 사각형 라디에이터가 더욱 커지는 경향이다. 최고급 S클래스에서부터 소형 A클래스까지가 하나의 디자인 카테고리로 묶여 있다. 아우디의 싱글 프레임과 푸조의 펠린 룩, 파노라마 글라스 루프, 인체의 신장을 형상화한 BMW의 키드니그릴 등이 좋은 예다. 대신 플랫폼 등은 공유되는 사례가 늘어날 전망이다. 크라이슬러와 벤츠의 합병으로 E클래스 세단의 플랫폼이 크라이슬러의 300C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철강재 등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이다. 토러스와 머스탱은 포드 계열로 묶여 있지만 타깃 층이 전혀 다른 모델이다. 이들 모델이 각자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친환경 에너지는 디자인 업계에 던져진 새로운 화두다. 현재까지 개발된 하이브리드는 연료가 차지하는 공간이 가솔린, 디젤 차량보다 훨씬 크다. 엔진 공간이 커지다 보니 아직까지는 중형 이상급 차량에만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연료전지 기술이 발달하면 지금의 엔진 공간은 무의미해진다. 엔진 구동 공간이 차량 아래에 위치하면서 다양한 모습의 차량이 개발될 날도 머지않았다. 최근 모터쇼에서 발표되는 친환경 콘셉트카의 외형이 기존 자동차와 확연하게 다른 이유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송창섭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