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서부 도쿠시마 현의 산촌 마을인 가미이타 주민 1만3000여 명은 지난겨울을 난방 없이 지냈다. 기온이 영하 가까이 떨어진 적도 있지만 정부의 에너지 절약 운동에 동참한다며 추위를 견뎠다. 이 지역 관공서도 난방을 모두 끄고 공무원들은 외투를 입은 채 근무했다. 가미이타 관청의 이와제 다카오 행정국장은 “청사 난방을 꺼서 하루 10만 엔(약 100만 원)을 절약했다”고 말했다.일본에선 요즘 가정은 물론 사무실에서도 ‘풀다운 스위치(끈으로 되어 있는 스위치)’ 달기가 유행이다. 누구나 쉽게 전등을 끌 수 있도록 전등 밑에 끈을 길게 늘어뜨려 놓는 것. 스위치 위치를 잘 몰라 사무실 등의 전등을 불필요하게 켜 놓는 것을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다. 일본은 작년 여름 국민적 절전 운동을 통해 도쿄 등 수도권에서만 7000만kw의 전력을 아꼈다. 25만 명 인구의 도시가 한 달간 쓸 수 있는 전력량이다.일본은 ‘에너지 절약 선진국’으로 유명하다. 세계 2대 경제 대국이지만 에너지를 아끼는 데는 1등 국가다. 지난해부터 국제 유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지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일본이 허둥대지 않고 여유 있게 대응하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일본의 에너지원단위(국내총생산 1000달러어치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량)는 2007년 0.106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0.195의 절반이다. 한국(0.339)에 비해선 3분의 1도 안 된다. 에너지원단위가 작다는 건 그만큼 에너지 효율이 높다는 뜻이다.일본의 에너지 효율이 높아진 건 1970년대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부터다. 오일 쇼크로 경제 전체가 휘청했던 일본은 그때부터 민관이 에너지 절약에 올인(다걸기)했다.일본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위한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꾸준히 시행해 왔다. 종합적인 에너지 절약 기준을 규정한 ‘에너지절약법’을 만든 건 1979년이다. 28년 전부터 에너지 절약을 국가 시책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일본 정부의 에너지 절약 정책은 80개 정도다. 100여 개에 달하는 한국보다 오히려 적다. 그러나 국민들이 실천하기 쉬운 현실적인 정책을 개발해 장기적으로 추진한다는 게 특징이다. 일단 에너지 절약 정책을 마련하면 1년 이상 대국민 순회 설명회를 열고, 사후 효과를 평가하는 관리 시스템도 가동한다.예를 들어 경제산업성 주관으로 실시 중인 ‘톱 러너 프로그램(Top Runner Program)’같은 게 좋은 사례다. 에어컨과 형광램프, TV 등 품목별로 현재의 최고 효율 수준을 최저 효율 기준으로 설정하고 일정 기간 내에 목표 효율을 달성하도록 의무화한 시책이다. 일정 기간 내에 목표 효율을 달성하지 못하면 경제산업성이 해당 업체에 1단계로 권고 조치를 내리고, 2단계는 업체명을 공표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벌금도 부과한다.이런 강력한 시책에 기업들의 반발이 없는 것은 사전에 치밀한 정지 작업과 의견을 수렴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욱이 정부가 솔선수범했던 게 주효했다. 도쿄 시내 가스미가세키에 모여 있는 일본 정부 청사에 들어가면 지하실에 내려온 것처럼 복도가 어두컴컴하다. 조명을 켜지 않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으면 센서가 작동해 사람이 지나갈 때만 잠시 전등이 켜졌다가 다시 꺼진다.정부부터 허리띠를 졸라 매다 보니 국민들도 자연스럽게 에너지 절약에 동참한다. 도쿄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중간 중간에 시동을 끄는 걸 볼 수 있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뿐만 아니라 신호 대기 때에도 운전사는 시동을 끈다. 공회전을 막기 위해서다. 버스운전사 나카무라 쇼이치(46) 씨는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소모되는 연료는 공회전 3~5초 분량과 같다”며 “6초 이상 정지할 때는 시동을 끄는 게 경제적”이라고 말했다.일본 기업들은 에너지 절약에 아예 사활을 걸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1997년 경제단체인 게이단렌 주도로 36개 업종, 137개 업체가 에너지 절약 기술 개발과 투자 활성화를 위한 ‘자주행동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매년 실적을 공개한다.이 계획에 따라 도요타자동차는 연비 개선을 위해 자동차를 지금보다 10% 정도 가볍게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혼다는 대체에너지 보급 확대를 위해 태양광발전 패널 공장을 작년 10월부터 가동했다. 도시바는 전력 소비량을 백열등의 7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시장에 최근 진출했다.섬유회사 세이렌은 지난해 8월부터 공장에서 염색이나 건조에 쓰는 보일러 연료를 중유에서 도시가스로 바꿨다. 이를 통해 올해만 연간 7000만 엔의 연료 절감이 기대된다. 미쓰비시화학은 오카야마 현의 콤비나트 설비를 개량했다. 원래 연료로 쓰던 나프타 외에도 등유·경유를 혼합할 수 있게 해 최근 가동에 들어갔다. 가격이 급등하는 나프타의 양을 최대 20%가량 줄이게 된다.일본 기업들은 고유가 시대의 장기화에도 대비하고 있다. 주력 제품을 에너지 절약형으로 완전히 구조조정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일본 미국 중국에 이어 2010년께부터는 태국과 호주에서도 세계 전략 차종인 캠리의 에너지 절약형 하이브리드 카를 생산하기로 했다. 현재 캠리를 생산하고 있는 공장을 활용해 태국에서는 2009년 말, 호주에선 2010년 생산을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도요타는 이처럼 생산 거점을 늘리면 2010년대 하이브리드 카 생산 대수를 현재의 2배 정도인 연산 100만 대로 늘릴 수 있게 된다. 이 회사는 지난해 하이브리드 카를 전년 대비 25% 늘어난 43만 대 생산했었다. 미쓰비시자동차도 전기자동차의 국내외 판매를 확대해 2011년 1만 대 생산 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이 회사는 내년에 일본에서 전기로 움직이는 경자동차 ‘아이(i)’를 본격적으로 시판한다. 당초 연산 2000대 생산을 계획했지만 이를 늘려 2011년 1만 대 생산 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2010년부터는 수출도 시작해 영국 프랑스 호주 싱가포르 미국 등에서도 판매할 예정이다.하이브리드 카나 전기 자동차는 아직 가솔린 자동차에 비해 가격이 30~40% 정도 비싸지만 최근 휘발유 값이 급등하면서 점차 소비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하이브리드 카와 전기 자동차가 양산 체제를 갖추면 가격 인하 효과도 발생해 판매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도요타자동차 관계자는 “당초 하이브리드 카와 전기 자동차는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등 환경 규제 등에 대응에 개발한 자동차이지만 최근 휘발유 값 급등으로 대중차로서의 보급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신·재생에너지 개발에서도 한국보다 10년 정도 앞섰다. 일본은 1993년부터 신·재생에너지 개발과 활용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뉴선샤인(New Sunshine)’ 계획을 마련했다. 또 원자력 석탄 천연가스 등 대체에너지를 개발함으로써 석유 의존도를 줄여갔다. 그 결과 1차 오일 쇼크 당시 77%에 달하던 석유 의존도는 45%로 크게 낮아졌다.실제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했던 1973년 일본의 하루 원유 수입량은 500만 배럴이었다. 그러나 2006년엔 425만 배럴로 15% 줄었다. 같은 기간 일본의 GDP는 117조 엔에서 550조 엔으로 4.7배 늘었지만 원유 수입량은 오히려 감소했다. 한국의 하루 평균 원유 수입량이 1973년 28만 배럴에서 2006년 244만 배럴로 8.7배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제3의 오일 쇼크에 대비해 해외 유전 개발에도 적극 나섰다. 80%가 넘는 석유의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사할린 석유·가스개발 프로젝트, 카자흐스탄·카스피해 유전 지분 매입 등 해외 유전 탐사에 과감히 투자했다. 대표적인 게 1996년 당시 통상산업성(현재 경제산업성)이 주주로 직접 참여해 이토추·마루베니상사와 함께 지분 30%를 투자한 ‘사할린1’ 프로젝트. 2006년 10월부터 이곳에서 생산되는 원유가 일본에 공급되고 있다. 일본이 2000년까지 해외 유전 개발에 투자한 금액은 501억 달러에 달한다. 한국(약 32억 달러)의 15배가 넘었다. 그중 공공 부문 투자는 200억 달러로 한국(7억2000만 달러)의 28배나 된다.일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에너지 효율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더 높은 목표를 세워 밀어붙이고 있다. 일본은 작년 5월 ‘신국가 에너지 전략’을 수립했다. 2030년까지 지금보다 에너지 소비 효율을 30% 개선하겠다는 목표다.한국도 어쩔 수 없는 고유가를 놓고 ‘죽는 소리’만 할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에너지 절약’을 최우선 국가 과제로 추진하면 어떨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법이다.차병석 한국경제신문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