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주 혼케 가마도야 회장

본에서 가네하라홍주(金原弘周) 혼케 가마도야 회장은 ‘재팬 드림’을 이뤄낸 성공한 재일동포 기업인으로 통한다. 가네하라홍주 회장의 한국 이름은 일본 이름에서 가운데 원(原)자를 뺀 김홍주다. 일본인이나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가네하라’라는 이름만 들으면 ‘아! 민족 자긍심이 대단한 한국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고 김(金)이라는 성 뒤에 ‘근원 원(原)’자를 썼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그가 운영하는 혼케 가마도야(本家 かまどや)는 1980년 설립된 이후 전국적으로 2348개의 점포를 보유한 일본 최대 도시락 프랜차이즈다. 지난해에만 152개 점포가 새로 생길 정도로 사세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만 1120억 엔(1조634억 원)으로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조사한 일본 프랜차이즈 업체 순위에서 매장 수로는 3위, 매출 규모로는 9위를 차지했다. 혼케 가마도야보다 매장 수가 많은 곳은 다국적 프랜차이즈 맥도날드와 일본 최대 패밀리레스토랑 스카이락 뿐이다.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김홍주 회장에 대해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도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김 회장은 베일에 싸여 있다. MONEY가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된 것도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다.혼케 가마도야가 설립 20여 년 만에 일본 최고의 프랜차이즈로 성장한 데는 김 회장의 탁월한 경영 능력이 주효했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20대 초반부터 빛을 발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한국어가 좀 서툴렀다. 그 때문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위해 1967년 한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가정환경이 넉넉지 못한 탓에 한국 유학 생활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라멘(일본식 라면)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같이 유학 온 친구들과 돈을 모아 무교동에 있는 레스토랑 하나를 인수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먹는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죠.”당시로선 그의 경영 스타일은 파격적이었다. 낮에는 가게를 레스토랑으로, 밤에는 카페로 꾸몄다. 주변 직장인들을 고려해서다. 그리고 경력이 오래된 지배인을 스카우트했다. 덕분에 개업식 때부터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지배인의 인맥을 총동원해 개점 행사 때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문화, 예술인들과 정관계 인사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죠. 민주당 의원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개점식 때 참석했습니다. 이후 우리 가게는 무교동의 명소가 됐습니다.”하지만 그는 한국 유학 생활이 끝나자 가게를 청산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당시 재일동포들은 정규 교육을 끝마쳐도 취업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근대화로 기업들마다 일자리가 차고 넘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몫이었다. 재일동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술집 등 유흥업과 전당포로 대표되는 대부업, 사업, 빠징꼬 등이 전부였다. 힘깨나 쓴다면 주먹 세계로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일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일은 구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뿐이었다.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일했지만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우연한 기회에 회사를 차린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다. 패망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히 서구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구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일본 내 구두를 제조하는 회사만 700여 개에 달했다. 그가 세운 ‘홍동제화’는 설립 3년 만에 일본 내 ‘빅5’ 업체로 급성장했다.“일반적으로 구두와 같은 패션 업종들은 유행에 민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매번 신상품을 만드는데, 당시 대다수의 구두 업체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 딱 1개 스타일의 제품만 만들었습니다. 대신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을 만들었죠. 1개만 만드니 원가가 절감될 수밖에 없었고 대량생산하다 보니 물건을 납품하는 시간도 단축됐습니다. 품질 향상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그러나 그는 9년간 회사를 운영하고 문을 닫았다. 그는 “구두 회사와 같은 패션 산업은 회사 규모가 커지면 유통 구조가 복잡해져 마진이 줄게 되며 결국에 부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구두 회사를 정리한 뒤 그가 뛰어든 사업이 바로 오늘날 그를 일본 프랜차이즈 업계 신화로 만든 혼케 가마도야다. 외국인이 일본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벤토(도시락)의 나라’다.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오늘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솟은 비결도 도시락이다. 서구사회가 1시간 이상을 점심시간으로 보내는 동안 일본인들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신화를 이룩했다.따라서 후발 주자인 김 회장으로선 타 업체들과의 차별화가 관건이었다.“당시 일본 회사들이 만든 도시락은 모두 데워 먹어야 했습니다. 신선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냉장 보관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전 생각이 달랐습니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평상시 먹는 밥을 소비자에게 전달해야 했죠.고품질 재료를 사용한 것도 큰 효과를 봤다. 당시 일본 도시락 업체들이 사용한 쌀은 평균 이하의 품질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혼케 가마도야는 최상의 제품만을 사용했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맛있는 혼케 가마도야는 어느새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인터뷰 중간 어쩌다 도시락 프랜차이즈를 생각했는지 물었다.“먹는 데 한(恨)이 맺혀서 그랬습니다. 1980년 당시 일본에 막 프랜차이즈라는 유통 시스템이 도입됐는데,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떤 프랜차이즈를 해야 할까 고민했죠. 경기를 덜 타는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겠습니까. 당시는 재일동포들에겐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10남매 중 막내인데 제 위로 7남매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부모님도 평생을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다 제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나셨죠. 이렇게 성공하신 걸 보면 너무 좋아하셨을텐데….”고생한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가 제주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부모의 영향 때문이다. 김 회장의 부모는 제주도 서귀포 태생이다. 그가 기억하는 부모님은 ‘일본에 살아도 조선 사람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민족적 자긍심을 늘 강조한 분들이셨다. 1991년부터 김 회장은 서귀포 내 부동산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동기는 없었다. 반 실향민이었던 부모를 기리는 마음에서 시작했다.“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냥 나중에 은퇴 후 목장이나 할까 하는 생각에 매입했는데 그게 오늘날 이렇게 커졌습니다.” 현재 그가 보유한 제주도 내 토지는 264만여㎡(80만 평)나 된다.그는 끈기가 강하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물러서는 일이 없다. 한번은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간사이학원 내 실내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골프를 경험한 김 회장은 이후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 간사이 지방 골프 선수로까지 활약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세미 프로 수준의 골프 실력을 자랑한다. 그가 남제주군 안덕면 상천리에 고품격 핀크스 골프코스를 조성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원래 사파리나 할까 생각했는데 제주도처럼 골프 하기가 좋은 곳이 없지 않습니까. 제 성격이 원래 시작하면 최고가 돼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아예 한국에서 최고의 골프코스를 만들자고 다짐했습니다.”1995년 8월 착공에 들어가 1998년 9월 완공된 핀크스 골프장은 퍼블릭 9홀과 멤버십 18홀로 구성돼 있다. 핀크스 골프장은 2005년과 2007년 미국 골프다이제스트가 뽑은 세계 100대 골프코스로 선정됐다. 유럽 최고 권위의 골프 전문 잡지 골프 월드가 선정한 세계 100대 골프코스(2005년)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핀크스 골프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유러피안 골프 투어 대회가 열린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하는 한·일여자프로골프국가대항전도 매번 핀크스 골프장에서 연다.핀크스 골프장이 밑그림이라면 포도호텔은 채색 작업이다. 포도호텔 역시 그의 손길이 곳곳에 배어 있는 역작이다. 핀크스 골프장의 부대시설로 지은 이 호텔은 내부 시설, 객실료 등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위트룸은 하루 숙박료만 200만 원이다. 포도호텔은 국내 유일의 단층형 호텔이다. 호텔 주변에 돌담을 쌓았고 지붕도 동그랗게 만들어 제주의 옛 풍경을 재현해냈다. 객실 내부에는 서까래가 놓여 있다. 창문을 열면 자연스럽게 툇마루와 연결된다. 가장 한국적인 호텔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한지를 깔고 그 위에 콩기름을 여러 번 덧칠해 객실 바닥을 깔았다.“일본 NHK 프로그램 중 ‘세계의 예술가’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봤습니다. 하루는 다다이즘의 거장 마르셀 뒤샹의 생애를 조명한 적이 있는데 생전 그가 살던 집이 TV에 나왔습니다. 저층으로 이뤄진 집이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죠. 그 집을 포도호텔의 모티브로 삼았습니다.”설계는 재일동포 건축가인 이타미 준이 맡았다. 이타미 준은 이 호텔 설계로 2003년 7월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를 수상했다. 단층에다 지붕을 제주도 전통 초가지붕 스타일로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도 모양이 나왔다. 사실 처음 포도호텔이라고 이름을 붙이자고 했을 때 주위에선 한사코 만류했다. 영어나 프랑스어로 된 이름을 붙여야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순우리말 ‘포도’를 주장했다. “사실 요즘 제주도 내에 들어서는 호텔들을 보면 하나같이 유럽 스타일 일색입니다. 제주도는 제주도다워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세계인들이 제주도를 찾아오죠. 제주에 와도 제주도다운 것을 볼 수 없다면 뭣하러 옵니까.”포도호텔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아라고나이트 온천수다. 이 호텔에는 객실마다 온천수가 공급된다. 히노키 욕조 위로 온수 냉수 온천수가 나온다. 포도호텔의 온천수는 지하 2000m에서 끌어올린다. 물 온도는 섭씨 72도다. 일반 온천수가 섭씨 24~25도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더군다나 이 온천수는 아라고나이트 성분이 함유돼 있어 혈액순환은 물론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온천욕을 하고 나면 바닥에 하얀 진흙 같은 침전물이 모이는데 이것이 바로 아라고나이트다. 일본 내 2만2000여 곳의 온천 중 아라고나이트 성분이 함유된 곳은 2~3곳에 불과하다.제주도는 원래 화산섬이어서 지하에 물이 고일 수가 없다는 것이 지질학계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본 탐사 업체와 지질 조사를 벌인 결과 지금의 포도호텔 자리 아래 분명히 지하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하에 물이 고여 있으려면 주변이 화강암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때까지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기반 시설을 설치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고 공사 금액은 500억 원 이상 소요됐다. 시추 업체도 수차례 바꿨다.“공구가 90도를 유지해 가면서 땅을 파내야 하는데 중간에 땅이 함몰되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 때문에 온천을 파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2001년 3월 딱 2001m 30cm를 파냈을 때 아라고나이트 온천수가 쭉 솟아올랐는데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습니다.”김 회장의 집념은 국내 지질학계의 정설을 뒤집었다. 제주도 지하에 엄청난 화강암 지대가 형성돼 있으며 150만 년 전부터 형성된 온천수가 고여 있다는 것도 포도호텔의 성공으로 입증됐다.핀크스 골프코스와 포도호텔을 지으면서 늘 직원들과 함께 외쳤던 구호 “100대, 100대, 100대(100대 골프코스 목표), 온천, 온천, 온천”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김 회장은 한 달에 1~2번 주말을 이용해 오사카~제주 간 직항기를 타고 와 포도호텔에서 묵으며 휴식 겸 사업 구상을 한다. 그는 요즘 복합 레저 프로젝트 ‘비오토피아’ 조성 사업에 여념이 없다. 비오토피아는 해발 300m 한라산 자락 73만㎡(22만 평)에 조성되는 미래형 복합 리조트다. 디자인에서부터 건자재, 소품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명품으로 맞췄다. 최고급 수입 목재와 가구, 전자제품으로 꾸민 단독주택 18가구와 타운하우스 135가구가 들어서는 비오토피아에는 미술관 생태공원 생태습지 어린이공원 낚시터 등이 들어선다. 내부 시설 하나하나가 웬만한 특급호텔 이상 수준이다. 단독주택 18가구는 이미 분양이 완료됐다.1995년 간사이 지방을 강타한 리히터 규모 7.2의 고베 대지진은 그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줬다. 고베는 혼케 가마도야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다행히 본사 건물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가 구입해 둔 지상 10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지진으로 완전히 붕괴됐지요. 정말 엄청난 피해였습니다.”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고 김 회장은 당시를 회상한다. 당장 가맹점 피해 상황부터 파악해야 했지만 그는 사람부터 먼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나고야에서 프로판 가스를 대거 가져와 음식을 만들어 무료로 도시락을 배포했다. 이후 고베 시민들 사이에서 혼케 가마도야의 명성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물론 매출도 급신장했다.그의 성공 비결은 창의력에 있다. 그리고 그는 해답을 고전(古典)에서 찾는다고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나 ‘플루타크 영웅전’, ‘로마제국 흥망사’를 늘 옆에 끼고 삽니다. 위인들의 인생을 보면 얻는 게 참 많습니다. 직원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도 다 나와 있죠.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긍정의 힘을 바탕으로 남과 다른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제 경영의 요체입니다.”그는 정복자 카이사르나 알렉산더에게선 ‘창조적인 정복’을, 노자에게선 자연과 함께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마음’을 배운다고 말한다.혼케 가마도야는 현재 상장을 준비 중이다. 상장이 완료되면 그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생각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식량 문제가 화두가 될 겁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친환경 농업 분야입니다. 전 그걸 현대농업이라고 부릅니다. 효율성을 높여 고품격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가령 도심 고층에서 벼농사와 밭농사를 짓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현재 미국 모 연구 기관이 준비 중이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화될 날도 그리 머지않았습니다.”그에게 조국은 목숨과도 같다. 다른 나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지만 굳이 한국행을 택한 것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몸속에는 뜨거운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생각에서다. 핀크스 골프장에서 열리는 한·일여자프로골프 국가대항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이기면 그날 저녁은 늘 만취한다. 한국 국적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김 회장의 한 지인은 그가 호텔 이름을 포도라고 한 것도 민족 시인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한다.그는 재일동포 권익 향상을 위한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2005년 재일동포들의 채권을 주로 처리하는 채권 회수 회사 ARA를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 경제 붕괴로 지난 몇 년간 재일동포들은 엄청난 경제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본 금융 회사를 찾아가도 재일동포는 번번이 후순위로 밀리다 보니 경영난을 호소하며 문을 닫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채권 회사는 우리로 치면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재일동포들만을 위한 채권기관이 설립된 경우는 ARA가 처음이다.“늘 일본인에 밀리다 보니 재일동포의 채권만 5조 엔이 넘습니다. 심각한 수준이죠. 그렇다고 해서 쉽게 허가를 내주지도 않습니다. 채권은 보통 검은 돈과 연관성이 많기 때문에 재력과 도덕성을 함께 검증합니다. 회사 설립 작업을 마무리하고 일본 법무차관과 차를 마시는데 그 사람이 대뜸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지난 2개월 동안 일본 사법당국이 저를 몰래 미행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만약 친인척, 개인 비리가 나왔다면 절대 허가되지 않았을 겁니다.”그러면서 그는 지난 2001년 민족은행을 설립하다가 실패했던 것을 너무도 아쉬워했다.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 해보고 싶은데 재일동포 사회가 생각처럼 잘 뭉치지 않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