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온통 황토 빛이다. 바다, 하늘, 땅, 무엇 하나 샛노란 황토 빛이 아닌 게 없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그 빛에 비춰진 소나무는 검은 먹빛이다. 제주에서 30여 년간 토속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는 우성 변시지 화백의 그림에 나오는 제주도는 한결같이 황토 빛과 먹빛으로 뒤섞여 있다.제주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쪽빛 바다, 하얀 백사장, 녹음이 짙게 물든 오름과 눈 덮인 한라산 등등 다양하다. 변 화백을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찾은 7월 말, 시내 곳곳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1주년을 축하하는 기념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길 따라 늘어선 야자수를 바라보면 제주는 동남아 어디쯤에선가 볼 수 있는 남국(南國)의 모습이다.화단에서는 원로 서양화가인 변 화백에게 ‘토속화가’ ‘제주화가’라는 칭호를 붙인다.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색채와 색감으로 사물을 묘사하기에 그의 그림은 서양화와 한국화, 민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유화로 우리 정서를 담아내는 변 화백의 그림은 그래서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림 속에 나타난 자연은 우리가 잊고 지내는 과거이자 현재이기 때문이다.그와의 만남에서 던진 첫 질문 역시 “왜 그렇게 황토 빛을 고집하느냐”였다. “1975년 제주도에 오는데 그때 비행기 위에서 본 제주의 풍경이 바로 황금빛이었습니다. 저도 그때까지 제주라고 하면 푸름을 떠올렸는데, 석양에 물든 바다나 땅이 모두 황금색으로 변할 때 풍요로움을 뛰어넘어 경외감까지 느껴졌습니다. 노랑색은 굉장히 화려한 색입니다. 화려한 색으로 우리 정서를 표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저에겐 숙명이었습니다.” 인터뷰 당일 변 화백은 노란 티셔츠를 입고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사실 변 화백은 해외에서 먼저 알려진 작가다. 제주 서귀포 태생인 그는 여섯 살 때 가족들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넘어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조기 유학인 셈이다. 서귀포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덕택에 그의 유년 생활은 비교적 넉넉했다.친구들과 씨름을 하다가 발을 다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그는 손에 붓을 잡기 시작했다. 1945년 오사카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2년 후인 1947년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미술대전 광풍회(光風會)와 일전(日展)에 연거푸 입선한다. 그리고는 이듬해 광풍회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쥔다. 당시 일본 역사상 최연소였고 외국인이 최우수상을 탄 것 역시 처음이었다. 그전까지 최우수상을 탄 사람들이 대부분 40~50대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수상은 일본 화단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심사위원회는 20대 초반인 한국 청년에게 일본 최고 작가라는 칭호를 붙여야 하는지를 놓고 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일본 평론가들의 눈에 비친 그의 작품에는 일본다운 모습이 전혀 없었다. 이것이 그가 화려한 일본 생활을 접은 이유이기도 했다. 때마침 서울 미대 교수 초빙을 계기로 그는 영구 귀국을 결심한다.광풍회 최연소 최우수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은 그에게는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명예를 가져다 줬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주류에 줄을 서야 작가나 교수로서 성장할 수 있건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과감히 걷어찼다. 작가는 명예, 권력, 물욕과 타협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스스로 구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1957년 귀국 후 그의 눈에 비친 한국 화단은 한국미술협회와 대한미술협회로 양분돼 당파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작가들의 요람인 미술대회부터 손볼 것을 주장했다. 직접 개혁안까지 마련한 그의 모습이 양쪽 화단으로선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마침 5·16 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부는 사회 곳곳을 개혁하기 시작하고 부패로 얼룩져 있었던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부의 개혁안에는 그가 제시한 미술대회 개편안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미술계에선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물론 서울 미대 교수직도 한순간에 날아갔다.귀국 직후 변 화백이 몰두한 화풍은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었다. 도시화로 삭막해져 가는 서울에서 아름다움을 그려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곳은 창덕궁(옛 비원). 창덕궁의 고즈넉함과 메트로폴리탄 서울을 대비한 당시 그림은 거의 모든 작품이 일본 유명 화랑으로 팔려나갔다. 이 시기를 가리켜 평론계에서는 변시지 작품 세계의 2막, 즉 ‘비원파 시대’라고 부른다.일본 광풍회 입선이 1막, 서울 비원파가 2막이라면 3막은 제주와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화가들이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해외로 떠나던 시절, 그는 반대로 화려한 명성을 뒤로하고 일본에서 서울로, 그리고 제주로 끝 모를 구도자의 길을 떠났다.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미술의 길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화 역시 작가 스스로가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소재는 아무거나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그는 작가야말로 매 순간 자신을 비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바로 그랬다. 광풍회, 일전에서 그리던 스타일을 모두 던져버리고 서울 창덕궁에서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했으며 다시 제주도에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완성한 것이다.“비원파 기법으로 제주도를 그렸는데, 뭔가 어색했어요. 비원파 당시 그렸던 그림들은 죄다 화려하게 채색됐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주도는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제주도였는데 속은 제주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술만 마실 수밖에요. 1주일 동안 밥 한 공기도 먹지 않고 술만 마셔댔는데, 그렇게 제 자신과의 싸움을 2년 간 벌이다 보니 지금의 제주화가 그려지기 시작하더군요.”1977년부터 그는 자신만의 눈으로 제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변 화백은 그저 옛날에 잘나갔던 서양화가였을 뿐이었다. 제주도 서귀포 구석에서 한국적인 그림을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골몰하던 변 화백을 세상은 더 이상 기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송곳을 주머니에 넣는다고 날카로움마저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그의 뛰어난 예술 세계는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1997년 야후가 선정한 ‘세계 100대 화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면서 그는 다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변 화백의 작품에 등장하는 세상은 온통 황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하늘 위에는 태양이 이글거리고 바다, 육지 모두가 노랗다. 석양에 물든 모습일까. 또 그의 그림에는 조랑말, 까마귀, 고개 숙인 나그네가 홀로 등장한다. 어떨 때는 바람과 맞설 때도 있고 또 어떨 때는 현실의 벽 앞에 고개를 숙이고도 있다. 등장인물 모두 짝이 없다. 그래서일까. 그림 속에 등장하는 동물, 사람 모두 한없이 외로워 보인다.“만약 한 쌍이 있다고 칩시다. 아마 그림 속에 등장하는 까마귀나 조랑말, 나그네는 자기들끼리 대화하겠죠. 제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자기들끼리가 아닌 관객들과 대화했으면 합니다. 바람도 마찬가지예요. 제주의 근본은 바로 바람입니다. 바람은 이곳 사람들의 삶 그 자체죠. 비록 바람은 강하지만 그 속에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넘어야 할 과제이자 의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희수를 훌쩍 넘긴 노 화가의 말을 듣다 보니 그림 속 나그네가 자꾸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멀리서 보기엔 현실의 벽이 힘겨움을 토로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나그네는 바람과 맞서고 이겨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변 화백의 삶이 바로 그랬다.고향인 제주도 서귀포로 내려온 이후 지금까지 그는 홀로 생활한다. 손자의 귀여움을 보며 말년의 편안함을 누리는 것조차 그에겐 사치였을까.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그는 스스로 절제하고 세상과 적당히 담을 쌓았다. 그러면서 후학들에게는 ‘자신의 그림 세계를 절대로 따라 해선 안 된다’고 수없이 강조한다.현재 그는 외사촌인 기당 강구범 선생이 제주도에 건립, 기증한 기당미술관의 명예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기당미술관은 1986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 미술관이다.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고향 서귀포도 변했다. 제주도 곳곳에 들어서는 고급 리조트, 호텔, 골프장 등을 바라보는 노 화가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어릴 적 고향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야 하건만 그러기엔 주변이 너무도 변해 있었다.“제주다운 것들이 들어서야 하는데 온통 유럽 스타일의 건물만 지으니…. 우리 고유한 것들을 없애고 거기에 짓는다는 것이 죄다 외색(外色) 일색이니, 과연 어떻게 제주도가 매력을 발산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의 힘은 무시할 수 없나 보다. 1000여 점의 다작을 쏟아냈지만 이제는 1주일에 소품 하나 그리기도 힘들다는 그는 요즘 수묵화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정신을 집중해 획과 점으로만 세상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노 화가가 마지막 이루고 싶은 미술 세계다.득도를 경험한 구도자처럼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느낀다”는 그는 “지금까지 화려함과 현란한 붓 터치로 제주를 그렸다면 앞으로는 점과 선으로 세상을 담아내고 싶다”고 강조한다.현재 그의 작품 2점이 미국 워싱턴DC 소재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10년간 전시돼 있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된 것은 동양인으로 변 화백이 유일하다.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미술의 길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화 역시 작가 스스로가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제주 기당미술관 명예관장오사카 미술학교 졸업서라벌 예술대, 제주대 교수 역임제주=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