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로 기업은행장

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시는 한국의 외환위기가 위장된 축복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힘든 시기였지만 결국 당시 외환위기는 국내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계기가 됐습니다. 이번 금융 위기도 활용하기에 따라 국내 중소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경쟁력이 있는데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몰린 중소기업들을 은행들이 적극 지원하는 길이 우리 산업 기반의 붕괴를 막고 은행도 사는 길입니다.”윤용로 기업은행장은 글로벌 금융 위기 한파가 몰아닥친 올 하반기 들어 시중 은행 수장 가운데 가장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과도한 덩치 키우기 경쟁으로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대형 시중 은행들이 ‘나부터 살자’며 기업의 자금줄을 옥죌 때 윤 행장은 일선 창구에 경쟁력을 갖춘 기업 지원을 독려하고 직접 중소기업의 생산 현장을 발로 뛰고 있다. 윤 행장은 ‘은행들은 이익이 생기면 개인화(personalize)하고, 손실이 생기면 사회화(socialize)한다’는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의 글을 빌려 시중은행들의 최근 행태를 꼬집었다.그는 얼마 전 방문한 한 중소 업체 공장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국내 산업계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함마저 느꼈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에어필터 업체로 특허가 공장 한 벽면을 도배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춘 업체인데도 라인 일부가 멈춰서 있는 것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기업이 무너지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윤 행장은 대형 시중은행들이 국내 산업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조업이라는 하체가 받쳐 주지 않는 금융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미국발 금융 위기에서 보지 않았느냐”며 “수익성 못지않게 공공성도 배려하는 은행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유동성 위기에 몰린 기업에 대한 윤 행장의 대응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그의 남다른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윤 행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재정경제부 은행제도과장으로 은행 증권 분야 구조조정을 처리했고 2004년 카드 사태 당시에는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 2국장을 지내는 등 주요 금융 위기의 한복판을 지나왔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국내 중소기업들이 생과 사의 경계에 내몰린 현 상황에서는 중소기업 금융 지원이 핵심 역할인 국책은행의 사령탑을 맡고 있다. 기업들의 우산을 자임하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윤 행장을 만나 유동성 위기 상황과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은행의 건전성 지표를 살펴보면 외환위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올 들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은행은 신규 자금 공급 중단뿐만 아니라 기존 대출마저 회수하면서 일시적 자금 애로를 겪고 있는 건전한 기업에까지 피해가 가고 있습니다. 실제 하반기 들어 5대 은행 가운데 기업은행을 제외한 4개 은행의 신규 중기 대출은 대폭 감소했습니다. 은행 자산 부실화와 이에 따른 자금 공급 경색, 실물경제 타격이라는 악순환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회생 가능한 기업에 대한 적절한 자금 공급이 이뤄져야 합니다. 조만간 신용보증기금이 중기 대출의 95%를 보증하는 제도가 시행될 예정이어서 시중은행의 중기 대출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봅니다.”“최근 몇 년간 진행된 리딩뱅크 및 자산 증대 경쟁 등 지나친 덩치 불리기 후유증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지난해까지의 실적 호조도 외환위기 당시 출자한 기업의 주식 평가 이익 등 비경상 부문이 컸습니다. 환투기성 수요로 기업의 엔(달러) 캐리 트레이드를 이용한 외화 대출이 2005년 이후 매년 21%씩 급증한 것도 원인입니다. 한국의 대외 채무 의존도는 20%로 일본 15.8%, 말레이시아 10.3%에 비해 높은 편인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 초기 외화 차입 여건이 악화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은행권의 외화 차입이 오히려 늘었습니다. 다행히 금융 위기 이후 은행권의 자산 확대를 자제하고 있고 고객 예금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어 유동성 위기는 다소 완화될 것으로 기대합니다.”“제가 앞장서 바젤2 시행 유예를 금감원에 적극 건의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위기 상황 발생으로 자산 시가 평가를 유예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마당에 유동성 위기에 처한 우리가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바젤2 적용 시 중소기업 대출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뒀습니다. 1년 유예 조치로 BIS 비율 하락 부담이 줄어든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여력이 19조 원가량 추가 늘어나게 됐습니다. 제도 도입도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제가 중소기업 지원을 높은 강도로 얘기하는 것은 보수적 은행의 속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행장이 강한 톤으로 얘기해야 일선 창구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지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성 있는 기업과 회생이 어려운 기업을 은행들이 선제적으로 선별, 대응해 경쟁력 있는 기업은 살리자는 겁니다. 통상 기업은 2~3개 은행과 거래하기 때문에 기업은행만 나서서는 문제 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시중은행이 동참해 줘야 합니다. 기업은행은 ‘체인지업’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데 유동성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에 컨설팅을 통해 부동산 매각 등 유동성 확보를 위한 자산 매각은 물론 매수자까지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인에게 회사는 수십 년간 키워온 자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은행이 컨설팅에 나설 때는 선뜻 반기지 않지만 윈-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중에는 대부분 고마워합니다. 기업 대출 담당자들에게 과거의 기록인 재무제표보다는 기업의 평판과 업력, 그리고 최고경영자(CEO)의 비전을 보라고 강조하는 것도 경쟁력 있는 기업은 살리자는 취지에서입니다.”“펀드시장이 급증하는 과정에서 불완전 판매 문제는 주요 국가에서 반드시 대두됐던 사태입니다. 결국 한번은 짚고 넘어갈 문제가 표면화된 셈입니다. 기업은행은 역외 펀드 판매를 지양해 온 관계로 상대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적지만 전체 금융권 차원에서 해외 사례를 연구해 공동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불완전 판매에 따른 소송에 대비해 자산운용사가 기금을 조성해 배상해 주는 펀드가 있는데 우리도 이 같은 방안을 제도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기업은행 대출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은 약 82%에 달합니다. 반면 타 은행들의 경우 안정성이 높은 가계 대출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습니다. 위험성 노출이 가계 대출 대비 2배 이상 높은 중소기업 대출이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실적을 거둔 것은 사실상 시중은행 가운데 톱 수준이라고 평가합니다. 작년 말 취임하자마자 건전성부터 챙겼습니다. 2004년부터 은행들이 외형 경쟁을 벌였는데 역사적으로 대출이 급증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싶어 부실 가능성 있는 기업에 대한 워치 리스트를 작성하는 등 건전성에 역점을 두고 사내 제도를 정교하게 바꿔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건설사가 친인척을 동원해 여러 지점에서 자금을 대출받은 사실을 확인하는 등 리스크 조기 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금융 위기로 국책은행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데 중소기업이 자금난을 겪고 있는 현 상황과 여건 등을 고려할 때 소유 구조 개편과 민영화 시기를 분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을 위해 설립을 추진 중인 한국개발펀드(KDF) 등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지 확인한 후 기업은행 소유 구조의 민영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경영 시스템은 시중은행과의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을 위해 규제 완화를 통한 조기 추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올해 예정된 5000억 원 가운데 3000억 원 내외는 신세계 물납주식(66만2956주)으로 출자하기로 했고 나머지 2000억 원은 현재 협의 중입니다. 내년의 5000억 원은 정부 예산에 반영돼 집행될 예정입니다.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유망 중소기업과 KIKO 거래로 손실이 발생한 기업 등이 주요 지원 대상입니다.”“정부 출자로 우량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 여력이 커졌지만 단기적으로 소액주주들의 주식 가치가 희석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거 외환위기 당시 정부 출자를 계기로 기업은행이 한 단계 도약했던 점을 상기하면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에도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실제 올 들어 중소기업 대출에 적극 나서면서 ‘역시 어려울 때 믿을 곳은 기업은행이다’며 돌아오는 고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같은 이미지 개선 효과로 고객 예금도 빠르게 늘고 있어 내년에는 예금부문 영업을 보다 확대할 예정입니다. 이런 환경을 감안할 때 안전하면서도 경기 회복 시 주주에게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가는 은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진짜 어려움은 내년에 닥칠 것이라고 임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외화 대출 축소와 자산 매각 등의 구조조정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수준의 침체는 아니겠지만 경영 환경이 올해보다 훨씬 어려워질 겁니다. 내년 상반기까지 어려운 시기를 지나 이르면 연말께 진정되지 않을까 내다보고 있습니다. 올해 위기에 대비한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기업은행장한국외대 영어과미네소타대 행정학 석사재정경제부 은행제도 과장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2국장금융감독위원회 부원장 겸 증권 선물위원회 위원장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