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시 읽는 CEO

외환위기의 여파로 금융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1998년, 지금은 없어진 평화은행의 김경우 당시 행장과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였다. 술이 몇 잔 돌자 김 행장은 특유의 유머와 풍자로 좌중을 압도하더니 이내 ‘한시(漢詩) 모드’로 돌입했다. 각자 한시를 한 수씩 읊어보자고 제안했던 것. 대부분이 백기를 들자 제법 취기가 오른 김 행장의 입에선 한시가 끝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런 그가 2001년 행장 직을 떠나면서 남긴 한시 한 편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衆鳥同枝宿(중조동지숙: 뭇 새들 한 가지서 잠을 자고는)天明各自飛(천명각자비: 날 밝자 제각각 날아가누나)人生亦如此(인생역여차: 인생도 또한 이와 같나니)何必淚沾衣(하필루첨의: 어이해 눈물로 옷깃 적실까)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무명씨의 작품인데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게 돼 있으니 주어진 현실을 슬퍼하지 말고 받아들이자는 뜻. 시 한 편이면 됐지 구구절절한 설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처럼 비유와 함축, 절제와 상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옛 시에는 시적 서정 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이 책은 주옥같은 한시와 시조 32편에서 건져낸 삶의 지혜와 경영의 교훈을 전해 준다. 시인인 저자는 옛시 속에 숨겨진 삶의 은유를 통해 여백의 사고와 직관의 힘,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략, 미약함에서 출발하는 위대함과 미완의 가치 등을 읽어낸다.초승달이 낫 같아(新月如鎌刀: 신월여겸도)산마루의 나무를 베는데(斫上山頭樹: 작상산두수)땅 위에 넘어져도 소리 나지 않고(倒地却無聲: 도지각무성)곁가지가 길 위에 가로 걸리네(游枝亦橫路: 여지역횡로)중국 시인 곽말약의 ‘초승달(新月)’이다. 여기서 저자는 상상력의 중요성을 읽는다. 똑같은 사물이나 환경도 어떤 감각으로 재해석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 부부 발명가 김성훈 박란 씨의 예에서 보듯 우리 곁의 사소한 것들을 ‘발상의 전환’이라는 렌즈로 보는 ‘신선한 감각’ ‘초승달로 산마루의 나무를 베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저자는 또한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네 /콩을 걸러 즙을 만드네/콩깍지는 가마 밑에서 타는데/콩은 가마 안에서 우네/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거늘/서로 볶기를 어찌 그리 급한가’라는 위나라 조식(192~232)의 ‘칠보시’에서 즉자적인 ‘날것의 언어’보다 은유와 상징을 녹여낸 ‘숙성의 언어’가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포착한다.장쩌민 전 중국 주석의 한시 외교로 유명해진 이백의 시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에서는 시 한 줄이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를 일깨워주고,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이 즐겨 암송한 백거이의 ‘술잔을 들며’에서는 ‘긍정의 힘이 통찰을 낳는다’는 섭리를 추출한다.한시뿐만 아니다.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구태여 꽃 밑 글자 읽어 무삼 하리오’라는 만해 한용운의 시조 ‘춘서(春書)’에는 분석과 논리보다 때로는 여백의 사고와 직관의 힘이 더 크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또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강산을 들일 데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는 조선 중기 문신 송순의 시조는 자신을 위한 욕심보다 세상을 품는 그릇의 크기가 진정한 부자를 결정한다는 것을 일깨운다.서화동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옛시 읽는 CEO고두현 지음, 21세기북스, 223쪽,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