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있는 대출’로 금융계 새바람

출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대출금 잔액 전액을 상환 면제해 주고, 대출 받아 산 집에 불이 나면 1억 원의 보상금을 지원해 준다?’대출자 입장에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지만 ‘추가 이자 부담도 없이 설마…’라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현대캐피탈이 ‘책임 있는 대출(Responsible lending)’을 기치로 이 서비스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고객들이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책임 있는 대출’ 서비스 1년여 만에 실제 수혜자가 나오고 서비스 혜택 폭을 확대하자 경쟁 업체들도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알파벳 마케팅’ ‘테니스 슈퍼스타 매치 마케팅’ 등 국내 금융업계에서 그동안 전례 없던 기발한 기법으로 단숨에 시장점유율을 높여 온 현대캐피탈의 새로운 시도이니 업계가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버나드 반 버닉 현대카드·캐피탈 부사장은 “책임 있는 대출은 GE캐피털이 시행하고 있는 선진 금융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고객을 단순히 돈을 빌려가는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금융 회사도 대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서비스”라고 말했다.현대캐피탈은 올 초 책임 있는 대출에 재테크 문화 등을 결합한 플러스 멤버십까지 선보였다. 대출 이후 벌어지는 고객의 위기나 사고 대응, 그리고 성공적인 자산운용과 문화 활동까지 지원하는 통합 책임 금융 서비스다. 1월 통합 서비스 개시 이후 벌써 가입자가 20만 명을 돌파했다. 버닉 부사장은 “GE캐피털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지만 서비스 도입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어 조만간 보다 진일보한 모델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다른 금융사에서도 적극 도입한다면 고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출 고객이 이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현대캐피털이 손실 발생에 대비한 보험 상품에 가입해 놓은 덕분이다. 실제 지난해 6월 책임 대출 서비스를 처음으로 선보인 이후 현재까지 2명의 실제 수혜자가 나왔다. 700만 원을 대출받은 50세의 한 남성 고객은 사망으로 나머지 잔금 72%를 면제 받았고 대출받은 지 4개월 만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한 또 다른 고객은 원금의 94%에 대해 상환 면제 혜택을 받았다.대출 회사의 사후 책임을 강조한 이런 서비스는 캐피털 업계에 대한 고객들의 이미지 변화뿐만 아니라 실적에도 도움이 되는 윈윈 구조라는 게 버닉 부사장의 설명이다. “과거에는 대출이 종료되면 고객에게 펼칠 수 있는 마케팅도 제한되고 입금 안내, 연체 독촉 등의 부정적 커뮤니케이션이 많았다”며 “책임 대출 등을 통한 마케팅은 이를 긍정적 커뮤니케이션으로 전환해 재구매율 증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현대캐피탈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과거보다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2금융권은 턱없이 높은 단기 대출 금리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캐피털 업체는 6개월 미만 단기 대출의 금리가 40%에 육박해 대부 업체를 능가한다는 비판까지 일고 있다. 이에 대해 버닉 부사장은 일부 단편적 현상으로 시장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부 단기 대출 금리가 높은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크기 때문입니다. 단기 자금을 필요로 하는 고객 중 상당수는 사금융 시장으로 가기 직전의 심각한 수준이 적지 않습니다. 대출 회사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리스크 관리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기 고금리 대출은 캐피털 사업 영업 가운데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올해로 한국 생활 5년째인 버닉 부사장은 현대캐피탈과 현대카드에 GE캐피털의 선진 금융 기법을 이식하는 역할을 맡아 지금까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 GE와 현대자동차가 현대캐피탈과 현대카드의 지분 구조를 합작 형태로 바꾼 이후 1대주주인 GE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부사장 취임 당시 12조 원이었던 현대캐피탈의 자산은 지난해 15조 원으로 급증했으며 당시 한 자릿수에 그쳤던 현대카드 시장점유율도 14.3%로 껑충 뛰며 1위인 LG카드(16%)를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GE아시아의 수익 가운데 현대카드와 캐피탈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하면서 본사의 신임도 두텁다. 그는 “한국 시장에서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는 현대 브랜드와 GE캐피털의 금융 노하우가 결합해 특화된 기업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며 “현대캐피탈과 카드는 합작사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윈윈하는 흥미로운 모델인 동시에 한국의 금융 문화 선진화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부동산 열풍, 카드 사태, 금융권 빅뱅 등을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눈에 비친 한국 시장은 한마디로 역동적이다. “한국의 카드 사용 소매 비중은 약 30%인데, 이는 미국의 3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소비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카드를 활용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매력도가 높은 시장입니다. 또 특이한 점은 금융자산 비중이 높은 미국과 달리 부동산에 대한 선호도가 크다는 점입니다.”지난해부터 글로벌 시장을 강타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와 한국의 주택 담보대출과 비교해서는 “모기지를 다양한 파생상품으로 확대한 미국과 달리 한국의 주택 모기지는 훨씬 심플하고 투명할 뿐만 아니라 주택담보인정비율(LTV)도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어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고 진단했다. 다만, 지난해까지 낮았던 연체율이 올해부터는 다소 악화될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적으로 서브프라임 파장과 이에 따른 자본시장의 불안, 인플레이션 등 삼중고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올해가 전년보다 훨씬 힘든 시기가 될 것입니다. 한국의 대출 시장도 지난해와 달리 리스크가 확대될 수 있어 리스크 관리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실제 버닉 부사장은 이 같은 시장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이달 들어 임원들과 리스크관리 회의를 수시로 갖고 최근 전개되고 있는 국내외 시장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총부채상환비율(DTI), LTV와 실업률 등 주요 지표들을 집중적으로 체크하고 있다.그는 “서브프라임 사태에도 불구하고 GE가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이유는 GE만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갖추고 있는 덕분”이라며 “고객군에 대한 모델링을 통해 지급 능력을 확인하는 다양한 운영 노하우와 마케팅 툴을 확보하고 있고 이를 한국 시장에도 적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최근 카드사 간 경쟁이 다시 가열되고 있는 것과 관련, 버닉 부사장은 “현대카드는 알파벳 마케팅 등 선진 마케팅 기법을 통해 시장 선점 효과(first mover advantage)를 취한다는 전략 하에 움직이고 있다”며 “단순히 양적 팽창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는 마케팅을 통해 이미 확보한 고객의 유효 사용률을 높이는 질적 성장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쟁사들이 벌이는 과도한 고객 유치 마케팅은 지양하겠다는 얘기다.지금까지 현대카드가 시도한 다양한 마케팅 가운데 그는 특정 스포츠 분야의 신·구 황제 간 대결을 개최한 ‘슈퍼스타 매치’를 가장 성공 사례로 꼽았다. 샤라포바-윌리엄스, 페더러-샘프라스 등 테니스 스타를 국내에 초청해 성황리에 행사를 마친데 이어 올해는 국제적인 체조 스타 초청 대회를 개최했다.버닉 사장은 “단순한 브랜드 노출 효과뿐만 아니라 현대카드만이 줄 수 있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이미지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됐다”며 “앞으로도 스포츠 스타 초청 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한국 고객들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추구하는 회사라는 점을 계속 알려나가겠다”고 강조했다.현대카드·캐피탈 부사장INSEAD MBA맥킨지앤컴퍼니 프로젝트 관리자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GE 에쿼티 경영개선실 사장GE캐피털 인도네시아 사장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