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을 막론하고 우리의 식사는 진지한 일상이자 문화의 출발이었으며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원으로서 변천을 거듭해 왔다. 식탁 위의 모든 것들은 지정학적 요인을 반영하고 시대정신까지도 표현해 내기 때문에 우리의 흥미를 자아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잘 표현하고 있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빵에 비유하면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나 로마 등이 그러하듯, 만찬은 신에 대한 제사로부터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통해 1년에 몇 번 성찬을 즐길 수 있었듯이 말이다.식탁을 수놓는 다양한 스푼과 포크, 나이프, 도자기 그릇과 같은 오브제들은 앤티크로 남아 컬렉션의 대상이 되고 세월이 흐르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그 가치는 상승한다. 테이블 세팅 분야가 날로 성황이고 푸드 스타일리스트들이 미래의 직업군으로 인기를 얻자 그 가치는 새로 인식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같은 투자가들이 은(銀)에 주목하자 은값이 치솟고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 커트러리(스푼 포크 나이프)가 상한가를 달리고 있기도 하고 유명한 경매장에는 17~19세기께의 자기 그릇들이 단골 품목으로 등장한다.서양문명의 요람이랄 수 있는 그리스의 호메로스 시대의 연회 장면을 오디세우스의 입을 빌려 들어보자. “솔직하게 말해서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나눠 주는 것만큼 기쁜 때는 없으리라.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음유시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식탁마다 빵과 고기로 가득하며 술 따르는 하인이 술병을 들고 식탁을 돌아다니며 술잔을 채워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듯하다.”연회의 요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셈이다. 음악과 노래, 신분에 따른 좌석 배치, 그리고 술 따르는 사람의 상징적 역할까지 그리스 요리가 바다에 근간을 둔다면 로마는 땅에 기초한 농산물이 중심이었다. 부유한 그리스 사람들의 연회는 초저녁 시간에 열렸다. 어린이와 여성이 철저히 배제된 연회에는 성년에 가까운 아이들이 끼어들더라도 아버지의 카우치(소파)나 친구의 카우치에 함께 앉아야 했다.식사만을 위한 정찬은 데이프논(deipnon)이라 하여 식사 후에 사교적인 목적으로 술을 주로 마시는 심포지온(symposion)과 구분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심포지온은 토론의 장이었으며 남자만의 사교 모임이었다. 로마인이 주둔했던 영국에서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식사가 끝난 후 여자들을 다이닝 룸에서 물러나게 한 후 남자들이 남아서 독한 술을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정치적 화제나 음담패설을 나눈다. 고대 그리스의 심포지온은 BC 7세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다이닝 룸의 기원이랄 수 있는 식당이 이즈음에 설치된다.로마인들은 세 번의 식사를 정확히 지켰다. 그러나 대부분은 간편식이었고 제대로 된 식사는 세나(cena)였으며 연회(convivium)는 실속 있는 식사였다. 음식을 충분히 마련하고 비스듬히 기대 앉아 여유롭게 식사를 즐겼다. 로마의 콘비비움은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여자도 참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스와 대비된다. 키케로는 연회를 로마인의 문명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저녁식사에 손님을 초대하며 더불어 나누는 삶이란 뜻을 지닌 콘비비움은 우리 조상의 훌륭한 생각이었다”고 말했다.로마가 몰락하고 크리스트교가 등장하는 시점에서는 문화가 남김없이 파괴됐으며 기존의 전통은 전승되지 못했다. 중세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식탁은 12인용이 대세인 것도 12제자에서 비롯된다. 13명은 초대하지 않는다. 만일 13명일 경우 어디서든 한 명을 충원해야 하기 때문에 그를 루이 14세라 불러준다. 위로의 호칭인 셈이다.수도원의 전통과 금식의 미덕을 장려하는 중세이지만 기사들은 사냥과 폭식을 즐기는 연회를 베풀었다. 식사는 좁은 가대 위에 놓인 판재에 식탁보, 즉 리넨(linen)을 깔고 벽을 등진채 길게 앉아서 식사를 했으며 리넨의 주름(linen holed)은 가구 장식의 모티프로도 사용됐다. 테이블에는 나이프 한 개가 달랑 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고기를 써는 작업은 식탁에서 이뤄지고 있다. 여러 위험 요소들을 배제하고 나이프가 식기 도구로 정착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금기 사항이 생겨나게 됐다. 항시 전투 태세를 갖춘 기사들이 상류층을 구성했던 중세에는 ‘나이프를 상대방의 얼굴 쪽으로 향하게 하지 마라’ 등의 예법이 나타난다.스푼은 수천 년 전에 나타났지만 개인용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서다. 포크는 비잔티움에서 베네치아로 시집 온 공주에 의해서 이탈리아에 소개되고 다시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로 시집간 카트린에 의해 드디어 유럽에 상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준 손으로 먹어야 한다고 포크를 비난했다.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식탁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식사 방식도 변화한다. 19세기에 이르면 보다 정교한 오늘날의 테이블 세팅에 이른다.직사각형의 테이블에는 반드시 암 체어를 상석에 배치한다. 그날의 주빈을 위해서다. 원탁 테이블은 평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의자는 사이드 체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해외 교역의 영향으로 영국 조지언 시대에는 가구를 마호가니로 만들었다. 이로써 테이블 클로즈를 벗겨내도 세팅에 문제가 없어졌다. 테이블 자체로도 훌륭하기 때문이다.테이블 위의 세팅은 정해진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을 지키는 이유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이 규칙에 따라 식사를 즐기려면 상당한 훈련이 요구된다. 암기하려는 것보다 테이블 세팅의 구조를 이해하면 적응하기 쉽다. 사람들을 자주 초대하고 싶도록 식탁 위의 예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 문화지수 향상에 크게 유익하다. 스털링 커트러리와 앤티크 접시 와인 액세서리, 클라렛 저그 한 벌 쯤 갖춘다면 손님을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 것이다. 외식에 길들여진 가정은 불행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세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아내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1 웨지우드 테이블 웨어 풀세트.2 루이 15세 시대의 금 촛대 한 벌로 천사가 빛을 안고 있는 모양이다. 식탁에는 이러한 고급 촛대들을 사용해 한결 감각적으로 연출한다.3 아르데코 데미타스 컵. 컬렉터블한 한 개로 오히려 감성을 자극한다.4 아르데코의 셸리 디자인 티 서비스.5 실버 슈거 텅과 서비스 스푼이 한 벌로 구비됐다. 모노그램을 표현해 한층 우아하고 고급스럽다.6 상아 손잡이에 실버 커트러리로 19세기 프랑스 제품이다. 선명한 모노그램은 주문자 부부의 이니셜일 가능성이 높다.7 19세기 크리스토플 디자인으로 골드와 실버의 조화가 뛰어나다.8 케이크 서비스 나이프로 아름다운 금도금이 우아하다.9 보헤미안 리큐어 디캔터. 아르데코 세팅에 잘 어울린다.10 아트 앤드 크래프트 티 케틀(주전자). 알코올램프까지 있어서 실용적이고도 세팅에 특별함을 준다.11 프랑스의 유명한 실버 스미스 퓌포카(Puiforcat)의 르네상스 스타일의 스털링 실버 서비스 세트.1 세브르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진 연회 세팅 장면이다. 중앙에는 백색의 비스킷 조각이 식탁을 즐겁게 한다. 유럽에서는 식탁에 조각을 진열해 즐기는 전통이 17세기 무렵에 나타난다. 2 순전히 스털링 실버로 테이블을 세팅한 광경. 차가운 느낌과 고아한 식탁으로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독일의 18세기 스털링 제품들이다.3 중세의 판화로 리넨 크로스와 세팅의 단면을 보여준다. 4 나이프 세트로 손잡이가 자개로 되어 있어 더욱 빛을 낸다. 5 프랑스의 19세기 리모주 금도금한 접시와 커트러리가 어우러져 세팅의 최고급을 보여준다.6 19세기 프랑스 상아 손잡이의 실버 커트러리 서비스.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