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Suit
난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이런 가운데 고유가로 에너지 절약이 화두가 되자 패션계에서도 2005년부터 일본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쿨 비즈(Cool biz) 패션이 한국에 상륙한 사건이 이슈가 됐다. 에너지 절약과 환경 보호를 할 수 있도록 실내 온도를 섭씨 2도 올리는 대신 넥타이를 매지 않음으로써 체감 온도를 낮춘다는 쿨 비즈는 유명 인사들을 내세운 패션쇼까지 대대적으로 진행하면서 지난 몇 달 사이에 무시무시한 트렌드 전파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백화점 세일 매출을 보면 남성복만 지난해에 비해 감소했다는 뉴스가 전해진다.물론 일본에서는 쿨 비즈가 장기적으로는 남성복 업계의 캐주얼화를 가속시키고, 남성복 산업을 부흥시키고, 남성들을 패션에 더 많이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보고서도 보이지만 지금 당장 한국 남자들에게는 흰색 와이셔츠에 노타이 차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캐주얼한 근무복을 거부하는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던 금융계에서조차 쿨 비즈를 채택할 것이라는 보도와 함께 쿨 비즈로 인해 연간 3000억 원 정도의 에너지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는 기사가 씁쓸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남성들의 슈트 차림을 경제의 논리로만 바라보는 시각 때문일 것이다.남성복에 있어서 클래식 슈트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것이다. 남들과 함께 있어도 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묻히지도 않는 것. 물론 2008년 가을 겨울 남성복 컬렉션의 대세는 캐주얼 감각이다. 노타이 스타일의 다양한 셔츠들과 여성성이 한껏 묻어나는 컬렉션을 진행한 프라다의 선견지명이 놀랍기도 하지만 어쨌든 남성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슈트다.내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요즘 한국에서 일고 있는 클래식 슈트의 열풍과 반대로 편안한 룩이 대세다. 그래도 한국에는 이탈리아까지 날아가 수제 셔츠나 슈트를 맞춰 입으려는 새로운 소비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1986년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남성복 산업의 부흥을 위해 이탈리아 남성복계의 최고 기업들이 모여 클라시코 이탈리아(CLASSICO ITALIA)를 만들었다. 키톤, 보렐리, 프레이를 비롯해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수입하는 스테파노 리치(STEFANO RICCI)와 같은 브랜드가 클라시코 이탈리아 소속의 기업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오랜 전통과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항상 그 시대의 클래식을 만들어가는 기업들이다. 이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철학을 잊지 않고 유지 보존해 나간다는 사실이다.40만 원을 호가하는 보렐리(Borrelli) 와이셔츠나 프레이(Fray)를 사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제 와이셔츠의 한 땀 한 땀 기울인 정성과 그 장인정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대변하고자 하는 남성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폴리 룩의 대표 격인 키톤(Kiton) 슈트에 보렐리 셔츠를 입고, 여기에 수제화 구두를 맞춰 신으면서 자신을 가꾸는 새로운 그루밍족(grooming족: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이 남성 비즈니스 세계에 입문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들은 정말 소수이고, 또한 그들이 한국 남성 패션 시장을 이른 시간 내에 바꾸어 주리라는 기대 또한 쉽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이웃 일본처럼 클래식 슈트를 진정 이해하고 사랑하며, 기꺼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라도 자신의 몸에 잘 맞는 클래식 슈트를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으면 한다.경제가 어렵다. 이 어려운 때에 웬 패션 타령이냐고 할 수 있지만, 요즘 거리에서 만나는 남성들의 패션을 보면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유가의 고공행진과 경기 침체가 한창 변화의 가속도가 붙어 있던 남성 소비자들을 다시 패션과는 무관한 생활인으로 돌려보내고, 뭔가 바꾸려는 혁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남성복 패션 업계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일수록 뭔가 재기발랄한 패션계의 반격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이정민 퍼스트뷰코리아 이사©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